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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블린 연구소 Oct 18. 2023

속죄에도 공소시효가 있을까?

히가시노 게이고 '백조와 박쥐'를 읽고.

 히가시노 게이고 만큼 다양한 품질의 작품을 써내는 작가가 있을까 싶다. 읽다가 책을 놓칠 정도로 놀랄만한 전개의 소설도 쓰지만, 때로는 도입 부분에서 책을 덮어버리게도 만든다. 용의자X의 헌신, 나미아 잡화점의 기적, 옛날에 내가 죽은 집 등은 주기적으로 다시 읽게 되는 명작이었지만, 그 밖에 제목도 잘 떠오르지 않는 범작 및 망작도 다수 있다.


 ‘백조와 박쥐’는 오랜만에 만난 그의 탁월한 작품이었다. 묵직한 소재를 지루하지 않게 잘 다루었다. 흔한 표현으로 평단과 관객 모두에게 박수받을 만한 소설이었다. 살인에 대한 법적 공소시효는 존재하지만, 마음의 속죄기간은 무한하다는 주제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젊은 시절 저질렀던 잘못을 가슴속에 묻고 살다가, 노인이 되어서 자신만의 방법으로 유족에게 사죄한다.


 이야기도 흡입력 있었다. 여러 가지 사연이 얽혀서 진행되는데, 2018년도에 발생한 살인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1984년 있었던 일이 떠오른다. 공간적으로도 도쿄, 나고야, 아이치현 시골까지 등장해서 입체적인 느낌을 준다. 복합적인 구성이 결국에는 아귀가 딱 들어맞는 것이 작가가 품을 많이 들인 흔적을 엿볼 수 있었다.


 책에서 손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또 다른 포인트는 연애이다. 살인, 속죄, 반성이라는 무거운 이야기가 흐르고 있지만, 그 와중에도 젊은 남녀의 사랑이 싹튼다. 피해자 딸과 가해자의 아들은 사건의 진상에 의문을 품는다. 진실을 탐문해가는 과정에서 서로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끼고, 우연히 마주친 손끝을 서로 피하지 않는다. 참혹한 살인사건 한가운데서 피어나는 뜻밖의 로맨스가 매력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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