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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목 Sep 19. 2015

근면과 근성

되지도 않는 장인정신 흉내내기. 

  오랫동안 한 가지를 만든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진빠지고 힘겨운 일이다. 지금은 칼국수 한 가지만을 끈덕지게 30년간 만들어오시는 분의 가게에 앉아있는데, 나라면 못 할 것 같다. 적어도 나는. 이러한 근면이 나에게는 '근성'이라는 이름으로 새겨져 있다. 어려서부터 근면과는 담을 쌓았던지라 우직하지 못하였고 근성이나 노력의 끈기가 절정으로 생겨나지 않으면 일을 제대로 끝마치는 경우가 별로 없었다. 그러니 근성을 가지고 움직여야지만 허접하게나마 뭔가 하나를 완성할 수 있었다. 남들은 코웃음 치며 해냈을 일들에 난 온 힘을 기울여야 했던 것이다.


  대학 때는 홈페이지 제작하는 알바를 했다. 2000년 초반에는 나 같은 사람에게도 홈페이지를 맡길 정도로 홈페이지 제작 수요가 많았다. 나는 주로 대학 내에 있는 연구소에서 일감을 받아서 했고 일을 하면 건당 50-70만 원을 받았다. 예산으로 처리되다 보니 밀리는 일 없이 제작비는  차곡차곡 받았다. 문제는 마감이었다. 페이지 기획이나 디자인까지는 즐겁고 신나게 50% 정도 마무리하면, 어느 순간 다 했다 라는 느낌이 들기 시작하면서 급 하기 싫어지면 차일 피일 미루다가 마감 때가 되어 물불 가리지 않고 완성해 내는 것이다. 마감이라 해도 딱히 일정을 정해두지는 않기 때문에 적당한 선을  마무리해서 일을 끝낸다. 이렇게 일을 끝내는 것이 참 고된 일이다. 근면하게 꾸준히 제작하여 완료할 수 있는 것들을 일의 중간 즈음이 되면 언제나 그렇듯 죽도록 하기가 싫어진다. 그러니 일의 완성에 마침표를 찍는 것은 오죽하겠나. 


  처음 책이라는 것을 읽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읽다 보면 늘 초반까지는 열심이었지만 중반이 채 가기도 전에 시들해지면서 책을 읽지 않게 되었다. 절반도 읽지 않은 책을 가지고 다니긴 하지만 읽으려고 들었다가도 내키지가 않아 다시 집어넣는다. 이런 일들이 많았었다. 시간과 여건이 되지만 내키지가 않는 것. 이것 때문에 그만 둔 경우들이 많았다. 심적으로 무엇인가에 대한 회피가 작용하여 눈 앞의 것을 완성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내 마음이지만 나도 잘 몰랐다.


  몸에 밴 근면이란 게 없다 보니 억지 근성으로 메꾸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줄곧 근성으로만 메꿀 수는 없는 법이다. 분명히 한계가 존재한다. 내가 매주 진행하는 기타 레슨도 어느 날은 아 진짜 하기 싫다고 장탄식이 나오는 경우가 있는데 한 달에 네 번만 하면 되는 그것을 하기가 싫다. 억지로라도 자리에 앉아 즐거운 마음을 가진 후 한 시간 레슨을 잘  마무리하면 오히려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그 전까지는 매번 동일한 시간 고정적인 무엇인가가 돌아오는 것을 나는 잘 참지 못했다. 그래서 이런 부분은 근성으로 해내는 것이다. 


  십 수년이 지난 나는 여전히 용두사미다. 사업을 함에 있어서도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시작해 놓고 마무리 못하는 것에 언제곤 후회하지만 이러한 성향을 몸부림 치며 바꾸고 싶다한들 잘 바뀌지는 않는다. 그나마 요즘은 하다마는 것들은 예전에 비해 많이 줄었고 (안 될 일은 이제는 시작도 안 한다.) 흥미가 잦아들었던 일들도 중간 정도부터 다시 열을 내면서 완성도를 높일 수는 있게 되어 느리긴 느리지만 결과물이 이제는 그럭저럭 나오는 편이다. 이 사소한 변화도 내 삶의 절반을 들여서야 아주 조금 바꿀 수 있었다. 그나마도 바뀔 수 있다는 여지가 다행인 건가. 


  칼국수 한 그릇이 맛있다. 근면이 빚은 면발은 통통하고 살이 올랐으며 국물은 깊고 진하다. 따뜻함이 뱃속에서 맴돈다. 할아버지가 요리하고 할머니가 서빙을 하시는데 매장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예사롭지 않다. 사위가 음악을 가져다 준다고 하였는데 선곡이 들을 때마다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작년 크리스마스 즈음에는 칼국수를 먹으러 왔다가 한동안 음악을 감상했다. 칼국수를 다 먹었는데 자리를 뜨지 않았다. 통유리 밖으로 눈발이 흩날리고 분위기 짙은 재지한 크리스마스 캐럴들이 나오는데 주인 할아버지 내외는 손님이 없는 느지막한 오후라 부엌일을  마무리하시고는 가장 자리 테이블에 앉아 조용히 나와 함께 밖을 바라보았다. 잠시나마 그 분위기 속에서 느껴졌던 이 공간의 완성도는 나 같은 조급자는 절대로 만들어낼 수 없는 그러한 경지였다. 억지로 한다기 보다 내 몸에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자연스럽고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세월을 새긴 할아버지의 주름진 손이 만들어낸 맛이었다. 근면함이 빚은 공간은 더없이 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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