혼자지만 싱글은 아닌

6. 좁은 세상

by 무기명

2021. 09. 01.


특별한 날이다. 2개월의 인턴을 거쳐 6개월 계약직 끝에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기점이다. 또한 6년 만에 고등학교 동창을 만나는 날. 이 친구는 대학 1년 차인 2015년 겨울쯤 보았다. 동네 독서실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인데 고등학교 후배가 다니는 곳이었다. 그 후배가 잘 따르고 늘 붙어 다니는 동창이 있었는데 독서실에 놀러 온 것이다. 잠시 비상계단에서 짧게나마 담소를 나누었다. 다니고 있는 대학은 어떻냐, 뭐하면서 지내냐 같은 메아리로 적막한 비상계단을 채웠었다.


6년 뒤,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보다가 신기한 광경을 목격했다. 동아리 친구와 그 친구의 스토리가 똑같았다. 다시 보니 둘은 같은 회사. 심지어 같은 팀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DM을 보냈다. 친구는 최근에 이직을 했고 나와 같은 광고 직군에 종사하고 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동아리 친구 포함해서 밥 먹자는 말로 귀결되었다. 뻔한 말로 대화를 끝내는 방법은 역시 나중에 밥 한 번 먹자 아닐까.

정규직 전환 계약서를 갱신하고 찍은 동기들과의 사진을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올렸다. 좋은 소식을 올린 만큼 오랫동안 교류가 없었던 친구들과 다시 연락이 닿았다. 인스타그램 스토리의 순기능은 이거다. 안부를 자연스럽게 물어볼 수 있다. 덕분에 "뭐해?" 또는 "잘 지내?"류의 신드롬은 면할 수 있다. D에게도 축하한다는 연락을 받았고 뭉뚱그렸던 밥 약속을 구체적으로 잡게 되었다.


칼퇴를 하고 동창 회사가 있는 학동으로 가기로 했다. 대신 어딜 갈지만 정해 달라했고 피자와 파스타를 파는 식당에서 만났다. 오랜만에 보며 마스크를 낀 모습은 처음 보는 거라 알아볼 수 있을까 걱정했다. 괜한 걱정이었다. 저녁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아담한 식당 구석에 혼자 있었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 짧게 안부를 묻다 메뉴를 주문했다.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점찍어둔 메뉴를 시켰고 술을 시킬까 하다 와인에이드가 거슬렸다. 주문했지만 준비가 되지 않았다 했다.

여담이지만 가끔 나만의 컨셉을 잡을 때가 있다. 여러 성격이 있지만 하나를 극대화하는데 그날은 ENTJ에 맞게 굉장히 계획적이고 자기 관리에 철저한 캐릭터였다. 이를 다른 친구에게 말했더니 기겁을 하더라... 그냥 내가 재밌으려고 하는 건데. 음... 글로 쓰다 보니 좀 이상하게 보이긴 하다. 뭐 어찌 되었든.

극단적 ENTJ였던 그때의 나는 그 친구를 만나러 가는 지하철에서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생각해봤다. 갤럭시 노트로 마인드맵을 그리면서. 대화의 흐름을 구상해봤다. 처음에 안부를 묻고 우리의 공통 소재인 광고 직군에 대해 말하고 진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고등학교 때도 꿈이 광고인이었냐는 흐름이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다음은 대화의 만능키인 MBTI에 대해 공유하는 흐름이다. 추가로 재테크와 여자친구 LA 관련해서 말하면 1~2시간은 뚝딱이다.


그 친구와 어색하지 않았다. 6년간 쌓아둔 이야기가 있었기에. 둘이 비슷한 상황이 많았다. 같은 고등학교, 같은 광고 직군, 같은 MBTI. 마음이란 게 참 그렇다. 매번 봐야 하는 사람 같은 경우에 쉽게 마음이 열리지 않는다. 속에 깊은 이야기를 기피하게 된다. 내 이야기를 하기보단 누군가의 이야기나 다른 가십거리들을 읊게 된다. 그래서 회사에 뒷담화가 자주 오가나 보다. 그와 달리 우연히 만난 사람이거나 일회성의 만남일 사람과는 오히려 속 깊은 이야기를 꺼내기 쉽다.

속 시원했다. 이런 매력 때문에 일일 알바를 자주 했던 것 같다. 돈도 벌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예전 환경콘서트 관련 일일 알바를 했었다. 꽤 스케일이 큰 콘서트라 환경 레이싱도 했다. 누가 연비를 아끼나를 겨루는 착한 경기. 출발 스타트를 알릴 깃발 보이를 뽑았다. 나와 어떤 형이 선발되었다. 그분은 이제훈의 레이아웃을 띠고 있었다. 하얗고 선선한 외모에 큰 키는 아니지만 보기 좋은 실근육들. 그분과 파트너가 되어 모든 일을 같이했고 점심도 먹고 딴짓도 했다. 그때 나눈 이야기의 장르는 블록버스터다. 여행, 꿈(그분은 사진가였다), 대학, 가치관, 이성 등. 알바를 관리하는 분께서 둘이 원래 아는 사이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D와 순탄히 이야기를 하다 맥주를 주문하자 했다. 하지만 맥주가 없단다. 우린 배가 불렀기에 남은 음식들을 뒤로한 채 2차를 옮기기로 했다. 1차는 친구가 계산하기로 했다. 회사와 제휴된 곳이라 할인받을 수 있단다. 한국인은 상대방의 호의를 2번 이상 거절하는 게 국룰 아니겠는가. 심지어 오랜만에 만난 친구랑 돈 문제는 특히 그렇다. 예상과 달리 그냥 바로 좋다고 했다. D는 살짝 당황하며 웃었고, 난 요리사가 맛있게 먹는 손님을 보고 만족하듯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며 웃었다.

1차를 얻어먹었기에 2차는 내가 산다고 했다. 어디를 갈지 이번에도 앞장서 달라고 했다. 언덕을 올라 8분 정도 걸었나 골목과 대로변의 특성을 모두 담은 술집으로 들어갔다. 통유리라 내부가 다 보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커플이었고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역시 강남인가 보다란 생각이었다. 아니, 그곳은 와인을 파는 곳이었다. 친구가 당황하더라. 여기 처음 와봤다고. 2차를 내가 산다고 했는데 와인바를 온다라... 고단수라고 놀렸고 우린 말하지 않아도 진열된 와인을 톺아보며 그나마 가성비를 찾고 있었다.


와인. 생일이나 크리스마스와 같은 특별한 날이면 와인을 즐겼다. 아직 와인의 맛은 잘 모른다. 다만 적당히 달달하고 살짝 무거운 맛을 선호했다. 연애 초반엔 집에 남는 와인이 있어 가져 갔다. 10만 원이 넘는 와인. 하지만 우린 '오프너로 와인 따는 법'을 검색하고 있는 아마추어였다. 와인을 맥주 마시듯 마신 우린 나름 만족했다. 다 마신 병을 진열하는 그녀의 표정에서도 느껴졌다. 그 표정은 비싼 와인뿐만 아니라 편의점에서 파는 진로 와인을 마실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와인이란 단어를 마시고 즐기고 있던 것이다. 비싼 술을 마시든 아니든, 좋은 술을 마시든 아니든 취하는 건 똑같지 않을까. 얼굴이 빨개지는 게 더 귀품 지게 보이진 않을 테니.


D와 와인을 고르던 중 아이레벨에 놓인 덜 부담스러운 가격의 레드와인을 택했다. 안주는 전형적인 와인 안주들이었고 우린 햄 슬라이스에 각종 채소들이 버무려진 이름 모를 안주를 시켰다. 다행히 와인은 맛있었다. 다만 입술과 하얀 이가 점점 보랏빛으로 물들고 있었지만. 왜 분위기 있는 와인집이 어두운지 이렇게 알게 된다.

1차 때는 호구조사 비슷하게 지난 6년간의 행적을 조각처럼 맞춰보았다면, 2차는 주제가 달랐다.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이야기할 때 가장 흥미로운 주제, 추억이다. "그래 너 그때도 솔직했었지", "맞다 너 그때 개그케였다" 동창을 만나면 '라테는' 보다 '너그때'를 자주 외치게 된다. 그 말을 들으며 그땐 그랬었지. 지금과 어떤 면이 좀 달라졌을까 고민할 틈도 없이 말을 하게 된다. 추억을 담은 물방울 하나하나 모인 6년 산 물풍선이 터지듯. 각자의 '나'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면 '나'의 주위를 둘러본다. 너랑 친하게 지내던 그 친구. 그 친구의 근황이나 소문. 소문은 유통기한이 없나 보다. 들어도 들어도 신선하게 맛있다. 나만 알고 있는 D와 친했던 친구의 이중적 사실이 존재함을 말했다. 어차피 그 친구는 앞으로 볼 친구가 아니기에. 사람으로서의 연을 끊은 건 아니지만, 나만 알고 있는 이중적 사실은 꽤나 충격적이기에 그를 멀리하고 있다. 티저를 보여주듯 그 사실의 앞단만 말한다. 궁금증과 일말의 짜증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 친구에 대한 충격적인 사실을 알아. 그게 뭐냐면... 음 아니다..." 역시나 D의 큰 눈은 더 커지고 추측을 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괜히 없는 사람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기 꺼리기에 오직 짜증을 유발하기 위한 용도로만 활용한다.


같이 술을 마시는 게 처음이라면 꼭 하는 말이 있다. 술을 따르며 "주량 어떻게 돼?" D는 소주 한 잔이란다. 당시 분위기가 약간의 허세와 빈말을 주로 하는 자리라 당연히 거짓임을 알고 있다. "그래, 잘 마시는구나." 술 한 잔이 주량이라던 친구는 빠른 속도로 잔을 비운다. 그렇지, 한 잔의 기준은 와인이 아니었으니까. 점점 비워지는 와인에는 우리의 이야기가 채워졌다. 할 이야기가 많아 무엇부터 말해야 할지 고민할 정도였다. 와인은 이제 마지막 잔이었고, 직원이 이제 마감시간이라 한다. 불콰해진 우리의 얼굴에는 살짝 아쉬움이 담겨 있었다. 그래도 할 말 없는 상태로 자리에 일어나는 것보다 약간의 아쉬움이 남은 채로 집에 가는 게 더 깔끔하니까 그런 분위기를 선호한다. 기분 좋게 자리에 일어나 버스정류장까지 걸었다. 그날의 밤공기는 새벽의 향이 머금었고 길거리는 초점을 잃은 불빛처럼 아롱아롱거렸다. 취한 게 아니라, 강남의 환한 가로등, 곳곳의 번질거리는 대리석 길바닥과 쌩쌩 지나가는 차들이 만들어낸 환장의 하모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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