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inti Feb 11. 2024

<Birds are singing>과 <마상청앵도>

  소련 잡지 <오고뇨크> pdf 본을 뒤적이곤 했다. 그 안에 실려 있는 북한 미술 관련한 자료를 찾기 위함인데, 잡지의 그림이나 사진을 보다 보면 원래의 목적을 잊어버리고 길을 잃어버리곤 했다. 마치 대청소를 하려고 서랍장을 열었다가 우연히 앨범을 보게 되어, 그 자리에 주저앉아 사진 구경에 시간 가는 줄 모르던 그 짝이었다. 

  <오고뇨크>는 1899년에 첫 발행되어 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발행된 러시아의 주간지이다. 러시아가 소련이었던 시절에는 당시 소련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상징적 장면들이 표지에 배치되곤 했다.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한 무렵에는 스탈린을 기리는 그림이 표지를 장식했고, 1956년 흐루쇼프가 스탈린 개인숭배를 비판한 이후에는 스탈린의 흔적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레닌이 등장하고 있었다. 정작 레닌은 자신을 이미지화하거나 개인 숭배하는 것을 금지했지만 그의 사후에 그는 많은 그림과 동상으로 제작되곤 했다. 


  한 인물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 그의 그림자가 왼편으로 드리운 것으로 보아, 태양은 화면 오른쪽에 떠 있다. 햇빛에 눈이 부신 그는 책을 가리개 삼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 그림 오른편에는 눈 쌓인 벤치가 보인다. 벤치의 절반은 눈이 적게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그림 속의 그는 한동안 그곳에 앉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림 속의 그는 바로 레닌이다. 레닌은 무얼 하고 있던 걸까. 레닌이 그려진 그림의 제목은 <Birds are singing>이었다. 아마 레닌은 저 눈 쌓인 벤치에 앉아 책을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길을 가는데, 어디선가 새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소련 화가가 그린 레닌의 모습을 보자, 조선시대 김홍도의 <마상청앵도 馬上聽鶯圖>가 떠올랐다. 한 선비가 시종을 동행하고 말을 타고 가고 길을 가고 있다. 그러다 잠시 멈춰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 작품의 제목은 馬上聽鶯圖, 말 위에서 꾀꼬리 소리를 듣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보니 화면 오른쪽 버드나무 위에 새 한 마리가 보인다. 그림에는 꾀꼬리 소리가 강물에 수를 놓는다는 멋진 제시까지 붙어 있다. 새 울음소리에 가던 발걸음을 멈춘 두 사람. 걷거나, 말을 타거나, 동적이었던 장면이 잠시 정지 화면으로 바뀐다. 

작가의 이전글 휘노게노브를 찾아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