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inti Feb 23. 2024

1960년 모스크바 발행 미술전시 도록 구입

  자료를 어떻게 발굴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이들은 없었다. 북한 미술은 이제 본격적으로 신진 연구자들에 의해 연구가 확장되는 시점이었고, 저마다 고군분투하며 자기만의 방식으로 자료를 찾아가고 있었다. 정해진 길이 없으니 서로 알려주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근래 발표되는 북한 미술 논문의 각주나 참고문헌에는 평양에서 발행된 <조선 미술>이 가장 많이 등장했다. <조선 미술>은 1957년에 첫 발간되어 1967년까지, 딱 10년 동안만 발행된 조선미술가동맹 중앙위원회 기관지였다. 조선시대 전공자에게 <조선왕조실록>이 가장 기본이 되는 사료라면, 북한 미술 전공자들에게는 1950년대 평양에서 발행된 이 잡지가 주요한 1차 사료였다. 그런데 북한에서 발행된 잡지를 우리나라 어디에 가서 봐야 하는 건지부터가 난감했다. 언젠가 학술대회가 끝나고 대학원 선배는 이 잡지를 참고문헌으로 사용한 발표자에게 이 자료들을 어디서 보았는지를 물어 우리에게 전달해 주었다. 그때부터 우리는 통일부 북한자료센터와 과천 국사편찬위원회 사료관을 들락거렸다.



  그렇게 몇 달에 걸쳐 출근 도장을 찍으며 <조선미술> 잡지 아카이빙 작업을 마쳤다. 매달 발행된 잡지의 목차를 나열해 놓는 것만으로도 당시 미술계가 연도별로 어떠한 고민을 했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었다. 우리 전통 미술 유산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사회주의 사실주의 기법이란 무엇인가, 인상주의 기법을 수용할 것인가, 유화에서 어떻게 민족적 요소를 살릴 것인가 등은 북한 화가들이 지면상에서 논쟁을 벌였던 주된 주제였다. 하지만 사례로 언급되는 미술 작품이 실려 있는 경우는 적었다. 우리나라 기관에 소장되어 있는 <조선미술>이 러시아에서 연구 차원으로 복사해 온 영인본이라, 간혹 실려 있는 도판의 상태 또한 좋지 않았다. 복사본이다 보니 도판이 흑백이라 미술사 분석에서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색감 분석도 어려웠다.


  미술사에서는 미술 작품이 기본이고, 원본이 없다면 도판이라도 구해야 했다. 우회로를 찾아야 했다. <조선미술>에는 1957년부터 1957년에 걸쳐 폴란드, 체코, 루마니아, 불가리아, 소련, 동독, 중국 등지에서 열린 북한미술전람회가 '형제국 인민들'에게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는 기사 내용이 실려 있었다. 사회주의 국가 간의 대외 문화 교류 계획에 따라 진행된 전시였다. 오늘날 북한은 홀로 고립된 폐쇄적 국가처럼 보이지만, 1950년대 당시만 하더라도 북한은 우리보다 더 활발하게 자신들이 '형제국'이라 칭했던 사회주의 국가들과 교류해 왔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길을 돌아가 보자. 북한이 동유럽 국가, 중국과 소련에서 했다는 미술품 전시가 실려 있을 도록을, 우리가 북한에 가서 볼 수는 없지만, 전시가 개최되었던 국가에서는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만약 당시 각국의 미술관에서 발행한 북한미술 전시 도록을 찾아낼 수만 있다면 작가 이름과 제목만으로 알려져 있는 작품의 도판을 확인할 길이 열리는 셈이었다.


  먼저 러시아 구글 사이트에서 '조선미술'에 해당하는 러시아어 Корейское искусство을 입력하면 러시아 옥션 사이트에서 종종 북한 그림이 나오곤 했다. 대개 엽서가 많았는데 1950년대 후반 모스크바 전시에 소개된 작품을 엽서로 만든 것들이었다. 그림 도판은 화면 캡처를 해서 이미지를 따올 수 있으나, 실물을 러시아 옥션에서 구입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다음으로 중국의 대표적인 헌책방 사이트인 '孔夫子舊書網'에서 한글로 '조선' 또는 '조선미술'이라는 단어를 넣어보곤 했다. 이곳은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실제 화가의 사인본이 담긴 자료들도 구입할 수 있는 곳이었다. 마지막으로 구입과 검색의 진입 장벽이 가장 낮은 곳은 이베이 사이트였다. 검색창에 Korea art와 Joseon art를 검색해 보면 옛 소련 소속 국가의 개인 소장품들이 검색되곤 했다.



  그러다가 검색하게 된 것이 1960년 모스크바에서 발행된 『Живопись корейской народно-демкратической респубдики』이었다. <조선미술>에서 1958년 12월 《사회주의 제국가 조형예술전람회》가 개최되었다고 한 기록과 연결되는 자료였다. 총 10장의 그림이 올려져 있었고, 사진마다 작품명과 작가 이름이 러시아어로 쓰여 있었다. 그중 절반은 흑백 도판으로 봤던 그림이었고 절반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한 달 후에 이 실물본을 받아들 수 있었다. B4 크기의 코팅지에 컬러 인쇄된 그림들이 들어 있었다. 비교적 고화질의 도판이라 스캔을 한 후, 뜯어보기 시작했다.



  열 개의 작품 가운데, 김장한의 1958년 작 <이른봄>이 눈에 들어왔다. 협동조합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는 물조리개를 들고 모판에 물을 뿌리고 있다. 하얀 머릿수건을 쓰고 화사한 노란 저고리를 입은 여성의 동세가 발랄하게 표현된 작품이다. 북측 기록에 따르면 이 작품은 분실되었다고 했다. 1958년 12월 모스크바 전시 이후, 이듬해 5월에서 12월까지 독일, 헝가리, 중국을 거치면서 순회 전시를 하였고, 마지막 전시를 마친 후 북한으로 돌아가지 않아 현재는 원본이 분실된 상태라고 했다. 대신 북한 조선미술박물관에는 김장한이 다시 제작한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고 했다.



  현재 북한 조선미술박물관에 전시된 작품은 박물관 도록을 통해서 확인해 볼 수 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마치 틀린 그림 찾기처럼 달라진 부분이 있었다. 주인공 인물의 얼굴이 작아지면서 인체 비율이 보다 자연스러워졌고 어색했던 왼손 손가락의 표현도 바로 잡아졌다. 이런 것이야, 작가의 작품 제작 기술력이 나아진 것으로 볼 수 있겠지만, 분명 내용에서 달라진 부분이 있었다. 개작본에서는 여성 노동자가 물을 주고 있는 모판 부분이 초록의 새싹이 가득한 상태로 바뀌어 있었다.


  실제 북한 작품은 개작본이 제작되면서 이전과 다르게 표현되는 경우가 드문 일은 아니다. 가령 방 안에서 대화를 나누는 가족을 묘사하면서, 주변에 과일 바구니를 배치해 두었는데, 원작에는 바구니 안의 과일이 몇 알 없었는데, 개작본에는 과일이 가득 차 있는 형태로 변경되는 경우도 있었다. 다시 김장한이 <이른봄>으로 돌아가면, 작가가 개작본에서 모판의 새싹이 가득하게 바꾼 것은 '풍족함'과 '발전하는 희망'이라는 요소를 풍성한 새싹을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해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 종합해서 생각해 보면, 작품에서 세부 묘사가 달라지는 것은 화가 개인의 의지가 아니라, 미술가 동맹의 지시에 따른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


ALEXANDER LAKTIONOV. LETTER FROM THE FRONT. 1947

Oil on canvas. 225x155 cm. Tretyakov Gallery



  이러한 경향은 북한뿐 아니라 소련의 미술계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사회주의 국가의 미술계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에서 '풍요로운 현실'과 '희망찬 미래'를 주요한 주제로 삼았다. 심지어 현실을 그대로 묘사한 경우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소련 화가 락찌오노프(Alexander Laktionov) 1947년 작 <전선에서의 편지>가 그러한 예였다. 이 작품은 발표 당시에 강한 비난을 받았는데, 작품 속 배경이 된 노동자의 집 내부가 페인트가 떨어진 벽면과 깨지고 내려앉은 바닥으로 묘사되었기 때문이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현실의 삶'을 재현하여 새로운 발전상을 제시하는 본질적인 리얼리즘이 아니라, '발전하는 삶'을 그려내는 것이 공식적인 미학이었다.


  이처럼, 김장한 <이른봄>의 원작 도판은 1957년 12월 모스크바에서 전시되었다가 1960년에 발행된 도록을 구입하여 찾아볼 수 있었다. 또한 작품을 분실한 이후 1961년 조선미술박물관이 세워질 때 다시 그려진 개작본은 박물관 도록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른 봄> 원본과 몇 년 후에 다시 그려진 개작본 속의 미묘한 세부 묘사 차이를 통해, 소련과 북한과 같은 사회주의 국가가 지향하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속성을 유추해 볼 수 있었다. 수집한 자료에서 추론해 낸 이야기들은 논문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전 19화 소련 잡지에서 찾은 1950년대 북한 그림 한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