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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목 Feb 28. 2018

주관

읽기와 쓰기

안 그래도 괜찮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서로 위로하고 위로하듯 얘기를 하지만 정작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현실은 우리에게 돈을 주지 않는다. 부모든 좋은 직장이든 어디에라도 비빌 곳이 있으니 우는 소리도 통하는 것이고 가만히 있어도 괜찮을 수 있는 것이다. 


잠시 주저 앉았다 하더라도 기운을 차릴 수 있는 정도로 쉬고 새힘을 얻었을 때 다시 일어서서 내 갈길을 가는 것은 사회적 제도가 뒷받침 되어 있어야 하는것일까, 아니면 내 스스로 존립 가능한 환경을 만들어 나가야 하는 것일까. 마땅히 이런 당위성은 사회에 책임이 있지만 개인이 모든 것을 헤쳐나가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나마 제일 발전한 현대에 사는 우리인데, 과거의 불합리와 불평등과 온갖 말도 안 되는 폭력들 사이에서 그나마 가장 최신의 안정적인 국가를 가지고 있는 것인데, 더 선진적이고 우월해 보이는 곳에서 태어나지 못한 것이 현실을 비관할 만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저 외부의 탓으로만 돌리기에는 삶은 너무 럭비공 같다. 


인생은 원래부터가 불합리하고 불건전하며 비이성적인 것들의 총체적 집합이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공평이랑 상상속에서만 존재한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 아랑곳하지 않고 공평하다면 그건 사회주의다. 공평을 미덕으로 볼 수도 있지만 환경과 능력이 다르므로 사람은 제각각이며 출발선도 모두 다르다. 세상은 그렇구나를 일단 인정하고 볼 일이다. 단념이나 체념이 아니다.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시각을 기르는 것이다. 그랬을때 좀 더 나 자신에 대해서 객관화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가늠할 수 있는 안목이 생긴다. 


이런 자립의 시대에 서 있는 우리는 더 많은 교육이 필요한걸까 생각의 독립이 필요한걸까. 당연히 생각이다. 복잡한 일을 결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서 굉장히 머리 아파하며 중요한 결정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경우가 있다. 우리는 결정을 남에게 너무 쉽게 맡긴다. 다른 사람의 의사에 내가 좌지우지 되는 것은 줏대가 없어서라고도 볼 수 있지만, 그것보다는 입장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주제에 대해서 평소에 생각을 해 두지 않으면 누군가가 그 주제에 대해 물었을 때 우리는 평소에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표면적인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 페미니즘에 대하여, 윤리적 문제에 대하여 복잡하고 결정이 어려운 일들에 대해 계속 생각하고 결론을 내리려고 할 때 우리의 생각은 점점 발전한다. 내 몸을 주체적인 생각으로 움직일 수 있어야 하며 그럴 상황이 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과의 적절한 타협을 통해 몸을 움직이는 것이 좋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생각은 주관이 없기 때문에 이리저리 결정을 내리기 힘든 주변의 설득에 넘어질 수밖에 없다. 이리저리 휘둘리는 사람들이 여기에 속한다. 


어려운 결정을 내리려면 숙고하는 능력이 필요한데 그것은 어디에서부터 올까. 바로 독서다. 독서는 읽는 내내 생각하는 것이다. 글에 적힌 상황에 대하여, 글이 진행하는 맥락에 대하여, 등장 인물의 감정에 대하여 끊임없이 사고하며 이미지화 하는 작업이다. 이 이미지화 작업이 내부에서의 확장이 아니라 독서를 통해 사고가 확장되고 인식이 넓어지면서 기존에 굳건했던 나의 인식의 틀을 서서히 깨뜨리게 된다. 그런 과정을 오랫동안 많이 취할수록 입장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므로 주관이 뚜렷해지고 사고가 건강해 진다. 


쓰는 것은 독서로 확장된 인식의 틀의 경계를 그려내는 일이다. 쓰는 것이 훈련인 이유는 문장으로 내 생각의 경계를 끊임없이 그려서 넓혀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쓰기는 문장력이 아니라 사고의 과정을 남겨둔 것이다. 남기지 않으면 몽상이 될 뿐 사라져 의미가 없게 된다. 사람의 생각은 글 속에 담겨있고 생각의 과정을 우리는 읽어내려가면서 또 다시 인식의 틀을 깨부수고 확장시킨다. 읽기와 쓰기는 주관의 훈련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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