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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ti Jan 28. 2024

역사를 배우고 그림을 본다는 것

이바노프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를 보며

 대학원마다의 특징이 있겠는데, 내가 다니는 대학원 미술사학과는 학부 시절 미술사학 전공이 아닌 학생들이 좀 있다. 미술 전공자, 영화 전공자, 사학 전공자 등이 있다. 우리는 늘 서로가 서로를 부러워한다. 미대 출신들은 내게 대학 때 역사를 배웠으니, 그림이 제작된 시대상을 잘 파악하고 있어 좋겠다고 한다. 반면 나는 미대 출신들은 직접 그림을 그려봤으니, 붓의 터치나 색조, 구도 등을 잘 해석해 낼 수 있어서 부럽다고 말한다. 기껏해야 4년밖에 안 되는 기간인데, 대학 시절에 익히는 감각은 평생을 간다. 뭐가 뭔지도 모르고 4년 학부 시절을 냈지만 분명 개인의 사고방식과 틀에 영향을 주는 건 분명해 보인다.


그동안 내가 공부해 왔던 역사교육은 과거의 사건을 어떤 관점으로 접근할 것인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어떻게 재구성하여 학습자에게 참여하게 할 것인가를 고민해 왔던 학문이었다. 하나의 역사 사건이 있을 경우, 사실을 기본 전제로 하면서, 해석이라는 측면이 강조되는 장르이다. 한편, 미술사 또한 해석을 중시하는 학문이다. 그러나 역사와는 조금 다른 측면이 있다. 역사에서는 과거의 장면이 담긴 이미지나 관련 기록을 대상으로 삼고 분석하고 추론한다. 과거의 사건이 시간이 흘러 내 눈앞에 다시 펼쳐지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미술사는 그 시대에 그려진 실재하는 작품이 존재한다. 이를 해석하다 보니, 보다 직관적이다.


미술 작품을 해석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먼저 작가에게 주목하여 그가 살아온 시대적 배경과 당시의 미술 사조를 알고 작품 해석에 투영하는 방식이 있다. 다음으로는 작품 자체의 구도, 도상의 배치, 색감, 붓의 쓰임 등을 기술적으로 읽어내는 방식이 있다. 전자의 방식은 사학 전공자들에게, 후자의 방식은  미술전공자들에게 보다 익숙하다 여전히 내게 작품 자체를 뜯어서 분석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다만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한 역사화의 경우는 익숙하고 보다 흥미로웠다.


오늘은 러시아 이동파 미술을 배웠다. 이바노프가 그린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를 봤다. 이 작품은 1825년 데카브리스트의 난 이후에 그려진 것이라 했다. 아, 반가운 단어, 데카브리스트의 난이라면 내가 중2학년 세계사 수업 시간에 가르친 내용이 아닌가. 서유럽 국가가 근대화를 시작하고 있을 때 당시 러시아는 여전히 차르를 중심으로 한 봉건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때 러시아 장교들이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며 황제를 향해 일으킨, 러시아 최초의 혁명 운동이 데카브리스트의 난이다.




내가 이 사건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딱 여기까지였다. 그러다 오늘 수업 시간에 그 사건을 목도했던 한 화가의 이야기들을 알게 되었다. 이바노프가 그린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라는 그림은 꽤나 소란스러워 보였다. 웅성거리는 인파 속에 세례 요한이 손을 들어 저 멀리 언덕을 가리킨다. 홀로 걸어오는 이는 예수이다. 그림 전면에 많은 사람들이 배치되어 있고 정작 주인공인 예수는 원근법을 감안한다 치더라도 지나치게 작게 표현되어 있었다. 작품의 제목은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지만, 정작 이 작품의 주인공은 '예수'가 아니라 '그를 기다리는 민중'으로 보인다. 실제로 많은 미술사가들은 이 작품에 대해 메시아 등장의 필요성뿐 아니라 그를 맞이하는 다양한 사람들의 양상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해석한다.



이 소란스러운 작품은 실제로 화가 이바노프의 삶도 소란스럽게 만든다. 우리 한국 현대사에서도 살펴볼 수 있는 사례이지만, 정당성이 없거나 지지율이 낮은 정권은 사회 문화의 다양한 양상에도 촉을 세우고 과잉 반응을 한다. 메시아를 고대하는 이야기는 러시아 정권에게 불온한 대상으로 규정되었다. 새로운 정권에 대한 갈망이라는 해석을 하며 러시아 정부는 당시 아카데미 교수였던 이바노프 아버지의 교수직을 박탈하기에 이른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듣자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었다. 언젠가 광해군을 소재로 한 영화가 개봉된 적이 있었다. 정부의 대신들이 자신의 기득권 지키기에 혈안 되어 있을 때, 궁궐 너머 백성들의 민생을 살폈던 가짜 광해 캐릭터를 보며 당시 관객들은 한 명의 전직 대통령을 떠올렸다. 이러한 사회 현상이 불편했던 당시 정권이 영화 제작사에 보이지 않는 압박을 했다라는 소문이 돌았다. 이바노프의 그림에 당시 차르 체제 하의 러시아 사람들이 조응했던 현상, 그리고 영화 <광해>에서 한 정치인들 떠올렸던 것은 모두 당시 시대 분위기 속에 나타난 결과였을 것이다. 각자의 울분이나 분노의 근원을 그림이나 영화를 통해 투영하고 찾고자 하는 움직임.



한편, 이바노프의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에는 다양한 이들의 면면이 형상화되어 있다. 메시아의 등장을 의심하는 인물, 한 발 떨어져 관망하는 인물, 새로운 희망을 기대하는 인물 등이 그려져 있다. 사극 속 대본에서는 '행인 1'로 명명될 인물, 역사의 흐름 속에 이름조차 호명되지 못할 인물들이 화폭 속 주인공으로 담겨 있었다. 성경의 일화를 소재로 한 종교화, 황제나 귀족의 얼굴을 그린 초상화의 시대가 지나고 노동자와 농민이 그림 소재의 대상이 되는 시대가 펼쳐질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전조 현상 같기도 하다.


얼핏 실패로 끝난 것으로 보이는 사건들은 어떠한 방식이든 그 시대를 관통하며 살아가던 이들에게 영향을 주고 그것은 또 다른 현상을 낳는다. 이바노프의 <민중 앞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가 그려진 이후 수리코프나  같은 화가들은 전제 황권에 저항하는 이들을 계속 그려나간다. 다시 학교로 돌아가서 세계사 수업을 하게 될 때, 데카브리스트의 난에 대해 다른 이야기들을 해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서유럽의 근대화를 보고 온 젊은 장교들이 체제를 개혁하고자 했다가 좌절된 사건을 지켜봤던 나머지 사람들은 어떠한 절망을 했는지, 하지만 그 안에서 어떠한 희망을 보고자 했는지를 이야기해 봐야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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