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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ti Jan 31. 2024

화가와 소설가의 마음에 남아 그림과 문장으로 되살아나다

  국사편찬위원회 사료관은 창문 밖 풍경이 보이지 않아 들어가서 앉아 있다 보면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에 대한 감각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현실 세계와 단절된 채, 자료 속의 이야기로 몰입하기가 좋았다.

  1956년 북한 잡지 <조선 미술>에 실려 있는 글 하나를 읽다가, 이야기 속의 인물들에 빠져들고 말았다. 당시 북한은 체제 선전을 위한 도구로 미술을 중시하였고,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표현하기 위해 소련 미술을 지향점으로 삼았다. 그러다 보니 그들이 발행한 잡지와 책에는 소련 번역본 글이 많았다. 소련 화가 레세트니코프(Reshetnikov)가 자신의 작품을 제작하게 된 배경을 서술한 글이 번역본으로 실려 있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나는 일찍이 장르화로써 학교 시험을 그려볼 생각이 있었다. 그런 목적으로 나는 자주 학교에 드나들게 되었는데 학과 시간을 참관하면서, 점수에 대한 그들의 기쁨과 괴로움을 관찰하여 보았다. 한 번은 산수 과목 수업 중인 한 학급을 참관하게 되었다. 나의 의도를 알고서 되도록 나를 방조해 주려고 하였던 선생님은 그때 오직 우수한 학생들만 흑판 앞에 불러낼 작정이었다."


  현장을 직접 관찰하고 대상을 그리는 것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에서 중시하는 요소 중 하나였다. 레세트니코프는 학교에 방문하여 묘사 대상과 상황을 탐색했던 모양이다. 이때 당연히도 교사는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만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화가는 그 상황을 잘 읽어내고 있었다. 그는 잘하는 아이들의 모습만 화폭에 담고 싶지는 않았던 듯하다. 이어지는 이야기를 계속 살펴보자.


"첫 번째로 세료자라는 금발 머리 꼬맹이를 불러냈다. 그는 문제를 흑판에다가 적고 나더니 한참 동안 숫자만 바라보고 꾸물대고 있었다."


  수학 문제를 풀지 못하는 아이의 난처함이 표현되어 있었다. 처음 보는 화가 아저씨까지 와 있는 자리에서 이 창피한 마음을 어찌할 것인가. 이 광경을 바라보던 반 친구들의 마음 역시 애가 탔던 모양이다.


"아이들은 세료자를 보고 안타까워했다. 어떤 아이들은 마음을 졸이면서 한편 그 아이를 보고 한편 나를 쳐다보는 것이었다. 이 딱한 친구는 어쩔 줄을 모르고 말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묵묵히 계면쩍게 고개를 아래로 푹 숙이고 백묵 쪼가리를 자그마한 손으로 만지작거리면서 처량하게 마룻바닥만 내려다보는 것이었다."


  레세트니코프는 담당 교사가 앞으로 불러내서 칠판에 문제를 척척 풀어내는 학생들보다 문제를 풀지 못해 풀이 죽어 버린 이 꼬마한테 마음이 갔던 모양이다. 그는 다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힘을 들이지 않고 문제를 풀었지만, 나는 이미 우등생에 대해서는 마음이 끌리지 않았다. 나는 풀이 죽어서 걸상에 앉아 있는 세료자를 가끔 보고서는 새로운 테마를 생각하여 보는 것이었다."




  이후 레세트니코프는 1952년에 <Another F>라는 작품을 완성한다. 화가가 들려주는 이 이야기를 듣고 나니 그의 작품의 제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짐작이 갔다. 대략 '성적표 나온 날'이라고 이해하면 되겠다. 낙제 점수가 적힌 성적표를 들고 들어간 아이는 면목 없어 풀이 잔뜩 죽어 있다. 엄마와 누나는 '너를 어찌하면 좋니'하는 난감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고, 남동생은 형 놀릴 재미에 신이 나 낄낄거리고 있다. 낙제점 받은 소년을 반기는 것은 그 집의 강아지뿐이다. 형 놀리기에 재미들인 동생의 모습은 현실 형제의 모습 그대로이다. 이 표정을 화폭에 담기 위해 레세트니코프는 실제 형제를 데려다 놓고 둘 사이의 싸움을 부추겨 놓고, 그 표정 그대로 그렸다고 한다. 극사실주의 작품인 셈이다.




  레세트니코프의 글을 읽고 나니, 소설가 김연수의 <청춘의 문장들>에 등장하는 한 장면이 떠올랐다. 김연수는 <윤치호 일기> 속 문장을 가져다 놓았다.


"(1919년 9월 12일) 오후에는 집에 있었다. 3시 20분쯤 예쁘장하게 생긴 여학생이 찾아왔다. 그녀는 조선인민협회 명의의 서한을 내밀며 조선 독립을 위해 자금을 대 달라고 요구했다. 난 나 자신과 내 가족이 위협에 처할 수 있는 만큼 돈을 줄 수가 없다고 말했다. 아울러 독립운동가들이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조선에 잠입하지 못하면서. 내게는 생명을 담보로 해서 자기들에게 돈을 대라고 요구하는 게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녀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서한을 챙겨서 가 버렸다."


  윤치호는 자신의 집에 찾아와 독립자금을 요구한 한 여학생과의 일화를 기록해 두었다. 이를 읽은 김연수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덧붙였다.


"일기(윤치호의 일기)는 여기서 끝나지만, 내 마음은 다시 그 예쁘장하게 생긴 여학생을 따라 윤치호의 집을 나선다. 사라진 나라 대한제국에서 태어났을 그 여학생은 얼마나 실망했을까? 윤치호의 집 앞에다가 침이라도 뱉었을까? 아니면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 앞에서 절망했을까? 윤치호의 변명을 듣는 순간, 그 여학생의 가슴속에서 꺼져 버렸을 불빛. 나는 그 불빛을 상상하고 그 불빛에 매료되고 그 불빛에 빠져든다."

 

  모두가 지켜보는 교실 칠판 앞에 서서 수학 문제를 풀어내지 못해 백묵만 만지작거리면서 마룻바닥만 쳐다보던 세료자, 그리고 독립자금은 줄 수 없으며 희한한 일을 요구하고 있다는 답변을 듣고 돌아선 이름 모를 여학생. 이 둘의 마음은 어땠을까. 이들의 모습은 각각 화가와 소설가 각각의 마음에 남아 그림과 문장으로 되살아났다. 가슴속의 불빛이 사그라든 누군가의 마음을 읽어내고 헤아리는 사람만이 화가나 소설가와 같은 작가가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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