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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하늘 Aug 06. 2024

너무 짠 프레첼 같은 우리 여행

 



 새벽 3시 35분, 오빠가 날 흔들어 깨웠다. 현실을 자각하면서 멀어지는 부질없는 꿈나부랭이래도 나는 분명 달달한 꿈을 꾸고 있었으리라. 일어나는 게 이토록 싫을 정도라면 적어도 그래야 수지가 맞지. 까딱하면 바람에 힘없이 나부끼는 가을 나뭇잎처럼 쉽게 아득해질 정신을 겨우 부여잡고 몸을 일으켰을 땐 5분이 더 흘러 있었다. 문 틈새로 퍼런 불빛이 흐릿하게 새어들고 있었고, 출처를 알 수 없는 웅얼거리는 소리가 방안을 계속하여 머무른 채로. 그러니 더 이상 침대가 날 껴안게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문을 열고 나가니 아빠와 오빠가 소파에 몸을 기댄 채 티비를 보고 있었다. 방안을 가득 채웠던 소음은 티비에서 흘러나오던 거였다. 우리는 너무나도 평범한 축구 가족이었기에 새벽 3시에 알람을 맞추고 일어나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었다. 킥오프를 알리는 휘슬이 아직 몽롱한 내 귀를 때렸고 우리는 늘 이런 식으로 소란한 새벽을 함께 이보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2440p의 화질로도 온전히 담아낼 수 없는 푸른 색깔의 잔디와 하늘이 쏟아져도 담아낼 수 있을 것만 같은 큰 크기의 경기장, 해설위원 목소리에 배경음처럼 깔렸던 군중들의 함성과 응원가, 그 모든 게 어떤 것도 거치지 않고 현시에 놓여 있다.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1차 매체를 믿으면서도 끊임없이 의심하며 감탄했다. 직접 오지 않았다면 이렇게 그때의 수많은 새벽을 추억하고 있지도 않았을 테지. 언젠가부터 좋아하고 보길 기다리는 게 숨 쉬는 것처럼 당연했으니까, 그걸 되뇌거나 곱씹어 볼 필요성조차 인지를 못했을 테니까.




 나는 좋아하기만 했을 뿐인데 20년 동안 사용한 언어로도 표현하지 못하는 더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마음을 풀 길을 알지 못해 눈물이 턱을 경유해 무릎 위로 떨어지도록 내버려 뒀다.





 

 스타디움 천장만이 시야에 걸릴 때부터 애진작에 직감했다. 아, 나는 오늘을 잊지 못하겠구나. 앞으로 우리가 함께 놓일 수천 번의 새벽에도 이날을 회상하며 입안 가득 즐거움을 물고 있겠구나. 그러고는 맨체스터도 가보자며 캄프 누를 가보자며, 하는 기약 없는 약속을 할 테고 그 기약 없음을 애써 모른 척하느라 헛헛해질 마음으로 매일의 아침을 맞이하겠구나.







 내 옆엔 짐꾼이라 자처하며 나와 같은 얼굴을 한 오빠가 있었다. 그는 빡빡한 일정 가운데 일주일을 시간 내 나를 보러 왔다. 여기까지는 그의 그럴싸한 연유였으며, 결국엔 자기만족으로 비행기를 타고 유럽 여행을 온 것이 분명했다. 오빠가 프랑스 땅을 밟기 나흘 전 나는 주변인에게 오빠가 곧 프랑스에 온다는 것을 알렸고 오빠와 친하냐는 질문에 막역하지만 친하지는 않다는 다소 아이러니한 답변을 달았다.


 웃는 날보다 서로의 얼굴을 보며 찡그렸던 날카로운 날이 더 많았지만 피를 나눈 사이인 것을 마치 모든 것의 방패라 여기며 서로를 무신경하게 대하고 헐뜯기 바빴던 것 같지만 내 사람이라는 사실은 불변했다. 그와 나는 같은 일을 하며 원하든 원치 않든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주로 나는 그를 한심해하는 포지션이었고 그는 나를 너무 까탈스럽고 예민하다고 생각하는 포지션이었다. 내가 그에게 쓴소리를 하면 그는 자기가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두라고 말하는, 한국의 지극히 평범한 남매상에 적절히 들어맞는 우리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얼굴을 붉혔던 우리지만 그는 늘 나에게 하나라도 더 해 주고 싶어 했다. 일이 힘들 때는 음료수를 남몰래 놓고 가고 식탐 많지만 내 몫은 꼭 남겨 뒀던 그런 쓸데 많은 다정함이 있는 사람이었다. 밉지만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이 바로 우리 오빠였다. 잘난 체하며 재수 없는 나를 포용해 줄 줄 아는 면이 있기까지 했다. 나는 그가 이런 사람이란 걸 함께 일주일을 보내고 그가 혼자서 인천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짐 검사를 하러 들어갈 때 알게 됐다.




 늘 이런 방식으로 사랑을 깨닫고 너무 늦은 나를 탓하며 후회한다.





 

 우리는 프랑스 동쪽에 위치한 산타마을, 스트라스부르에서 이틀을 묵었다. 그다음엔 런던으로 향했다. 사실 런던 개트윅행 비행기를 타고 영국에 들어선 순간부터 모든 일이 꼬였다. 스트라스부르 공항 가는 길에 까마귀가 그렇게 울어댔는데 오늘 하루가 내 맘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을 거라며 알려주던 것이었으려나.




 

 우리의 계획은 이러했다. 개트윅 공항에 내리면 런던 시내로 직행하는 템즈링크를 타고 숙소에 체크인해 짐을 두고 토트넘 스타디움으로 가는 것. 그런데 우리가 타야 하는 기차가 취소됐단다. 그다음 차는 1시간 30분 뒤에 오는 것이었고 안 그래도 촉박한 일정에 큰 차질이 생긴 나는 뇌가 정지되어 단전 깊이서부터 올라오는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일단은 런던 시내로 들어가는 것이 우선이었기에 런던 브리지를 거치는 아무 기차에나 올라탔다. 브리지에서 내려 오버그라운드를 타고 리버풀 스트리트로 향하는 된다는 판단하였던 것이다. 거기서 화이트 하트 레인까지 가면 적시에 도착할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탄 기차는 아주 오랜 시간 느리게 서행하는 기차였고, 30분이면 돌파할 거리를 1시간 동안 갔다.


 이미 모든 계획이 기차 안에서 종말을 맞이했음이 분명했다.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나의 얼굴은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됐다. 연약하고 초라하게 떨리는 어깨를 잡아준 것 역시 우리 오빠였다. 그는 걱정할 것 하나 없다는 얼굴로-걱정되지만 티를 내지 않은 것인지 정말로 걱정이 안 된 것인지는 여전히 모르겠다-괜찮다고 내내 말해 줬다. 극효율을 따지는 내게 그의 태평한 얼굴과 행동은 이해와 존중의 범주를 벗어나는 어떤 것으로 여겨지곤 했다. 그런데 이건 틀림없이 사랑이었다.

 사랑한다 말하지 않아도 사랑이 느껴지는 순간이 이런 거구나 알게 됐다.


 비록 기차가 취소됐고 최종 목적지에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했대도 둘이어서 괜찮았다.





 

 


 다시 스트라스부르 때의 이야기를 해 볼까. 우린 계획 없이 스트라스부르 시가지를 온종일 걸었다. 노트르담 대성당 부근에 이르자 나름대로 아기자기하게 꾸며둔 기념품샵이 일렬로 죽 늘어서 있었다. 그 옆에 프레첼을 파는 작은 노상이 있었는데 우린 그곳에서 평범한 관광객처럼 2유로를 주고 하나를 받아냈다. 초코잼과 곁들여 먹거나 위에 캐러멜 소스를 올려 먹을 수도 있었음에도 굵은 소금이 알알이 올려져 있던 기본 맛을 선택했다. 크게 한 입 깨물고 우걱거리니 프레첼의 짠기가 잇새 꼼꼼히 파고들었다. 너무 짜서 입안이 바짝 마르는 느낌이었다. 오빠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면서도 꾸역꾸역 다 해치워 먹었다. 프레첼은 원래 이런 맛이야, 라는 말 때문이었을까. 어쨌든 마지막 한 입은 또 나의 몫이었다.


 다음날 그는 어제 먹은 프레첼이 너무 짰다며 사실은 정말 맛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초코잼이나 캐러멜 소스를 곁들여 먹었다면 프레첼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으려나.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맛이었을 테고 그래서 안도하며 아무 설렘 없이 맛있게 먹었겠지. 하지만 그게 기억에 오래 남진 않았을 것이다. 그건 아닌 것 같아. 너무 짰기에 내가 여태 맛보지 못한 정도로 짰기에 기대한 것을 넘어섰기에 더욱 기억에 남았던 것이다.



 

 오빠, 한국에 돌아가 이날을 떠올리면 프레첼이 생각날 거야. 스트라스부르 거리를 거닐며, 노엘을 맞이해 예쁘장하게 꾸며져 있던 기념품샵을 구경하며, 노트르담 대성당 앞에서 인간의 무궁무진한 기술력에 감탄하며 계속 깨물어 먹었던, 그 너무 짠 프레첼 말이야.





 



 우리 여행은 너무 짠 프레첼이었다. 마음대로 되는 것 없이 변수의 연속이었던 여행, 여행에서 여행자가 겪을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모조리 겪었던 여행, 자꾸만 마음이 쪼그라들었던, 많이 걸어서 다음날이면 무릎 관절과 허리가 꾹꾹 쑤셔왔던 고통의 여행. 그러나 이따금씩 날아들었던 작은 행복들 힘들게 겨우겨우 찾아간 토트넘 스타디움에서 우리의 국적을 물으며 영국에 온 것을 환영해 주던 사람들, 손흥민의 새해 첫 골에 우릴 쳐다봤던 주변 모든 영국인들, 너희 덕분에 골 넣은 것이라며 볼에 가벼운 키스를 해주던 그 순간 또 웃으며 인사해 주고 우리의 어눌한 언어를 차분히 기다려 줬던 사람들, 해피아워만 보고 들어간 펍에서 저렴하게 너무 맛있게 먹었던 폭립과 타르트플럼베 그리고 생맥주 두 잔, 잔을 부딪히며 털어놓았던 속얘기들, 내가 무엇이 되든 무엇을 좋아하든 나를 언제나 응원한다는 사려 깊은 그의 말까지.


 익숙한 대로, 편한 대로, 어떤 변수도 장애물이 되지 않도록 계획을 철저하게 짰다면 우리 여행은 그저 그런 여행으로 남았을 것이다. 기억에 오래 남지 않을 평범한 여행 나중에 사진으로만 추억할 수 있는 그런 여행.




 우리의 여행이 너무 짠 프레첼 같아 다행이야.







 파리행 기차에서 나는 그에게 편지를 썼다. 여행 내내 고생시킨 것 같아 미안하다고 다음에 또 와줄 수 있냐고 그땐 정말 잘해 보겠다고 연필을 꾹꾹 눌러썼다. 그때 내가 꾹꾹 누른 게 활자인지 울컥하는 마음인지는 알 수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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