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목 Oct 19. 2018

스펙트럼 분광기

우리가 어떤 요소로 이루어져 있는지 살피기 위해서는

글을 써봄으로써 내가 내 스스로 어떤 빛을 내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살아온 과정이 지금의 나이며

과거는 나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입니다.

글을 써서 남기는 것으로 어떤 요소를 가졌는지

알아보고는 싶지만,

쓰기 전에는 모를 일입니다.

내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연필이 지나간 자리에서 어떤 빛이 나는지 확인하지 않고는

나도 나를 제대로 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화가 날 때는,

웃을 때는, 싫은 사람을 볼 때는, 상념에 빠져있을 때는,

깊이 잠을 자고 있을 때는, 입 안이 헐었을 때는,

마음에 드는 옷이 없을 때는, 치킨 뚜껑을 열었을 때는,

내가 무슨 빛깔을 내는지 상상할 겨를도 없습니다.

감정의 폭풍 속에서 과연 내가 나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한 것은

매번 다른 장면이었습니다.

다시는 감정적이 되지 않기로 다짐을 해 본들 헛수고였고

이전과는 다른 상황에서 목석이었어야 했을 내 감정은 요동쳤습니다.

흔들린다는 것은 글을 적어보고야 알게 되었고

그 후로는 글을 적으며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작은 보석의 빛이라도 날까 싶어

내면을 유심히 바라보며 탐구하던 시절에 조차

나는 빛 비슷한 것도 찾아낼 수 없었습니다.

무덤덤한 회색.

가꾸지 않았던 내면은 황무지나 다름이 없어서

척박하고 먼지가 풀풀 날리는 그런 사막처럼

메마르기만 했습니다.

세련되고 맑고 건강하고 싶었던 내면은

사실 무디고, 견디는 것에만 익숙하고,

버티느라 거죽밖에 남지 않은 메마른 사람 이었습니다.

글을 멈출수는 없었습니다.

새벽 두 세시까지 의미 없는 글을 쓰는 것이

내 삶의 가장 중요한 낙이 될 줄은 몰랐지만

글이 써진 자리에는 풀이 돋아나고 식물이 뿌리를 내려

다시금 단단해지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많이도 아니고 딱 내 주변만큼, 한 걸음 정도뿐이지만

글쓰기로 나를 경작하고 경작된 자리만큼 누워볼 수 있는 것 만으로도

나는 회복됩니다.

작가의 이전글 빠름보의 세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