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공을 넘다드는 곳

by 김곤

오랜만에 남대문을 거쳐 명동에 갔다. 몇 십 년이 지나도 거리는 오롯하다. 평일이라서 그런지 불경기라서 그런지 사람들은 예전보다 덜하다. 행인들은 외국인이라고는 일본인이 대부분이었던 오래전과는 다르게 옷차림이나 귓가에 들리는 언어들로 봐서 다양한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다. 이제 학교에서도 다문화 가정의 자녀들을 보는 것도 방송에서도 외국인 패널을 보는 것에 익숙한 우리다.


시간은 양적으로 공평하지만 질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문화적, 경제적으로 변방이었던 우리가 이처럼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기업과 행정기관, 그리고 국민들의 노력의 열매일 것이다. 공평하게 주어진 양적시간 안에서 질적으로는 거대한 업적을 달성한 대한민국이지만 그늘진 모습도 있다. 요즘 좌와 우의 극한 대립이 이어지고 있다. 극한 대립은 건강한 사회로 가는 길에 방해가 되는 독소와 같다. 몸과 마음이 조화로울 때 건강한 삶을 살아가듯이 아무리 겉이 좋아보여도 속으로 생채기가 가득하면 어떨까.




건강한 사회는 개인들이 열린 마음을 가질 때 가능하지는 않을까 싶다. 몇 해 전 도시 소멸을 막기 위해 고등학교를 통으로 중국 학생들에게 개방하는 정책을 펴고 있는 일본의 한 지방자치단체의 소식을 방송에서 본 적이 있다. 중국의 한 지방과 연계하여 학생들에게 의식주를 해결해 주고 졸업 후에는 일본에서 계속 살도록 일자리도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도 인구절벽 상황이 점점 심해지고 있다. 다문화 시대에 관심이 가는 이야기였다. 오래전 지방의 한 초등학교에 강의를 나간 적이 있었다. 한 반에 약 20명 내외의 학생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에는 다문화 가정의 자녀도 3명이 있었다. 이들은 그날 수업에 가장 적극적이었다. 한 번은 탈북민들에게 강의를 한 적이 있었는데 신분 노출을 꺼리는 그들의 수줍음에 우리의 따뜻한 시선이 필요함을 느꼈다.


일본에서 대학을 다닐 때 다양한 국가의 학생들과 만났다. 대만, 중국. 홍콩, 싱가포르 , 태국 등 아시아 국가의 학생들이 많았다. 그중에 지금도 잊을 수 없는 학생은 미얀마 출신이었는데, 얼마 후 그가 망명을 신청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1학년을 마치고 나서는 그를 본 적은 없었다. 1989년 일본의 방송에는 외국인 패널이 출연하는 프로그램이 많았다. 영어권 사람들이 일본어를 유창하게 하는 모습에 놀랐다. 그 수가 일본처럼 많지 않지만 우리 안방에서도 그와 같은 모습을 볼 수 있게 된 지 오래다. 어느 프로그램에서는 인종 차별 등 불협화음도 들리기도 했고 다른 데에서는 외국인이 프로그램을 하차하는 경우도 있었다.




우리 사회에서 다양한 이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 중 하나가 공공기관이 아닌가 싶다. 국가행사가 있으면 계약직 직원들이 대거 들어온다. 가정주부, 퇴직자, 은퇴자, 취업예정자 등 다양한 사람들과 같이 호흡을 맞춘다. 이들이 들어왔을 때 한가족이라는 생각하는 직원도 있고 그러지 않은 직원도 있었다. 공무원 시험에서는 나이제한이 없어진 지 오래되었다. 누구나가 공무원이 가능하다. 나도 그 혜택에 공무원이 되었다.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경험한 사람들이 공직사회에 들어와 활력을 불어넣기를 바라는 정책에 따라 나이 제한이 없어졌다고 들었다. 내가 공직사회에 들어와 가장 먼저 실천한 것이 그동안의 나를 내려놓은 것이었다. 열린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했다. 행동도 조금은 가볍게 했다. 그래야 젊은 동료나 상사와 근무하는 데 불편함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다.


가깝게 지내던 한 직원과 차를 마실 기회가 있었다. 그가 오래전부터 나만 보면 궁금했다며 "주무관님은 나이가 있어서 같이 일하는 상사도 주무관님도 불편하실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그래요? 나는 잘 모르겠던데요" 라고 나는 말했지만 내심은 그렇지 않았다. 나와 근무했던 사람들 중에는 나의 나이에 상관없이 계급으로 나를 누르려고 했던 사람도 있었고 그렇지 않고 마음을 열어 주었던 사람도 있었다.




3년마다 있는 인사이동 후에는 그때마다 직원들의 업무분장을 새로 정해야 한다. 업무 중에 가장 꺼려하는 것이 회계업무여서 주로 신입이 하는 경우가 많다. 신참이 경우에는 계급이 가장 낮은 직원, 아니면 입부 순서가 늦은 직원이 하는데, 회계업무를 하고 싶지 않아 직원 간 의견 충돌이 발생하기도 했다.


인사 시기 어느 날 국장이 내가 회계를 했으면 좋겠다고 계장을 통해 전해왔다. 그는 인사이동과 관계없이 1년마다 자체적으로 업무분장을 했다. 직원마다 다양한 업무를 해보는 것이 좋다는 이유여서다. 회의를 마치고 담당 계장이 조금 얘기하기 부담스럽다는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주무관님 회계업무를 하시라고 합니다. 국장님이....."

계장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나는 언제 이 업무를 해 보겠냐 라고 생각하며 말했다.

"예. 할게요. 제가 언제 해보겠어요. 나이 먹고 들어와 근무도 몇 년 못하는데...."

나는 망설임 없이 동의하고 그 일을 재미있게 했다. 이러한 일이 있은 후에 그 국장을 만난 적이 있다. 그때 그가 이렇게 말했다.

"주무관이 그때 회계업무를 해서 얼마나 고마웠는지 몰라. 지금도 고맙게 생각해."

"뭘요, 저야 감사했죠. 국장님 덕에 회계업무도 해보고 좋았습니다."


그 후 반대의 경험도 있었다. 내가 다시 회계업무를 했을 때다. 그때는 아쉽게도 선택권이 없었다. 부담스러웠지만 나는 해야 했다. 국장은 상의도 사전 예고도 없이 입사 순으로 업무를 정했다. 코로나 창궐로 외부에서 식사가 안 되는 상황이 이어지고 서무 일까지 해야 했던 나는 지쳐갔다. 결국 코로나에 감염되고 후유증으로 입원한 후 휴직을 했다. 내가 그에게 "나이 많은 사람에게 회계업무라니요. 못 합니다"라고 했더라면 어떠했을까. 그도 곤란했을 것이고 나도 어색했을 것이다. 50이 넘어 시작한 나의 늦깎이 공직생활에서 아쉬움이 남는 기억이다.




일방통행은 한쪽의 희생을 낳는다. 다양한 사람들 속에서의 조화는 열린 마음으로 상대방의 다른 점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 출발은 나를 내려놓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러면 상대를 배려하는 공감력이 높아진다. 우리는 사람들의 겉모습에 눈을 두는 경우가 많다. 때로는 외모에 그 사람의 품격도 판단해 버린다. 부메랑을 맞기도 하지만 그런 습관은 쉽게 안 없어진다.


"모임에 나갈 때는 나도 옷에 신경을 쓰게 되더라고."


아내가 했던 말이다. 상대방의 눈을 의식한다는 것이다. 정기적으로 참석하는 모임에는 언니, 동생들 연령대가 다양하다고 한다. 내가 있는 사무실에도 20대부터 50대 후반까지, 그리고 성별, 출신지역도 다양하다. 초고령화 시대에 본격 접어들면 일터에서나 모임에서 이러한 경우는 더 할 것이다.


우리는 거미줄로 연결된 인터넷 망으로 국경마저 허물어지고 있는 시대에 산다. 국적은 있지만 국경이 없어지고 시공을 넘나드는 시대다. 우리의 마음처럼 말이다. 세계지도를 펴고 자신이 있는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라. 눈의 동공이 커지고 귀가 열리며 자신이 있는 곳이 얼마나 미세한지가 보일 것이다. 이제 우리의 일상에서 어느 특정의 세대, 성별, 학연, 지연을 등에 업고 이익을 독점하는 관습을 시간의 저편으로 흘려보내면 어떨까 싶다. 선입관이나 편견 없는 따뜻한 마음을 모두가 갖길 희망해 본다.




이전 04화마음에 따라 다르게 흐르는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