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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ti Feb 01. 2024

'OOO 학생에게'라는 제목의 답장을 받았다.

북한 미술이라고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이발소에 빛바랜 색감으로 걸려 있을 것 같은 촌스러운 그림, 혹은 그들의 통치자를 찬양하는 소재의 그림 등이 연상된다. 그러나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그들의 그림이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1950년대 북한 미술계는 원래 북한에 거주하던 화가들뿐 아니라, 남한에서 올라온 화가, 소련에서 파견된 고려인 화가, 일본에서 건너온 재일조선인 화가 등이 새롭게 결합하면서 다양한 양상을 보인다. 하지만 이 시기에 대한 현재 북한의 평가는 박하다. 북한 입장에서는 그들의 표방하는 소위 '조선 미술'이 안착하기 이전의 과도기적 시기일 뿐이다. 하지만 남한미술과 북한 미술이 어떻게 달라지기 시작했는가를 살펴볼 수 있는 시기이며, 다양성의 관점에서는 북한 미술계가 가장 반짝거리던 시절이었다. 반짝거리다가 사그라져 버린 시기이다.


우리가 이 시기를 살펴보는 것은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일제강점기 활발한 활동을 하던 미술가들은 한국전쟁 시기 다수가 북으로 올라가 버렸다. 그러다 보니 김용준, 이쾌대, 배운성, 임군홍, 정현웅, 정종여, 이여성, 이석호와 같은 쟁쟁한 화가들의 연구는 1950년을 기점으로 멈춰 버렸었다. 이들의 흔적을 찾아서 생애사를 연결하는 작업은 '북한 미술 연구'이기도 하면서 '한국 근현대 미술 연구'이기도 했다. 문제는 1950년대 북한 화가들의 작품이 국내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대신 당시 발행된 미술 잡지 기록물의 복사본이 국내에 소장되어 있었다.


국사편찬위원회와 북한 자료센터에는 1950년대 발행된 <조선 미술>이라는 잡지의 복사본이 있었다. 책자의 앞표지에는 러시아 도장이 찍혀 있었는데, 기관에서 연구 차원에서 러시아 소장자료를 복사해 온 것으로 보였다. 조선 미술가동맹의 기관지였던 <조선 미술>을 보면 당시 이들의 관심사는 무엇이었으며, 어떠한 지향점을 갖고 있었으며, 무엇을 통해 학습했는지 등을 살펴볼 수 있었다.


당시 북한 화가들은 소련 잡지에 실린 유화 도판을 참고해서 그림 연습을 했다고 기술했다. 나의 지도 교수님은 이 점을 놓치지 않고 주목하셨다. 논문 주제를 상의하는 중에, 교수님은 모스크바에 가서 북한 화가들이 참고했다던 그 잡지들을 찾아보라고 제안하셨다. 잡지 이름도 입에 붙지 않은 데다가, 종이와 펜을 들고 있지도 않아서, 내 머릿속에는 온통 교수님이 언급한 잡지 이름을 까먹지 않기 위해서 반복해서 외우고 있었다. <이스크스트보>와 <오고뇨크>, <이스크스트보>와 <오고뇨크>, <이스크스트보>와 <오고뇨크>.


그런데 중국이나 일본, 이런 곳이면 어떻게 해 보겠는데, 나에게 모스크바는 달나라 별나라처럼 느껴지는 곳이었다. 더구나 교수님은 내게 러시아가 소련이던 시절의 스탈린 관련 논문도 찾아보라고 하셨다. 모스크바에 가는 것도 문제이고, 러시아어를 하나도 하지 못하는 것도 문제였다. 머쓱한 마음으로 "제가 언어가 좀 안 되어서요."라고 답했다. 교수님은 러시아어는 남들도 다 못하니 괜찮다고 하셨다. 영어로 된 자료나 논문도 있으니 충분히 참고할 자료는 뒷받침이 될 거라고 하셨다. "영어로 쓰인 것이 많으니 걱정하지 말고"라는 격려에서, '제게 영어는 러시아어와 다를 바 없는 그림인데요."라는 고백은 차마 꺼내지도 못했다.


교수님과 상담을 마치고 나와, 그 제안이 반갑고 고맙기도 하면서, 한편 엄두가 나지 않아 어찌하나 싶기도 했다. 우선 1950년대 발행된 <오고뇨크>와 <이스크스트보>가 러시아 모스크바의 어느 기관에 있는지를 파악해야 했다. 막연하게 국립도서관이나 아카이브 센터 같은 곳에 있겠지 싶었지만 사전 정보가 필요했다.

그러다가 소련 잡지 <오고뇨크> 속 이미지를 분석한 논문 하나를 보게 되었다. 국내에서 <오고뇨크> 잡지를 대상으로 분석한 논문은 딱 하나였다. 논문 말미에 마침 실려 있던 이메일 주소로 메일을 띄웠다. 내 소개를 앞에 쓰고, 논문 조사를 위해 1950년대 발행된 <오고뇨크>를 직접 보고 싶은데, 모스크바의 어느 기관을 가야 하는지 알고 싶다고 썼다.


그리고 얼마 후, 'OOO 학생에게'라는 제목의 답장을 받았다. 그 논문의 저자는 외대 러시아과 교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분은 교수님은 미국 유학 시절에 대학 도서관에서 실물을 봤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이게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며 링크를 하나 첨부해 주셨다.


그 링크를 클릭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아' 하는 탄식이 나왔다. 1899년에 첫 발행된 <오고뇨크>가 연도별/달별로 100년 치 분량이 스캔작업이 되어 PDF파일로 탑재되어 있었다. <오고뇨크>뿐만이 아니었다. 100여 년 전에 발행된 잡지 수십 종이 아카이빙 되어 있었다.


외대 러시아과 교수님께 답장을 드렸다. 감사한 마음을 어떻게 다 전하나 싶었다. 1950년대 소련미술과 북한 미술의 상관관계를 이러한 잡지들을 분석해서 비교하는 논문을 쓰려고 하며, 교수님이 알려주신 사이트가 큰 도움이 될 것 같다고 적었다. 교수님은 흥미로운 연구라는 답장을 다시 또 보내주셨다.


연구 역량은 글을 잘 쓰는 것이 필수이기도 하지만, 자료를 발굴하는 능력 또한 중요하다. 그런데 자료 발굴의 방법은 어떠한 정해진 길이 없다. 남들이 다 지나간 길을 다시 걸을 때 '발굴'이라는 게 가능하겠는가.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하는데, 정답이라는 게 없다. 그렇게 헤매다 자신만의 무기를 아이템으로 갖게 되면 그걸 다른 이와 나누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걸 잘 알기에 당신이 알고 있는 아카이브 사이트를 안면도 없는 타대학 대학원생에게 알려주는 일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잘 안다. 그날부터 나는 <오고뇨크> 잡지를 매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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