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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ti Jan 28. 2024

회화사, 조각사, 도자사를 습득하기를 맹세하되 3년으로

애매한 시간을 도서관에서 때우고 나오다가 안나 선생님과 마주쳤다. 나와 같은 학기에 입학한 대학원 동기인데,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많이 나눌 기회는 없었다. 도서관 문 앞에 서서 과제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길어지면서 야외 테이블에 앉게 되었다.


안나 선생님에게 대학에서 미술사학을 전공했었는지를 물었다. 뜻밖에 그녀는 신학을 공부했다고 했다. 나와 같은 비전공자이구나 싶어 내심 반가웠지만, 이야기를 이어가다 보니 나와는 출발이 달랐다. 반년 정도 혼자 미술사 공부를 하고 준학예사 자격증을 최근에 땄다고 했다.


신학을 공부하다가 미술사 공부를 하게 되고 대학원까지 오게 된 계기가 궁금했다. 출발은 댄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코드>이었다고 한다. 이 책은 예수가 결혼했다는 이야기를 비롯하여 기독교계에서 불편할 이야기가 담겨 있다. 소설이 영화화되어 우리나라에서 개봉될 당시에도 신성모독을 이유로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 소송이 진행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논란과는 별개로 신학을 공부하던 안나 선생님은 책 속에 언급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을 비롯하여 서양미술에 대해 흥미를 느꼈다고 했다. 현재는 한국 회화사에 더 큰 흥미를 느끼는 중이라고 했다. '신학, 소설 <다빈치코드>, 미술사', 조합이 참 묘했다.


안나 선생님의 또다른 반전은 그녀의 직업이었다. 포클레인 기사를 하고 있다고 했다. 여러 자격증을 공부하면서 포클레인 자격증 공부도 했고, 대학원 수업이 없는 날에는 현장에서 아르바이트로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공사 현장에서 포클레인 아저씨들과 나누는 대화들을 들려주는 그녀의 표정에는 전문직의 자부심이 엿보였다. 궁금한 것은 직접 몸으로 부딪쳐서 경험하기를 주저하지 않아 보였는데, 그것이 그녀의 세계를 확장해 주는 원동력인 것 같았다.


눈빛이 반짝거리는 남다른 학생들을 교무실에서 교사들이 칭찬할 때 쓰는 몇 가지 상투적인 표현들이 있다. "서울대가 저런 학생을 학종(학생부 종합전형)으로 뽑아가야 하는데.", "저런 학생, 우리 반 반장 되면, 나는 올해 그냥 거저 담임하겠다.". 안나 선생님이 딱 그런 사람이었다. 모두에게 지지와 응원을 받게 될 사람.

언제고 중3 학생들의 진로 특강에 안나 선생님을 초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세계를 확장해 가고 도전을 즐기는 자의 눈빛은 그 자체로 학생들에게 좋은 영감을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 이야기를 꺼냈을 때, 그녀는 "선생님, 제가 나중에 유명한 사람이 되어서 학교에 가서 무료로 강연해 드릴게요!"라고 씩씩하게 답했다. "와, 좋아요!", 이런 대화를 나눴다.


3월의 봄날, 이제 막 대학원에 입학한 우리 둘이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으려니, 그 옛날 신라시대 이름 모를 화랑 청년 두 명이 이런 대화를 나누고 비석을 새겼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임신년 6월 16일에 두 사람이 나란히 맹세하였기에 기록한다. 하늘 앞에 맹세한다. 지금부터 3년 이후에는 충의 도를 잡아 지속하여 잘못과 실수가 없기를 맹세한다. 만약, 이 일이 실패하면 하늘의 큰 화를 받으리라 맹세한다. 만약, (그 안에) 나라가 불안해지고 크게 어지러운 세상이 오면 (나라를 위해 중단도) 받아들일 수 있는 행위로 맹세한 것이다. 또한, 따로 앞서 신미년 7월 22일에 크게 맹세하였다. 즉, 시·상서·예기·전을 차례로 습득하기를 맹세하되 3년으로써 하였다."


신라의 청년 둘이 학문을 닦고 힘써 실천할 것을 함께 맹세하며 바위에 글자를 새긴 것처럼, 나도 화장실 벽에다가 이런 낙서라도 해 두고 싶은 날이었다. "2018년 무술년 3월 두 사람은 나란히 맹세하였기에 기록한다. 한국 회화사, 한국 조각사, 한국도 자사를 차례로 습득하기를 맹세하되 3년으로써 하였다.", 휴직 마치고 돌아갈 때까지 마침 내게 주어진 시간도 딱 3년이다. 성실하게 익히고 배워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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