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부모님이 오토바이 사고로 자리에 몸져누워 계신다는 소식을 들은 건 어제저녁 남편의 말을 통해서다. 그렇지 않아도 시댁을 방문할 일이 있었는데, 나는 이참에 좀 더 빨리 서두르는 게 낫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다음 날, 나는 아침 일찍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농수산물 도매시장으로 달려갔다.
가게 앞은 알록달록한 과일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덕분에 내 눈은 호강했다. 연둣빛이 탐스러운 아오리 사과부터 울긋불긋한 토마토, 향이 짙은 수박, 하루살이가 모여드는 캠벨 포도, 입술을 달싹이게 만드는 다양한 품종의 복숭아들, 빛깔마저 요염한 체리까지 지나가는 객들을 잠시도 지나치지 않게 과일들은 유혹의 손길을 보냈다. 그러나 정작 내가 찾고자 했던 과일은 보이지 않았다. 항상 이맘때면 매대 위 중앙에 조숙한 소녀처럼 조용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모습이 어른거린다. 가게 안은 대형 선풍기가 군데군데 자리를 잡고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부채질하는 사람도 더러 보였다. 도매시장은 드나드는 사람들 열기로 후끈후끈했다.
“미백 복숭아 없나요?”
“미백이요? 어제 다 나갔는데, 천중도랑 황도 물건 좋아요. 단단한 월미도 있는데.”
그때였다. 옆 가게에서 파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연신 부채질을 하던 40대 남자 장사꾼이 우리말을 엿들었는지 벌떡 일어나더니 소리쳤다.
“울 가게에 어제 팔다 남은 미백 한 상자 남은 것 있는디, 안 살라요? 냉장고에 있는디”
“정말이요?”
“와, 내가 거짓말을 하것소.”
나는 입가에 미소가 퍼졌다. 그리고 자리를 옮겨 옆 과일가게 앞으로 갔다. 장사꾼은 가게 안에서 복숭아 한 상자를 꺼내 왔다. 상자 안에는 달덩이처럼 뽀얀 복숭아 13개가 들어 있었다. 밤중에 봤더라면 아마도 야광으로 주변을 밝히는 큰 전구가 아닐까 싶었다. 빛깔은 사람의 피부로 따지면 백옥 같은 십 대 소녀처럼 보였다. 토실토실한 아기 엉덩이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윽한 향과 단맛을 상상하면 저절로 다시 젊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미백 복숭아를 두고 시아버님은 백도 중에 으뜸이라며 엄지손가락을 척 올리며 허허허 웃으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시아버님이 미백 복숭아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난 뒤부터 나는 빠뜨리지 않고 매년 복숭아를 사서 시댁을 방문했다. 전날 물건이었다지만, 상품은 최상이었다.
시댁에 도착하자마자 차에서 내리기가 싫었다. 에어컨 바람을 놓고 가기가 아쉬웠다. 뜨거운 빛 화살들이 정수리에 그대로 꽂혔다. 연일 38도를 오르내리는 용광로 무더위가 사람을 잡다 못해 혀를 내두르게 했다. 숨조차 쉬기 어려워 나는 트렁크에서 햇사레 복숭아 브랜드가 찍힌 과일 한 상자를 부랴부랴 꺼내 가림막이 있는 그늘 밑으로 달아났다.
시아버님은 올해 팔순을 넘기셨다. 시어머님도 고희를 넘긴 지 오래다. 두 분은 젊은 날 복숭아 농사를 짓다가 실패를 거듭하고는 배 농사로 품목을 바꾸어 현재까지 일하신다. 그러나 작년부터 아버님이 노환으로 쇠약해지면서 배밭을 타인에게 넘기고 두 분은 가족들이 먹을 만큼만 농사를 지으셨다. 시아버님은 이제 일손을 놓고 쉬셔야 했다. 그러나 시어머님은 아버님이 아프시다는 걸 받아들이지 않고 농사일을 더 하시길 바라셨다. 두 분은 가끔 이 문제로 종종 다투셨다.
나는 안방으로 들어가 두 분께 인사를 드렸다.
“저 왔어요.”
시부모님은 안방에 누워 계셨다. 시곗바늘은 열한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에미 왔냐?”
아버님은 민소매 속옷과 잠옷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방안은 이십 년 전에 유행했던 한일 선풍기가 끼익 소리를 내면서 좌우로 움직였다. 텁텁한 공기로 인해 선풍기 바람은 전혀 시원하지 않았다. 어머님은 아예 일어나는 것조차 어려우신지 이맛살을 찌푸리며 상체를 비트는 것조차 고통스러워하셨다. 안방은 오 년 전에 도배했음에도 모서리마다 곰팡이가 피어올랐고, 얼룩과 거미줄은 엉켜 붙어 있었다.
“일어나지 마세요. 어머니.”
어머님을 말렸다. 그러나 결국 어머님은 윗몸을 일으키고 벽에 기대었다.
“의사 선생 말로는 나보고 한 달간 꼼짝 말고 누워 지내야 한다고 하던데 어쩐 다냐. 고추밭에 지금 불나서 죽갔는데. 네 아버지랑 내가 이러니께 고추는 누가 딴 다냐?”
어머님은 몸이 아픈 것보다 고추밭을 더 염려하셨다. 나는 어머님 몸 걱정을 먼저 하시라고 말씀드렸다. 자식들에게 다 연락해서 주말에 모이면 고추를 딸 것이라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어머님은 한바탕 눈물을 쏟으시며 자식들에게 미안하다고 자책을 하셨다.
“우리가 어여 죽어야 네들이 편할 텐데.”
아버님이 또 실없는 소리를 했다.
나는 아버님을 크게 나무랐다. 며느리가 어디서 어른을 훈계하냐고 하겠지만, 아버님은 내 아픔을 알고 계신 것처럼 반박하지 않으셨다. 아버님은 몸이 아프실 때마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사람처럼 죽는다는 말을 자주 내뱉으셨다. 그 모습이 내가 알고 지냈던 친정아버지 모습과 비슷하게 다가와서 나는 속상했다.
어머님은 브래지어를 올리며 축 처진 유방 밑부터 옆구리 사이로 붙인 황토색 파스를 내게 보여주셨다. 어머님의 피부는 자글자글한 주름으로 가득했다. 왕년에는 젊고 고우면서 힘깨나 쓰는 여자로 인정받았다고 했다. 그래서 아버님도 당해낼 재간이 없다며 어머님을 무시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나 내가 이 씨네 집안으로 시집와서 십 년이 넘도록 보아왔던 시어머님의 모습은 갈수록 약해져만 가는 여자의 모습이 많았다. 겉으로는 강한 척하시지만, 속으로는 많이 지쳐있으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시아버님도 마찬가지였다. 아버님도 어머님도 함께 살고 계셨지만, 외로워 보였다. 아버님과 살갑게 지내는 자식은 아무도 없었다. 시아버님은 완고한 성격을 지닌 가장이었다. 아버님께 애교를 부리며 정을 주는 사람은 집안에서 나 하나뿐이었다. 자식들을 놔두고 막내며느리를 무척 예뻐해 주시는 시아버님의 특별 사랑 덕분에 나는 몸 둘 바를 모르면서도 아버님의 외로운 마음을 외면하지 않고 이해하려고 했다. 그건 아마도 친정아버지가 십 년 전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아버지의 부재가 헛헛한 내 마음에 시아버님이 대신 무의식 중에 자리를 차지한 이유도 있었다. 그래서 매년 혹독한 여름날 힘든 줄도 모르고 시댁을 내 집인 양 달려왔는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요즈음 계속 죽는다는 말씀을 아버님이 아무 생각 없이 하실 때마다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친정아버지도 ‘내가 오래 살아서 뭐하냐.’라는 말씀을 종종 내뱉었다. 그건 분명 자식들에게 상처가 되는 말이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해에 거짓말처럼 농약을 마시고 저세상으로 가셨다. 나는 아버지의 자살을 받아들이는데 무려 2년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 아니, 아직도 그 아픔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나는 복숭아 두 개를 씻어서 쟁반에 담아 빈 접시와 함께 내왔다. 아버님과 어머님은 복숭아를 보시고는 두 눈이 동그래졌다.
“이 비싼 걸 왜 사 왔느냐?”
“비싸긴요. 얼마 안 해요. 어머님 아버님 복숭아 좋아하시잖아요. 아버님 미백 특히 좋아하시잖아요.”
“아, 그럼, 내가 미백 복숭아를 을매나 좋아한다고.”
아버님 눈썹이 반달 모양이 되었다. 그러면 어머님은 옆에서 입술을 삐죽거리며 또 구시렁거리신다. 그러면 나는 살짝 미소를 짓는다. 아옹다옹하는 노부부의 모습이 추하게 여겨지지 않고 오랜 세월 살아온 당신들 사랑놀이가 저 모습이 아닐까? 싶어서 내가 끼어들 필요도 없이 정겹게 다가온다. 친정아버지도 지금쯤 살아계셨다면 저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다.
손으로 복숭아 껍질을 살살 벗겼다. 미백은 껍질이 얇아서 쉽게 상처가 난다. 뽀얀 속살이 드러났다. 껍질을 다 벗기고 칼로 속살을 나눌 때였다. 쩍 하고 순식간에 복숭아가 둘로 나뉘었다. 칼에 힘을 많이 넣은 것도 아니었다. 복숭아 속살은 물렁물렁했고 조금만 눌러도 표면이 들어갔다. 그렇지만 씨앗이 갈라질 줄이야. 예쁘게 잘라서 접시에 담으려고 했던 내 노력은 허사가 되고 말았다. 잠깐 사이에 복숭아즙이 단내를 풍기며 뚝뚝 흘렀다. 나는 반으로 나뉜 복숭아를 다시 잘라서 접시에 놓았다. 시부모님은 포크로 복숭아를 천천히 씹으며 맛나게 드셨다.
“참 달구나.”
어머님과 아버님이 흡족해하시며 드시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나까지 기분이 좋았다. 그 모습은 흡사 잘 익은 복숭아와도 닮았다. 나는 빈 접시를 내오며 주방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그 사이에 잠시 눈가에 눈물이 어룽졌다. 많이 움직이시던 두 노인이 병상에 누워 계시니 아주 안쓰럽다.
시댁은 멀리할수록 좋다고 지인들이 말했다. 그러나 내게 시댁은 그 어느 가정보다 따뜻하고 사랑이 넘치는 공간이다. 두 어르신이 오래 사시도록 나는 최선을 다해 건강을 챙겨드릴 것이다. 최근 사회문제로 떠오르는 노인 고독사 소식을 접할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자식들이 더 자주 찾아뵙고 신경 써야 하는데, 노인을 멀리하려는 젊은이들의 삐뚤어진 문화 풍토로 인해 우리나라의 고유한 효 문화가 상실되어가는 건 아닐까 하고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친정아버지께 못다 한 효를 시부모님이 살아계시는 동안에는 마음을 다해 정성껏 실천하련다. 이 일은 멋지고 아름다운 행위이다. 나는 동서와 시누들에게 카톡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형님들, 어서 빨리 고향에 내려오셔요. 어머님, 아버님 많이 아프셔요.』
그녀들에게서 ‘까-톡, 까-톡’ 하고 응답이 날아왔다. 조만간 가족들이 다시 모일 것이다. 어머님, 아버님이 미백처럼 웃으실 날도 며칠 안 남았다. 나는 벌써 그날이 손꼽아 기다려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