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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ti Jan 31. 2024

연구 목적으로 '그들'의 기록을 보다.

  안내 데스크에 신분증과 추천서를 내밀고 초조하게 기다렸다. 서류를 챙기고 내 인적 사항을 타이핑하던 분은 몇 가지 주의 사항을 알려주었다. 이곳의 자료는 복사할 수 있지만, 대여나 사진 촬영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복사한 자료를 인터넷에 올리는 것 또한 금지되어 있다고 했다. 이제부터 자료 사용이 가능하다는 말을 듣고 서가를 뒤돌아보니 예술/언어/문학/역사가 붙어 있을 도서 분류 기준 자리에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이라는 단어가 붙어 있었다.


  북한 미술 관련 자료를 찾기 위해 통일부 북한 자료센터에 오게 되었다. 국립중앙도서관 5층에 자리 잡은 이곳에서는 소위 '특수 자료'가 소장되어 있었다. 대학원 2학기에 북한 미술 수업을 듣게 되었다. 북한 미술은 미술사학계에서 상대적으로 연구가 많이 되어 있는 장르는 아니었다. 북한을 직접 방문할 수 없으니 자료 수집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부터가 난감한 분야였다. 통일부 북한 자료센터나 국사편찬위원회에 북한 미술 관련한 기록물들이 소장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대학원 사람들과 함께 방문을 했다. 이 자료는 연구 목적을 증명하는 추천서가 있어야 열람이 가능했다. 대학원에서 발행해 준 서류 한 장을 내밀고, 자료를 열람해도 된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까지 괜스레 조마조마했다.


  나는 '국민학교' 시절에 반공 포스터 그리기, 반공 글짓기 대회에 참여하고, 똘이장군 만화를 보며 반공 교육을 받았던 세대이다. 대학에 입학해서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형을 살게 된 선배의 변호사 비용 마련을 위한 일일 호프에 참석했던 세대이다. 당시 검찰이 압수수색 한 선배의 집에서 나온 <전태일 평전>과 <노동의 새벽> 같은 책이 문제가 되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학교 앞 인문 사회서점에서 흔하게 살 수 있는 책들이었고 우리 집에도 있던 책이었다. 내가 읽고 있는 책이 '불온한 책'일 수도 있다는 자기 검열을 했던 시대를 보냈다. 그런데 '김일성', '김정일' 같은 이름이 도서 분류 섹션으로 구획되어 있는 공간에서 '저쪽 나라'에서 발행된 책을 본다는 건 떨리는 일이었다. 대학에서 발행해 준 '연구 목적'을 증명하는 서류 한 장을 받아 들고 그 '불온한' 자료를 보게 될 때는 마음이 불안하기도 하면서 약간의 해방감도 들었다.


  서가를 훑어보다가 북한의 역사 교과서를 보게 되었다. 분단 이전까지 우리는 같은 역사가 있었음에도 교과서 목차 구성 자체가 달랐다. '천문령 전투', '이준 열사의 순국', '오페르트 도굴사건' 등이 삽화와 함께 하나의 독립단원으로 서술되어 있었다. 발해의 대조영이 당을 물리친 승리의 전투, 이준 열사가 을사늑약의 무효를 외쳤던 사건,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흥선대원군 아버지의 무덤을 도굴하려다가 실패한 사건 등이 하나의 단원으로 제시되어 있었다. 앞선 사건들을 관통하는 '외세와의 항쟁'이라는 공통된 주제는 북한 역사교육의 방향을 보여주는 듯했다. 같은 부모에게 태어난 쌍둥이가 함께 유년 시절을 보내다가 입양이 된 이후, 세월이 한참 흘러 다시 만났을 때, 함께 경험한 유년기를 전혀 다르게 기억하는 듯했다. 이 기억의 간극은 어떻게 좁혀질 수 있을까.


  과제 조사에 필요한 자료를 더 찾기 위해 과천에 있는 국사편찬위원회 사료관도 방문했다. 역사 교사 대상 직무 연수를 받기 위해 들렀던 적이 있던 기관인데, 이곳에 북한 자료가 있다는 건 전혀 몰랐었다. 이곳은 북한 자료센터와 달리 별도의 추천서가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료가 개가식으로 진열되어 있지 않아 필요한 자료를 검색하고 청구기호를 적어 제출해야 받아볼 수 있었다. 직원분이 카트에 실어 온 자료를 건네받게 되면 자료를 타이핑하거나 핸드폰 촬영을 했다. (최근 재방문했을 때 이곳의 북한 자료는 열람하기 앞서 서약서를 작성한 후, 지정된 좌석에 앉아 옮겨 적는 것으로 방식이 변경되었다) 자료를 열람하기 전에는 검정 철끈으로 묶인 서류철에 자신의 소속과 이름을 자필로 기재해야 했다. 내 앞선 칸에는 익숙한 이름들이 다양한 필체로 적혀 있었다. 논문에서나 봤던 이 분야 관련 연구자들의 이름이었다. 그 매끈하고 완성도 높은 논문들의 시작점도 이곳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자료를 받아 들면 점심도 거르고 하루 종일 사료관에서 자료를 정리했다. 대개 1950년대 북한 기록물을 분석 조사했는데, 그 당시 그들의 인식을 그들 자신이 남긴 기록을 통해 살펴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었다. 텍스트를 읽으며 하루 꼬박 타임머신을 탄 것처럼 그 시절과 그 공간으로 빠져 있다가, 아이를 픽업하기 위해 다시 1시간여를 차 타고 다시 집으로 돌아올 때는 시공간을 넘나드는 여행을 하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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