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주제를 정하다
대학원 2학기, 지도 교수를 정해야 한다고 했다. 지난 학기 동안, 도자사와 회화사를 두고 저울질했었다. 결국 회화사로 결정했고 그중에서도 북한 미술로 논문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교사들의 경우, 대개 교육대학원에 진학해서 낮에는 직장, 밤에는 대학원을 병행하는 경우가 많다. 나와 같이 연수 휴직을 내고 주간의 일반대학원을 다니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더구나 역사 교사가 역사교육이 아닌, 미술사 대학원을 가는 사례는 드물었다. 그러다 보니 왜 휴직을 하고 미술사 대학원을 간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자주 듣곤 했다. 더구나 북한 미술을 공부하고 있다고 하면 으레 이어지는 질문들이 있었다. 남북 관계가 좋아지니 향후 전망 있는 분야라고 생각해서 선택한 것이냐는 이야기였다. 2018년 당시만 해도, 남과 북의 통치자가 판문점에서 만나 두 손 꼭 잡고, 남과 북의 경계를 가르는 그 선을 서로 넘어갔다 왔다 하는 시절이었다. 또 드물게는 혹시 대학생 때 학생운동을 한 것인지, 그중에서도 NL계열이었던 거냐고 물어오는 경우도 있었다.
"왜 그걸 공부하려고 해요?"라는 질문을 자주 듣다 보니, 나 자신도 선택의 이유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곤 했다. 만약 내가 도자사를 선택했고, "저는 조선시대 백자를 공부하고 있어요"라고 답했을 때, 상대가 왜 그걸 공부하고 있냐고 물으면, "예전부터 박물관에서 백자 보는 게 좋았어요"라고 답할 일이었다. 또는 불교 미술사를 선택했고, "저는 고려시대 불상을 공부하고 있어요"라고 답했을 때, 왜 하필 그것이냐고 물으면, "예전부터 사찰로 답사 다니는 걸 좋아했어요"라고 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북한 미술을 공부하고 있어요."라고 답하고 나면, 그다음에 "그냥 그게 좋아서요"라고 답할 수가 없었다. 다른 미술사 분야는 우리가 그래도 미술관이나 박물관, 사찰 등지에서 한 번쯤은 접하는 분야이니, 경험에 따라 흥미가 생긴 것이라 이야기할 수 있다. 하지만, 북한 미술은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다. 우선, 자연스럽게 접하면서 흥미가 생길 수 있는 장르가 아니다. 검색 한 번으로 모든 것을 찾아볼 수 있는 인터넷 세계에서 우리는 북한 그림을 접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또한 분단국가인 우리 사회에서 "북한 미술이 좋아서요"라고 간단하게 이야기할 경우 오해를 부를 수 있으니 자기 검열을 피할 수 없다. 어떻게 답을 해야 하는가, 왜 나는 이 주제에 마음이 끌렸을까, 이러한 질문을 나 역시도 스스로에게 많이 던져보곤 했다.
1945년 해방 이후 38선 이남과 이북 지역은 각각 미국과 소련이라는 동맹국을 따라 각자 다른 궤도로 나아간다. 남북의 미술계 역시 각각 이러한 양상이 나타난다. 남한 미술은 미국과 유럽의 영향을, 북한 미술은 소련과 중국의 영향을 받아 각기 다른 모습으로 발전해 간다. 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음과 같다.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많은 화가들은 대부분 일본의 동경미술대학 유학생 출신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한국 유화의 뿌리는 일본 유화에서 시작한다. 일본 화가들은 유럽에서 유화를 배워왔으니, 한국 미술계의 계보는 유럽-일본-한국으로 이어지는 셈이다. 반면, 북한은 해방 이후 미술 분야에서 일제 식민지의 잔재를 청산하겠다며 중국과 소련의 화가를 초청하고 자신들만의 미술 체계를 세우기 위해 노력한다. 특히나 당시 북한 정권 하의 미술은 선전 도구로서의 기능을 했기 때문에 북한은 이 분야에 많은 공을 들인다. 그러면서 북한 미술계는 소련-중국-북한의 계보가 이어진다.
그간 내가 알지 못했던, 우리 역사의 나머지 반쪽 이야기였다. 해방 이후 북한 미술을 공부하다 보면, 같은 부모에게 태어난 쌍둥이가 다른 곳으로 입양을 가서, 각각 다른 양부모 아래서 자라가는 과정을 들여다보는 것과 비슷한 감정이 들었다. 북한 미술의 뿌리는 그간 알지 못했던, 혹은 알 수 없었던 우리 역사의 나머지 반쪽 이야기기도 했다.
한편, '북한 미술'을 '저쪽 화가들의 이야기'라고만 규정짓기 애매한 사정도 있다. 특히나, 1950년대의 북한 미술의 경우에 한정해서 말이다. 분단과 한국전쟁 이전까지 우리나라에서 활동했던 많은 화가가 어느 시점에 북으로 올라가 버렸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초기, 북한은 스탈린과 김일성 초상을 서울 곳곳에 걸었다. 이 작업에는 서울에 거주하던 화가들이 동원된다. 그리고 3개월이 지난 1950년 9월, 다시 서울을 수복했을 때, 북한에 '부역'하여 '빨갱이'가 되어 버린 이들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잠시 몸을 피한다고 북으로 올라갔고, 그들은 '월북미술가'가 되었다. 한국 근현대 시기의 다수 미술가의 생애사와 활동 연구는 여기서 멈춰 버린다. 이들에 대한 연구를 무엇이라 부를 것인가. '북한 미술'이라고 부르면 우리와 아무런 접점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월북 이후 행적 연구는 '한국 근현대 미술사'의 연장선으로 확장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1950년대 북한 미술은 '북한 미술사'와 '한국 근현대미술사'의 경계에 걸쳐 있다.
언젠가 북한 미술가들이 좌담회를 열어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란 무엇인가를 논의했던 기록물을 봤다. 고분벽화에 그려진 사신도 가운데 하나인 현무에 대한 토론이 이어지고 있었다. 누군가는 현무는 상상 속의 동물이니 이것을 그린 그림은 추상화로 봐야 한다고 했다. 그러자 또 다른 누군가는 현무는 뱀의 모습을 변형하여 그린 것이고, 화가는 실제 존재하는 뱀에서 이미지를 떠올린 것이니 이는 사실에 기반한 그림으로 봐야 한다고 받아쳤다. 흑백 사진 속에는 스무 명가량의 화가들이 빙 둘러앉아 있었다. 그 안에는 남한에서 그림 그리다가 북으로 올라갔다던 화가 김용준, 이석호, 정현웅 등이 있었다. 아, 북으로 올라간 저들은 저쪽에서 저렇게 또 살고 있었구나 싶었다.
해방 이후 북한 미술가들이 어떠한 미술 체계를 만들 것인가를 논의하는 기록을 들여다보다 보면, 이제는 만날 수 없는 사이가 되어버린 상대와 우리가 어떻게 달라지기 시작했는지의 기원을 찾는 작업 같았다. 왜 이렇게 틀어져 버렸는지, 과거의 흔적들을 되짚어가며 원인을 찾고 싶었다. 무엇보다 해방 공간 시기의 남한과 북한 미술가들의 인간사를 들여다보는 것이 제일 흥미로웠다. 나의 마음을 끄는 것은 결국 사람 이야기였다.
직장을 잠시 멈추고 마흔이 넘어 북한 미술이라는 분야를 공부하는 것은 내 인생 계획에는 전혀 없던 이야기였다. 하지만 중국 만주 답사 때 단둥에 들러 압록강 맞은편의 신의주 땅을 바라봤던 기억, 금강산 관광을 가서 버스로 휴전선을 넘어갈 때의 기억, 그때 들었던 복잡한 감정들이 내 안의 어딘가에 남아 있어 내게 질문을 던져왔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교수님과 상담 후에 논문 주제를 정했다. 1950년대 북한 미술의 시작점을 들여다보기로 했다. 당시 북한 미술계가 소련 미술에 어떠한 영향을 받았는지를, 실제 그림 도판 비교를 통해 실증적으로 밝혀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