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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ti Feb 11. 2024

학위도 없는 사람이 무슨 강연을 한다고

  대학원생 시절에 나는 어린이 문화재 책을 쓰기로 계약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대학원은 일주일에 두세 번만 수업 들으러 가면 되니, 직장 다닐 때보다는 시간적 여유가 많을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일주일 단위로 쏟아지는 서평, 번역, 발표 과제에 치여, 계약서를 쓰고 난 지 2년이 지나서도 원고 진척이 없는 상태였다.


  출판사에서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메일을 보내왔다. "원고를 쓰다가 궁금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 연락주세요"라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 문장 안에는 "원고는 쓰고 계신 거죠? 원고 진척이 어느 정도 상태인가요?"라는 질문이 숨겨져 있다는 건, 눈치로 알 수 있었다. 말을 짓고 다듬는 일을 하는 업종의 화법, 그건 다정하고 섬세한 편집자들의 화법이었으니까.


언젠가 출판사 대표님에게는 이런 메일을 받았다.


"만혼에 가까운 남녀에게 결혼 계획을 묻지 아니하고, 수험생과 취준생들도 애정이 듬뿍 담긴 관심보다는 무관심이 더 좋은 것처럼, 대학원생에게는 논문 준비는 잘하고 있는지 묻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매우 궁금하지만 여쭙지 않겠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저는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출판사 대표님은 내 마음을 훔쳐본 양, 대학원생에게 논문은 잘 쓰고 있는지를 묻는 것은 조심스러운 일이라며 운을 떼로 계셨다. 물론 질문의 형식을 취하지 않았으나, 굵직한 한방을 주신 건 별개로 말이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내게 첫 안부 인사로 "논문은 잘 쓰고 있어?"라고 물어왔다. 사실 상대는 큰 의미를 두고 건네는 인사는 아닐 텐데, 자꾸 듣다 보면 민망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다른 교사들은 직장 다니면서 밤에 대학원 다니면서 틈틈이 논문을 써 왔을 텐데, 직장도 안 다니면서 공부만 하고 있는 내가 너무 유난 떨고 다닌 것은 아닌가 싶기도 했다. 마치 다이어트나 금연하겠다고 큰소리쳐 놓은 것처럼 살짝 조바심이 들기도 했다.


  논문 쓰는 일에 슬럼프가 올 때면, 내가 꺼내 보았던 내 인생의 한 페이지가 있었다. 언젠가 나는 '미술사로 보는 한국사' 강연을 하나 계획했었다. 내 개인 페이스북에 공지하고 구글 신청서를 올렸다. 이후 신청서 양식으로 익명의 메시지 하나가 들어왔다. 


  상대는 두 번 연속으로 메시지를 보내왔는데, 주요한 요지는 '학위 없는 상태'로 강의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강연 내용과 관련한 자격 여부를 따지는 것이었는데, "학위도 없는 사람이 무슨 강연을 한다고."라는 마지막 문장을 보는 순간, 얼굴이 화끈거리고 말았다. 내가 강의 공지를 한 곳은 페이스북밖에 없었고, 내가 미술사 석사과정생이라는 걸 알고 있다는 것. 그렇다면 나와 페이스북 친구인 누군가가 보내온 익명의 쪽지였을 테다. 여러 가지 정황상, 나에 대한 정보가 있는 사람이라는 판단이 들자, 그때부터 나는 상대가 누군지에 대해 나의 지인들을 '내 마음속 수사선상'에 올려놓게 되었다.


  만약 누군가를 괴롭히고 싶다면, 익명의 메시지만큼 효과적인 것이 없을 것이다. 내게 격려와 지지를 보내왔던 친구들이 사실은 이런 마음을 품고 있을 수도 있겠다는 의심이 시작되자, 마음에 지옥이 열려버렸다. '학위가 없는 상태에서의 강연'으로 마음이 위축되지는 않았는데, 그 비난의 주체가 내 지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한없이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후, 그 상대가 누군지 알게 되었다. 며칠 전, 페이스북 친구 신청을 해 왔던 이가 있었는데 그의 타임라인에 여러 가지 상황들이 우습다는 글을 올렸던 것이다. 그의 지인들은 이게 무슨 소리인가 했겠지만, 그는 내게 메시지를 보낸 게 자신이라고 공개적으로 힌트를 주고 있었다. 그는 프로필 자기소개란에 미국의 한 대학에서 미술사 석사를 했음을 밝혀두고 있었다. 상대가 나와는 안면도 없는, '미술사 학위를 갖고 있는' 제3의 누군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에는 차라리 마음이 편해졌다. '익명의 공격'이라는 것이 얼마나 상대를 상상의 지옥에 빠트릴 수 있는지를 경험했던 일화였다.


 그가 나에게 나만 알아볼 수 있는 공개 메시지를 띄웠듯이, 나도 그에게 공개 메시지를 남겼다.

"강사의 자격 조건에서 누군가에게는 ‘학위’라는 객관적 자격이 필수요건이 될 수도 있는 거겠구나 하는 걸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책을 고를 때, 날개에 있는 저자의 약력을 유심히 보는데요. 저자가 무엇을 궁금해하며, 어떻게 알아 왔고, 무엇을 지향하는 사람인지에 대해 살펴봅니다. 객관적 한 줄 이상 너머에 있는 그 사람의 깊이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누군가가 어떤 학력과 자격을 가졌는지를 살펴보기보다는, 어떤 생각을 하는 사람인지를 궁금해하는 삶이 더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도 논문을 쓰는 중이고, 옆에서 논문을 마친 이들을 보면서, ‘학위’를 갖는다는 게 결코 만만한 일은 아니구나 생각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그런 객관적 공증을 갖는 것이 결코 손해 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으니, 지금 하고 있는 공부는 더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이번 강연에서는 제가 중국과 러시아 사이트에서 구매한 북한 미술 관련 자료들을 소개해 볼까합니다. 아직 완료되지 않은 이야기들이지만, 조사 과정에서 새롭게 발견하게 된 이야기들을 들려드릴 생각입니다. 내용의 전문성 여부를 떠나, 듣는 분들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영감을 드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이런 일들을 겪으며, 결국 나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사회적으로 공인된 도구가 있으면, 최소한 자격에 대한 평가를 받지는 않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써 보자. 계속 써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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