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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ti Feb 10. 2024

소련 잡지에서 찾은 1950년대 북한 그림 한편

  나는 공립학교 교사이다 보니, 5년에 한 번씩 주기적으로 학교를 이동한다. 그러다 보니 지역 환경과 거주 조건이 다른 학생들을 5년 주기로 만나게 된다. 자연스럽게 거주 지역 환경에 따른 학생들의 미묘한 차이를 경험해 보게 된다. 그러다가는 결국 '계급'이라는 문제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예전에 교육사회학 강의 때, '중간층 교사의 계급 언어'라는 개념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교사와 학생은 다른 세대의 만남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다른 계급의 만남이기도 한데, 이 과정에서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문화 충돌이 발생한다는 이야기였다. 어떤 지역이나 어떤 학교급 학생들의 경우, 교무실에서 교사들에게 더 혼나는 상황이 빈번하게 발생하곤 하는데, 그 이유는 자기 생각과 입장을 논리 정연하게 표명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억울한 상황에 대해 상대에게 또박또박 전달하기 전에 비속어가 먼저 튀어 나가 버리면, 이야기는 다르게 전개될 수밖에 없다. 자기 생각을 입말로 풀어내는 것은 중요한 무기인데, 그 무기를 장착하지 못해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가 있다.


 언젠가 페이스북 친구인 박산호 선생님이 쓰신 글을 읽다가 무척 공감했던 적이 있었다.

"그래도 가난한 가정의 아이들이 계급의 사다리를 걷어차는 이들에 맞서 싸울 수 있는 도구는 그나마 책일 것이다... (중략)... 그렇게 다듬고 벼린 생각을 분명하고 또박또박하고 선명한 음성으로 말할 수 있다면, 더불어 읽기 쉽고 메시지가 분명하며 논리적으로 쓸 수 있다면 세상 어느 곳에나 쓰임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다듬과 벼린 생각을 분명하고 또박또박하게 말하는 것'. 누구든 자신의 입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경험은 중요하다. 

  100여 년 전에도 그런 이들이 있었다. 1901년생 소설가 최서해는 집안이 가난하여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대신 잡지를 읽으며 자기 생각을 벼렸다. 나무 장사, 두부 장사, 부두 노동자로 살아온 그는 스물다섯 나이에 소설을 써낸다. 소설 <탈출기>가 바로 그렇게 쓰여진다. 소설 속 주인공은 자신의 삶이 팍팍한 이유가 사회 구조의 모순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것을 바꾸기 위해 노력할 것을 다짐한다. 100년 전의 최서해는 니가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즉 '네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구조의 문제'라고 이야기한다. 최서해 본인의 삶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고민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다.


  화가 중에서도 최서해와 같은 이가 있다. 1913년생 오택경은 일본으로 건너가 새벽에는 신문 배달, 낮에는 부두 노동, 밤에는 야간 학교에 다니며 그림을 배운다. 그런데 배에서 짐을 나르다가 떨어져서 심한 부상을 입고 고향을 돌아오게 된다. 고향에서 병 치료를 하면서 미술 교사로 생활을 유지하다가 노동자 파업에 참여했다가 결국 학교에서 쫓겨나게 된다. 그리고 해방 이후 <원산 부두 노동자 파업>이라는 그림을 그려낸다. 흔히 원산총파업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1929년 원산 문평제유공장 일본인 감독의 조선인 노동자 구타 사건으로 촉발되어 일제강점기 최대 규모의 계급투쟁 파업으로 확대된 사건을 가리킨다. 오택경은 이 사건을 1950년에 시작하여 십 년 동안 여러 차례 다양한 버전으로 화폭에 담아내고자 했다.


  1960년 <조선 미술> 잡지에는 오택경 본인이 이 작품을 어떤 과정을 통해 제작했는지를 회고한 기록이 실려 있다.


"나는 우선 이 쩨마 작품에서 조직되고 각성된 로동자들이 20년대 말 일제의 비인간적인 착취와 예속 자본가들을 반대하여 완강하고도 줄기차게 싸워 온 력사적인 진실을 날카로운 갈등 속에서 보여 주면서 그러면서도 또한 민족적인 특성을 두드러지게 표현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화면 구성에서는 로동 군중과 독점 자본의 앞잡이들을 전면적으로 대치시키기 위하여 고용주를 부두에 내놓았으며 군경들은 한쪽으로 몰아 놓았다. 파업의 경유를 암시하기 위하여 "스탄달" 석유 상자도 배치하였고 일제가 원산항을 통하여 조선의 쌀을 자기 본국으로 약탈하여 가던 사실을 표시하기 위하여 쌀가마니 위에 로동자들을 배치하기도 하였다. 파업의 장기성과 로동자들의 락천성을 표현하기 위하여서는 될수록 유유한 자세와 묵직하고 날카로운 표정을 부여하였다."




  이 설명과 관련해서 화질이 낮은 흑백 도판이 하나 실려 있다. 노동자들이 깔고 앉아 있는 쌀가마니와 전면에 배치된 석유 상자가 어떠한 의도로 그려졌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은 북한에서 작품 전시를 한 이후, 내부 비판이 등장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작가는 작품을 다시 그리기에 이른다.


"전체 화면에서 구도를 안착시키며 민족적 특성을 더욱 선명하게 표현하기 위하여 주력했으며 내용 전개에 있어서 복선을 정리함으로서 내용을 집중화하여 긴박감을 증대시키는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 화면에서는 전면 경계선상에 놓여 있던 석유 상자들과 반제 삐라를 보고 있는 인물들을 없애고 로동 군중들을 한보 접근시키면서 부차적 인물들의 위치와 자세를 변화있게 재배치하여 로동자들의 개성을 보다 더 다양하게 추구하기 위하여 전체 화면의 색채와 마티에르(질감)에 이르기까지 표현기법에서도 세심한 고려를 돌렸다."



  재제작된 그림 역시 흑백 도판으로 실려 있다. 파업의 발단을 암시하기 위해 배치했던 석유 상자들은 산만한 느낌을 줄 수 있어 제거하는 대신, 노동자들이 그 위에 앉아 있는 것으로 바뀌게 되었다.


  오택경의 이 그림은 <원산 스트라이크>라 이름 붙여져서, 1950년대 후반, 폴란드, 헝가리, 루마니아 등지의 동유럽뿐 아니라 소련과 중국에서도 전시가 된다. 기록을 통해 전시되었다는 사실만 확인할 수 있을 뿐, 정작 이 작품의 컬러판을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1958년 판 소련 잡지 <오고뇨크 Огонёк> 속에서 컬러 도판을 찾아낼 수 있었다. 북한 그림이 왜 소련 잡지에 실리게 되었을까. 1957년 소련 모스크바에서 <조선미술전람회>라 하여 북한 미술 작품들이 전시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전시된 이 작품이 대표작으로 선정되어 그다음 해에 소련 잡지에 실리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컬러 도판에서는 계절적 배경도 확인해 볼 수 있다. 인물들이 딛고 서 있는 바닥에는 눈이 수북이 쌓여 있다. 실제 원산 부두 노동자 총파업은 1929년 1월에 시작되어 4월까지 이어진다. 한겨울에 시작된 쟁의였다는 것을 바닥의 눈 묘사를 통해 표현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컬러 도판 속에서는 인물들의 표정을 보다 명확히 확인할 수 있었다. 주춤하며 당황하는 일본인 감독과 경찰, 그리고 의연하고 결연한 자세로 상대를 응시하는 조선인 노동자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오택경 그 자신이 실제 파업에 참여했던 자신의 삶을 그림이라는 형식으로 담아낸 것이다. 글이든, 그림이든, 자신이 경험하고 살아온 삶을 직접 표현하는 일은 중요하다.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무기를 갖고 있어야, '보이지 않던 이들'이 세상에 보이게 되는 마법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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