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암호자산의 법적 본질
사회현상으로서 암호자산이 등장함에 따라 그에 대한 법적 규제의 필요성이 논의되고 있다. 법적 규제는 크게 소비자보호, 공정과세, 불법행위방지의 세 측면에서 검토되고 있고, 이 중 암호자산의 투기성과 관련하여 소비자보호의 문제가 특히 주목된다. 이에 암호자산을 일종의 금융투자상품으로 보아 법적 규제을 할 수 있는지가 국내외적으로 쟁점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를 판단하려면 선결적으로 암호자산의 법적 본질이 무엇인지, 즉 암호자산을 화폐로 볼 것인지, 상품으로 볼 것인지를 먼저 판명해야 한다.
기존의 논문들은 대부분 암호자산을 화폐의 성격과 재화의 성격을 모두 갖춘 ‘복합적 상품’으로 본다. 반면 각국의 정부는 대체로 암호자산은 화폐가 아니라는 입장이며, 한국은행도 암호자산을 매매의 대상이 되는 ‘디지털 상품’이라고 해석한 바 있다. 이 글에서는 암호자산과 관련된 주요 국가의 입장을 정리한다.
미국 국세청(IRS)는 비트코인을 자산(property)으로 인정하고, 이를 이용한 거래는 자산 거래시 적용되는 일반적인 과세원칙을 적용한다고 하였다. 또한 미국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는 비트코인 및 다른 가상통화를 상품거래법(CEA)의 상품(commodity)으로 복, 가상통화와 관련된 옵션 거래에 대해서는 CEA 및 CFTC 지침이 적용된다고 하였다. 반면 법원의 경우에는 암호자산의 법적성질에 대해 화폐성 내지 지급수단성을 인정하는 듯한 판시를 보인다. 연방법원은 “funds"라는 단어의 문리적 해석을 통해, 비트코인은 재화와 용역에 대한 지급수단으로 사용되고 있고 은행계정에서 구입할 수 있으며 금전적 자원 및 교환수단, 지급수단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점에서 "funds”에 포섭될 수 있다고 판시하였다.
영국 왕립국세청은 종전에는 비트코인을 과세대상의 바우처(taxable voucher) 정도로 인식하여 부가가치세를 부과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2014. 3. “Revenew and Customs Brief 9 (2014): Bitcoin and other crypto currencies"라는 제목의 지침을 통하여 비트코인에 대하여 부가가치세를 면제하는 입장으로 바꿈으로서 비트코인에 ‘실질적 화폐 대체수단’의 지위를 인정한 것으로 평가된다.
독일 금융감독청(BaFin)은 비트코인을 금융상품으로 취급하면서 연방은행법의 규제대상으로 하고 있다. 은행법은 비트코인을 계산화페의 단위(units of account)로서의 금융상품으로 취급하는데, 이는 암호자산을 법화는 아니면서 기존의 전자화폐와는 다시 구별되는 지급수단으로서 기능하는 별도의 지위를 부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일본은 2014년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비트코인 거래소인 마운트 곡스(Mt. Gox)의 파산 이후 암호자산에 대한 법적규제와 이용자 보호의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자금결제에 관한 법률」을 개정하였다. 이 법에서 ‘가상통화’는 불특정 다수 사이의 물품구입·서비스 제공 단계에서 결제·매매·교환에 이용될 수 있는 재산적 가치로서, 정보처리시스템에 의해 이전할 수 있는 것으로 정의되는데, 법문언적 해석상 지급수단성을 인정한 것으로 보이나 화폐성을 전면적으로 인정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우리나라의 법제와 관련하여, 「한국은행법」은 화폐 발행권은 한국은행만 가지며(제47조), 한국은행이 발행한 한국은행권은 법화로서 모든 거래에 무제한 통용된다(제49조)고 규정한다. 따라서 암호자산이 법정화폐에 해당할 수 없음은 문언적 해석에 의하여 분명하다. 다만 「외국환거래법」은 외국통화를 “내국통화(대한민국의 법정통화인 원화) 외의 통화”라고 정의하고 있다(제3조 제1항 제1호, 제2호). 그러므로 암호자산이 ‘통화’에 해당한다면 외국환거래법 상의 ‘외국통화’로 판단될 여지는 있다.
그리고 「전자금융거래법」은 전자지급수단 중 전자화폐를 “이전 가능한 금전적 가치가 전자적 방법으로 저장되어 발행된 증표 또는 그 증표에 관한 정보”로서, 현금 또는 예금과 동일한 가치로 교환되어 발행될 것, 발행자에 의해 현금 또는 예금으로 교환이 보장될 것 등의 요건을 갖춘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는바(제2조 제15호), 비트코인은 개념상 발행자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환금성도 보장되지 않고 법정화폐의 수취 대가로 지급되는 것이 아니라 알고리즘에 따라 발행된다는 점에서 전자금융거래법상 전자화폐에도 해당하지 않아서, 「전자금융거래법」 상 전자금융거래업자에게 적용되는 규정의 적용을 받지도 않는다.
우리 대법원 역시 비트코인의 법적성질에 대하여 명확하게 정의한 판례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최근 비트코인의 몰수가능성에 대하여 긍정한 판결이 있으나, 위 몰수는 「범죄수익은닉규제법」에 따른 것으로 몰수의 대상을 물건으로 한정하고 있는 「형법」이 적용된 것이 아니어서, 비트코인의 재산적 가치를 긍정한 것 이상으로 암호자산의 법적성질에 대하여 명확하게 판시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처럼 현재 암호자산에 대한 각국의 태도를 종합하여 보면 암호자산의 재산적 가치를 부정하는 예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암호자산의 법적성질의 판단과 관련하여서는 각국의 입장이 상이한 면이 있고, 한 국가 내에서도 규제하는 법 영역에 따라 다르게 취급하는 경우도 발생하고 있다. 각국의 동향을 살펴보았을 때 암호자산의 법적성질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쟁점이 되는 점은 화폐성을 가지는지 여부이다. 이와 관련하여 많은 국가들이 암호자산 등장 초기에 암호자산을 부가가치세 부과 대상으로 간주함으로써 상품으로 취급하던 입장에서 점차 부가가치세의 대상에서 제외하는 경향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을 두고 각국이 암호자산의 화폐성을 인정하였다고 해석하는 견해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영국의 견해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국가는 암호자산의 화폐성을 명시적으로 인정한 경우는 거의 없으며, 오히려 화폐성을 부정하고 지급수단성 정도를 인정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이러한 각국의 태도에 대해 화폐성을 인정한 것으로 해석하고 동시에 상품성을 가진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다음 글에서는 통화, 화폐, 지급수단, 상품의 정의를 명확히 하는 것을 시작으로 암호자산의 법적 성질에 대해 규명해 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