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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경희 Sep 19. 2020

제주 1-자연주의 건축기행

국내 여행  제주 1 - 푸른 바다를 담은 건축기행

몇 번을 가고 또 가도 자꾸 가고 싶은 제주 여행! 생각만 해도 설렘 주의보이다.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로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 남쪽 바다 큰 섬 제주도. 새벽 비행기로 출발, 제주공항에 도착하니 종려수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에 이국적 정취가 실려온다. 음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프랑스 작가 마르셀 푸르스트는 여행이란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가지는 데 있다고 했다. 어딜 가도 만나는 푸른 하늘을 담은 바다, 우뚝 선 한라산 기슭, 철 따라 여러 모습으로 반기는 이 매력적인 특별자치도 제주. 바람과 돌이 많은 제주라는 공간에 적응하고 살아가는 인간을 위한 공간, 제주의 멋진 건축물을 바라보는 눈을 여행  주제로 정했다.



주로 H렌터카를 이용하다 보니 공항 주차장에서, 셔틀을 타고 자동차를 찾으러 갔다. 남광로에 위치한 고사리 육개장 집에서 향토색 짙은 아침 식사를 마치고 서남지역 안덕면을 중심으로 건축 여행을 시작했다.

'건축은 인체'와도 같다는 김중업의 생각처럼 건축은 삶의 공간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공간은 사람의 생각과 이야기를 담고, 감정과 추억이 쌓이고 세대에 걸쳐 이어진다. 공간에 담겨진 이야기를 찾는 건축여행은 그래서 재미있다.

산록의 지형에 어울리며, 극대화된 단순함을 통해 본래의 것을 느껴보게 하는 곳, 시간에 따라 서로 다른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 수풍석 뮤지엄을 찾았다. 돌과 바람과 물을 테마로 삼고,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특별함을 만날 수 있는 곳이었다. 계절마다 반기는 모양이 다르고, 날씨에 따라 다르게 와 닿는 곳이었다. 하루에 두 차례, 투어 신청을 통해서 관람이 가능하며, 인터넷으로 미리 예약해야 한다.


영화 이타미 준의 바다 포스터


일본에서 나고 자란 재일교포 건축가 이타미 준은 프랑스 예술훈장을 받을 만큼 세계적인 건축가로 성장했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과 뿌리에 해당되는 한국의 전통문화를 중시했고, 한국적 정서를 건축세계에 반영했다. 제주도에 수풍석 박물관을 비롯, 포도호텔, 방주 교회  등을 세우면서 바람과 돌과 물을 담고 그 속에 인간의 사유를 담는 건축물을 만들어냈다.

바람의 건축가, 시간을 선물하다는 주제로 이러한 이야기들은 다큐멘터리 영화 '이타미 준의 바다'에 이미 소개된 바 있다.


빛의 변화와 삼방산을 담은 석박물관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석박물관의 빛(봄)


먼저 도착한 석(石) 박물관은 비와 바람을 맞고 자연스럽게 색이 변하도록 의도한 녹슨 붉은 외벽이 인상적이었다. 단순한 외관, 텅 빈 내부에는 오직 두 개의 창과 납작한 돌만이 존재했다. 그 적막한 공간에 한줄기 빛이 그림자를 남겼다. 원주에 설치된 뮤지엄 산에 전시된 제임스 터렐의 공간과 빛이 제주 산록으로 옮겨온 느낌이었다. 왼쪽 천장에 뚫린 둥근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은 시간에 따라 모양과 밝기를 달리하고 있다. 정오에는 정확하게 바닥에 놓인 돌 가운데를 통과하지만 우리가 간 시간은 오전 10시 30분이라 약간 비껴있었다. 앞마당 쪽 넓은 창 너머 돌로 조각한 부처의 손과 복숭아가 있고, 뒤로 멀리 산방산이 보였다. 오른쪽 아래 길게 난 창은 뒷마당을 향해있었고, 역시 창으로 난 단면 위에 동그란 돌이 얹혀있다.


 다산 선생의 지식경영법에 나오는 '잠심완색, 융회관흡'이  떠올랐다. 마음을 그 속에 푹 담그고, 그 의미를 탐색하게 되면 전에 모르던 것들이 어느 하나 모를 것 없는 상태가 되고, 한 꿰미로 꿰어 속속들이 무 젖는다는 것이다. 그냥 한순간에 공간이 주는 시간과 역사를 저절로 알아버린 기분이었다. 텅 빈 공간이 주는 여유와 그 속에 깃든 자아를 만나는 멋진 기회였다.  


바람의 집 풍박물관
 풍박물관의 빛 그림자


수풀 사이 일정한 간격으로 이어진 갈색 적송 판 사이로 바람이 드나드는 풍(風) 박물관은 고급스럽고 중후한 느낌이다. 지붕은 두 면이 맞닿은 박공 형식으로 되어있으며 세월을 담은 나뭇결에 바람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바람 소리가 잘 들리도록 반대쪽은 휘어진 곡선 모양으로 되어있다. 나무벽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정연하게 비추는 빛 그림자에서 단순함이 주는 큰 힘을 느꼈다.  큰 방에 세워진 두 마리의 양이 이곳을 지키는 수호신인가 보다. 작은 방에 마련된 돌 위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자유롭게 드나드는 바람의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시시각각 변하는 빛과 그림자가 작품이 되는 공간이다. 무형의 바람을 청각적, 시각적으로 느끼는 순간은 자연과 하나된 기분이었다.


수 박물관 가는 생태공원-여름
수 박물관 가는 생태공원-가을
외부에서 바라본 수 박물관 - 가을


사계절 아름다운 생태공원 오솔길을 따라 걷다 보니 아담한 호수 위를 지나는 오솔길이 있다. 천천히 걷다 보면 호수와 숲의 환상적인 경치에 매료된다. 어느 곳에서 바라보아도 모두가 한 폭의 그림이었다.  10분 정도 걷다 보면 둥근 지붕이 보이는 수(水)박물관이 나온다. 둥근 모양의 가운데를 뚫어놓아 하늘을 담으려 한 듯했다. 입구의 삼족오를 찾아낸 후 안으로 들어가면 벽면의 거북이,  입구의 브론즈로 세워진 용이 아마도 이곳을 지키는 수호신인가 보다.  


수박물관의 수호신들
하늘이 반영된 겨울의 수박물관
빛에 포착된 수박물관의 봄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하늘의 빛이 그대로 수박물관에 반영된다. 사면에서 보는 모습이 모두 달라 구석구석 옮겨가며 감상할 수 있다. 천장이 열려있어 비올 때는 빗줄기가 호수에 튀어 올라 물방울이 만들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맑은 날에는 하늘이 고스란히 들어오고, 각도에 따라 멋진 그림자가 나타난다. 눈이 오는 날은 아직 보지 못했으나 아마도 그림처럼 아름다운 모습일 듯하다. 한날한시에 비와 구름과 햇빛을 동시에 만나는 행운을 가졌던 곳이기도 하다. 아래쪽에서 천장을 향하여 사진을 찍었더니 근사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빛에 따라 다양하게 반영된 그림자가 너무 아름다워서 나무에 프린트하여 지금도 책상 옆에 두고 있다.  


두 손 박물관 외관
천장에서 빛이 들어오는 두손박물관 내부


두손 미술관으로 역시 이타미 준이 디자인 한 곳. 지상 부분은 입구 겸 천장으로 유입되는 빛을 받기 위한 공간이고, 미술관은 지하에 배치했다. 멀리서 보면 두 손을 깍지 끼고 있는 듯한 모습이라서 두손박물관이라 하나보다. 지하로 가는 공간에서 나오시마의 지추 미술관과 이우환 미술관이 떠올랐다. 자연을 훼손을 막으려 전시 공간을 지하로 빼고, 건물을 높지 않게 지은 나오시마. 노출 콘크리트의 부드러운 질감으로 벽체를 표현하여 전시 작품들을 돋보이게 했다. 지붕 틈새에서 내려온 빛은 강렬하게 전시 공간을 파고들었다. 빛과 방향이 건축에 미치는 영향을 실감했다. 까만 대리석 바닥 가운데 놓인 흰색 돌, 입구 손잡이에서 느껴지던 디테일, 내부에 전시된 나무 한그루 색다른 인상을 주는 곳이었다.


방주교회의 반짝이는 지붕
노아의 방주처럼 물 위에 떠있는 교회 외관


방주교회 역시 이타미 준이 노아의 방주를 모티브로 설계한 교회이다.  특히 금속 느낌의 지붕은 설계를 14번 이상 고칠 만큼 심혈을 기울인 곳이다. 이 지붕이 햇빛을 받으면 반짝거리는 것이 마치 바다 위의 은파 같다. 비 오늘날 또한 차분하게 수면 위에 우뚝 서있는 모습은 노아의 방주이다. 전면의 모습은 한 마리의 독수리가 두 날개를 펴고 하늘을 향해 오르는 듯 했다. 상상은 누구나 할 수는 있지만, 그 상상을 실현하려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대단한 사람들이다. 이타미 준은 자연에 그림 그려내듯 상상과 생각을 땅 위에 만들어 낸 대단한 건축가이다.


방주교회 외관의 반영
규칙성이 보이는 방주교회 내부


방주교회는 인공샘으로 둘러싸여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데, 정갈한 모습이다. 내부는 규칙적이고 엄숙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교회 외부 어디에도 종교적인 상징물이 없어 건축물 자체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방주교회는 어느 각도에서 사진을 찍어도 멋지게 나오는 아름다운 건축물로 유명하다. 


석양의 포도호텔-영화 장면
겨울에도 멋진 포도호텔


포도호텔은 이타미 준이 제주의 오름과 초가집을 모티브로 설계한 건축물이다. 하늘에서 내려다 봤을 때 마치 포도송이처럼 보인다 해서 포도호텔이라 한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자 한국의 민화와 자연의 아름다움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의 작품에는 자연주의 철학이 담겨있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려는 노력이 곳곳에 보인다. 객실에서는 정문을 통하지 않아도 테라스로 나오면 바로 자작나무 숲을 산책할 수 있다. 또한 긴 복도 중앙에는 하늘을 향해 그대로 뚫려 있는 유리관 창을 따라서 물이 흐르고 있어 마치 돌로 된 바닥이 물 위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일반 예약은 어렵지만 방문 투어가 가능하고, 갤러리 탐방도 할 수 있다.


본태뮤지엄 입구
한국 담장이 경계를 이룬 본태뮤지엄
통로에 액자처럼 보이는 산방산


건축계의 노벨상 플리츠상을 수상한 유명 건축가 안도 다다오. 그가 건축한 본태박물관, 유민 미술관, 글라스하우스 역시 아름다운 건축물로 꼽힌다. 1941년 오사카에서 태어난 안도 다다오는 정식 건축 교육을 받지 않았음에도 노출 콘크리트 방식 등 자신만의 건축 스타일을 만들어냈다. 현대건축의 대가 르 코르뷔지에 영향을 받아 자연채광, 노출 콘크리트 질감, 자연과 공존 등을 건축물에 구현해냈다.

그중 본래의 형태라는 뜻을 가진 본태 박물관은 한국 전통 수공예품과 현대 미술 작품을 전시해 놓은 곳으로 2012년 11월에 개관했다. 한국의 전통 담장과 좁은 골목으로 경계 구분, 가느다란 냇물과 다리로 구성해 한국적 느낌을 주었으며 곳곳의 열린 창에서 산방산이 보이도록 했다.


쿠사마 야요이의 무한거울방
쿠사마 야요이의 노란 호박
옥상 정원의 로버트 인디애나의 love 조형물


 제1관은 한국 전통 수공예품, 제2관은 살바도르 달리, 페르낭 레제, 이브 클라인, 백남준 등 현대를 대표하는 작가의 미술 작품을 만날 수 있다. 3관은 설치 미술가인 쿠사마 야요이의 상설전시관으로 검은 점무늬 노란 ‘호박’ 작품과 ‘무한 거울방 - 영혼의 광채’ 조형물 2점이 영구 설치되어 있다. 무한 거울방은 들어서는 순간 무한대의 경이와 공포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독특한 경험을 할 수 있다. 벽면과 천장은 온통 거울로 채워져 있어 백여 개 반짝이는 전구들이 거울과 수면을 통해 사방으로 빛이 반사된다. 제4관은 “피안으로 가는 길의 동반자”를 주제로 꽃 상여와 부속품을 볼 수 있다. 죽음으로 가는 길에서도 아름다움을 추구하던 한국의 전통문화를 만날 수 있다. 제5관은 기획특별전을 여는 공간으로 현재는 한국 불교미술과 관련한 소장품이 기획 전시되고 있다.


본태 박물관 외부 조각 작품들
데이비드 걸스타인의 행복감-희열
본태뮤지엄의 호수를 배경으로 멋진 의자에서


 박물관 외부에 있는 조각공원은 산책을 할 넓은 공간과 로트르 클라인-모콰이의 붉은  ‘Gitane(프랑스어로 집시를 뜻함)’, 하우메 플렌사의 금속을 활용한  ‘Children’s Soul‘ 등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옥상정원에 세워진 로버트 인디애나의 love 조형물을 만나고 바라본 산방산의 모습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카페에서 커피 한잔 마시면서 이스라엘 작가인 데이비드 걸스타인 행복감 희열!! 그런 하루이길 이라는 작품을 보니 소소한 행복감이 들었다. 나비를 싣고 자전거를 타는 행복한 여성을 따라가고픈 기분이 들었다. 하얀 백조 두 마리 떠다니는 호수를 배경으로 카페에서 여유롭고 편안한 시간을 붙잡고 싶었다. 구석구석 참 멋진 곳이다.

          

박충흠의 ‘무제’가 반기는 제주 현대미술관
제주 현대미술관 전경
제주 현대미술관 야외 조각품


제주 현대미술관은 제주시 한경면 저지문화예술마을에 지상 2층의 본관과 1층의 분관으로 지어졌다. 자연 친화성 공모 최우수작으로 건축사 김석윤이 설계했다. 김흥수 화백이 무상으로 기증한 작품이 전시된 특별전시실, 상설전시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내부 공간도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다. 야외에는 어린이들의 꿈과 상상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신종 생물 조각이 전시되어 있다. 네모난 사각형을 옆으로 기울여 만든 파란색 도형 조각물도 나름 멋졌다. 독특한 그림으로 칠해진 카페도 눈에 띄었다.


봄이 오는 저지 예술인 마을
예술인 마을에 세워진 작품

 


제주 현대미술관이 있는 곳이 약 99,383㎡의 저지문화예술인마을이다. 한옥 건물을 비롯 20여 동의 예술인 창작 건축물이 자리 잡고 있다. 작가들 생활공간과 개인 미술관이 공존하는 마을이다. 멋지게 만들어진 건축물을 둘러볼 수 있게 마을 길들도 잘 조성되어 있다. 특히 정원과 곳곳에 세워진 조각품들이 멋스럽다. 이런 곳에서 문화 예술 생활을 즐기는 호사를 누려보고 싶다.


추사의 세한도
제주 대정 추사관


추사 김정희의 유배지로 추사체를 완성한 곳이 제주도. 서귀포 대정읍에 2017년 새롭게 단장한 추사관은 건축가 승효상의 작품이다. 그는 김정희의 대표작 세한도를 추사관에 담았다. 세한도에 그려진 소박한 집의 둥근 창호가 추사관에 만들어졌다. 추사의 완당집에는 ‘옹유(甕牖)’라는 글이 있는데, 옹유는 밑 빠진 항아리로 만드는 창이라는 뜻이다. 둥근 모양의 창에 대한 묘사가 유배지의 삶을 대변하는 듯했다.

지그재그 형태로 되어있는 계단을 따라  지하로 입장해 세한도와 기타 자료를 살펴보고, 천장을 바라보니 옹유와 긴 창으로 들어오는 빛이 생동감을 준다. 건축가의 의도가 공간의 빛으로 다가온 느낌이었다. 옹유라는 단어 앞에서 잠시 나를 돌아본다. 내게 밑 빠진 독처럼 둥근 창호의 숨구멍과 쏟아져 들어오는 빛은 무엇일까?  


추사의 유배지 돌담과 초가
제주 대정 추사 유배지


동선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면 추사가 머물렀던 작은 초가집이 그 자리에 서 있다. 추사의 유배시절처럼 한적한 동네에 자리 잡고 있다. 돌담으로 둘러싸인 대문을 들어서면  흙마당과 띠로 엮은 지붕, 그 아래 비스듬한 기둥이 받치고 있는 또 하나의  처마를 볼 수 있다. 비와 바람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제주 민가의 모습이었다. 비 많이 오는 제주도. 이곳 처마에서 뚝뚝 낙수물 떨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는 추사와 어울릴 듯하다.


'눌'을 형상화한 기당 미술관-서귀포시
기당 강구범 선생 동상


‘눌’은 제주에서 추수 후 부산물을 동그랗게 쌓아 놓은 것을 부르는 말로, 곡식을 쌓은 낟가리이다. 지붕에 동그란 ‘눌’의 형상이 보이는 기당미술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시립미술관이다. 제주 출신 재일교포사업가 기당 강구범 선생이 서귀포시에 기증한 건축물이다. 제주 전통 농가의 ‘눌’을 모티브로 건축가 김홍식이 설계하였다. 몹시 전통적이고 창의적인 디자인의 건축물이다. 입구 바닥에도 눌의 모양이 조성되어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둥그런 눌의 형상이 드러나는 서까래가 보이고, 정갈한 한옥처럼 전통적인 느낌을 준다.


변시지 화가의 작품
변시지 화백의 특별 전시공간


이곳의 초대 관장은 제주가 고향인 '바람의 화가' 변시지 선생님이다. 후기 인상파 고갱, 고흐 등을 연상하게 만드는 변시지 화가. 오로지 황톳빛과 검은색만으로 제주를 표현한 작품을 들여다보면 꿈틀꿈틀 움직이는 듯한 선과 빛을 만나게 된다. 해송 나뭇가지의 방향과 사내의 자세, 소의 모양과 까마귀, 초가지붕 그리고 바람! 에너지가 꿈틀대는 수묵담채화를 본 듯한 느낌이었다.

각각의 그림들은 잔잔하다, 바람이 불고, 태풍과 풍랑이 일어나 거친 파도가 넘실대기도 한다. 담백하면서도 고도로 절제된 감정 속에서 사내는 평온하게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때론 뒤로 돌아 바람을 피하기도 하고 땅바닥을 바라보며 뭔가 기다리기도 했다. 황톳빛 풍경은 화가의 삶이 표현된 듯하고, 내면의 성찰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쯤이면 선의 경지를 느끼게 된다.


안양 만안구 김중업 건축 박물관
르 꼬르비지에 설계사무실 활동 당시 (뒷줄 왼쪽 4번째 )


 평양 군수의 아들로 태어나 일본에서 건축을 공부하고, 건축의 거장 르 코르뷔지에 밑에서 3년 넘게 일하며 현대 건축을 온몸으로 배운 건축가 김중업. 군사정권 시절 한참 활동하던 시기에, 건축정책에 대한 당연한 비판과 쓴소리 댓가로 조국을 떠나 있어야 했었다. 김중업의 유작은 올림픽 공원 평화의 문. 정권의 요구에 따라 설계가 춤추던 작품이었다.

그를 기념하는 김중업 건축박물관이 안양시 만안구에 자리 잡고 있다. 초기 공장 건물에 조각 작품을 접목시킨 ㈜유유산업 안양공장을 리모델링 한 건물이다. 2018년에는 30주년 특별기념전으로  르꼬르비지에의 특별전도 열었다. 아카이브를 비롯한 설계도면까지 볼 수 있어서 전시회가 참 좋았었다.


김중업 건축가의 원형이 보존된 서귀포여중


1세대 건축가로서 큰 업적을 남긴 그가 제주에 남긴 작품 중 원형이 잘 보존되고 있는 것이 서귀포 여중이다. 제주대 농과대학 건물이었으나 이전 후 지금은 여중 건물로 쓰이고 있는데 서강대 본관과 비슷한 차양 구조를 갖고 있다. 건물의 사면 모두 다른 이미지, 앞뒤로 보이는 교실 창문은 하나도 같은 폭이 없다. 층마다 넓게 드리워진 차양이 햇빛을 만나며 생긴 그림자, 차양과 그림자가 추상화를 만든다. 파란 하늘 아래 노란색 벽면, 빛에 따라 달라지는 삼각형 그림자는 검은빛이다. 건축은 공간 예술이다는 김중업의 문구가 떠올랐다. 삶에 있어 소중한 것 역시 빛과 방향이다. 그리고 제대로 보기 위해 눈높이를 높이 두는 안목도!


김중업 건축으로 추정되는 소라의 성


북카페 겸  쉼터 ‘소라의 성’은 올레길 6구간 정방폭포 근처에 자리 잡고 있다. 아름다운 건축물로 보존 가치가 있는 근대 문화유산으로 평가받는 이 건축물이 김중업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2층의 돌출부에서 떨어지는 필로티 구조와 둥글둥글한 벽면을 지을 당시 설계 가능한 사람이 김중업 건축가였기 때문이다.

야자수 아래에 그림처럼 서 있는 소라의 성 내부로 들어가면 동그란 벽면이 끊어지고 이어진다. 사라질 위기에 있었지만 여행자의 품으로 돌아와 멋진 바다 전망을 선사하는 곳. 공간 예술이라는 철학에 맞게 예쁘게 지어진 특별한 건축물이다.


건축학 개론 영화 제주 서현의 집
제주 카페 서현의 집 바다뷰


2012년, 이용주 감독이 연출했던 '건축학개론'이라는 영화가 있다. 누구나 아련한 추억으로 남는 첫사랑을 그린 영화이다. 숫기 없던 스무 살, 건축학과 승민은 '건축학개론' 수업에서 처음 만난 음대생 서연과 마음을 열고 친해지지만, 작은 오해로 인해 멀어지게 된다. 서른 다섯 건축사가 된 승민 앞에 15년 만에 불쑥 나타난 서연은 자신을 위한 집을 설계해달라고 한다. 첫 작품으로 서연의 집을 짓게 된 승민은 함께 집을 완성해 가는 동안 철없던 시절의 기억이 되살아나고... 집을 짓는 것이 갖는 의미를 찾아보던 영화였다.


현재 카페로 이용되는 서현의 집


서귀포 남원읍 위미리, 올레길 5코스에 위치한 서현의 집은 영화 속 장면들을 담고 있는 멋진 카페이다. 서연이 창가에 걸터앉아 음악을 듣는 장면처럼 넓은 창문을 통해 바다를 바라보는데 김동율의 떨리는 음색으로 너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볼 수만 있다면~~ '기억의 습작'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한비야는 다른 문화 다른 사람을 만나고, 결국은 자기 자신을 만나는 것이 여행이라고 했다. 아득히 머나먼 시간 속에서도 나에게는 청춘의 시절이 늘 함께 있다. 때론 기쁘고, 때론 힘들기도 한 묵묵히 걸어온 시간들이 지금의 나를 여기에 있게 한 것이다. 내 삶의 한줄기 관통하는 빛은 여행이다. 새로움을 찾아 나섰으나 결국은 나 자신을 돌아보는 반추이고, 호기심과 상상력을 유지해준 힘이었다. 어쩌면 끝없는 자아탐색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성산일출봉이 보이는 유민 미술관
요한 카를손의 흔적이 보이는 유민 미술관 입구
안도 다다오의 유민 미술관 공간  분할

          

휘니스 제주 섭지코지에서 셔틀을 타거나 슬슬 걸어서 바람 부는 언덕에 올라가면 땅 속에 보일 듯 말듯한 미술관이 있다. 섭지코지 들판에 안도 다다오가 건축한 유민 미술관이다. 성산 일출봉과 푸른 바다, 해안절벽과 함께 서귀포 해안 풍경이 아름다운 곳이다.

이 멋진 건축물의 이름이 그동안 세 번 바뀌었다. 처음에는 돌이 많은 제주의 이미지를 담은 게이트 오브 스톤으로 불렸다. 이후 지니어스 로사이(Genius Loci) ‘땅을 지켜주는 혼’이라는 뜻으로 제주를 표현했다가 지금은 유민 미술관이라 부른다. 안도 다다오의 건축에 덴마크 건축가 요한 카를손이 입구의 오색 유리창을 구성하였다. 햇빛에 반사되는 샤이닝 글라스는 시시각각 다양한 색을 내뿜는데, 오전 11시 색이 가장 아름답다고 한다.


유민미술관 바람의 정원
유민 미술관 돌담 창에 보이는 성산일출봉


미술관 입구에  백록담, 돌·바람·여자를 상징하는 정원을 구성했는데 원은 하늘, 사각형은 대지, 삼각형은 이 둘을 잇는 인간을 상징한다고 했다. 건물 외벽 노출 콘크리트와 빛의 각도, 섭지코지의 풍경을 담을 수 있는 창, 프레임으로 보이는 성산 일출봉의 풍광을 갖춘 미술관 외벽은 당연히 핫스폿이다. 자연의 액자 속에 담긴 바다와 성산일출봉 풍경은 자연중심 건축의 진수였다. 자연과 하나 되는 미술관은 제주에서 느낄 수 있는 품격이었다.


아르누보 공예의 전성기 작품 중


미술관 안으로 들어가면 에밀 갈레, 돔 형제, 외젠 미셀, 가브리엘 아르지 루소 등 다양한 아르누보 작가들의 작품과 유민 홍진기 선생이 오랜 시간 수집한 낭시파 유리공예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화려하게 표현된 색채와 다양한 디자인 작품을 감상할 수 있고, 또한 독특한 내부 공간을 둘러보는 재미도 있다. 여러 칼라의 다양한 제품을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쉽게 보기 어려운 작품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유민 미술관 옆 글라스하우스
일출 때 글라스하우스의 장면


유민 미술관 옆, 바다를 향해 손을 뻗듯 펼쳐져 있는 기하학적 모습의 건축물이 있다. 안도 다다오가 제주 풍광에 어울리는 자연주의 건축으로 지은 글라스하우스는 서로 마주 보고 설계되어 있다. 이름 그대로 대부분 통유리로 되어 있어 서귀포 해안 풍경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2층 레스토랑에서는 제주 바다를 품고 있는 성산 일출봉을 바라보는 모습이 멋지다. 제주의 햇살과 바람을 시각화하고 미각화 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이른 새벽 동이 틀 때와 저녁 석양 노을이 유리에 반사되는 모습이 정말 아름답다. 유리 건물에 비치는 아침 햇살은 그라디에이션으로 점점 젖어들게 한다. 섭지코지의 햇빛을 건축의 한 부분으로 표현한 건축가의 의도가 보였다.


글라스하우스의 지그재그 산책길
글라스하우스 정원입구
성산일출봉이 보이는 정원

 

정원의 지그재그 산책길이나 돌담 사이로 보이는 바다의 광경이 빼어나다. 글라스하우스의 레스토랑으로 들어가는 입구 벽면 공간에 그림처럼 들어온 성산일출봉. 자연을 건축의 한 부분으로 활용한 건축가의 철학이 여기서도 돋보였다. 둥근 정원의 긴 의자에 앉아 성산 일출봉을 한참 바라보는데 무상무념이다.

제주에는 다양하고 멋진 건축물들이 참 많지만 일부만 살펴보았다. 제주의 문화탐방 부분에서 조금 더 정리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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