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무척 덥다. 너무 덥다! 시원한 냇가에 가서 복달임 한 번 해봤으면 좋겠다.
옛날부터 복달임에는 개장국이 제격이라 했는데 요즘은 그놈의 애완동물 타령(?)에 삼계탕만이 복달임 음식인양 행세를 하고 있다. 복달임 음식에는 삼계탕보다는 오히려 순댓국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나 혼자만의 생각에 그칠지는 모르겠지만...
순댓국은 돼지 뼈나 소뼈를 푹 고아 내장(허파, 간, 오소리감투)과 머릿고기를 넣어 다시 끓여낸 국이다. 이름은 순댓국이지만 북엇국 등 다른 국과는 달리 순대가 들어가기는 해도 순대가 그 맛을 내는 주재료는 아니라 한다. 영양이 많고 값고 싸고 특히 소주와 잘 어울리며 해장에도 좋다고 알려져 있다. 마을마다 순댓국집이 아직까지는 한두 곳이 남아있어 여름이지만 대낮부터 소주와 순댓국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것이 그리 어렵지만은 않다.
1990년 초 감정평가사 사무실을 내고 차츰 거래처를 확장해 가고 있을 때 일이다. 어느 날 A 거래처 B 부사장이 전화를 걸어왔다.
"은행감독원에서 5명이나 검사를 나왔습니다. L 반장님 잘 아시죠? 그 분이 우리와는 절대 식사를 하지 않겠다하니 평가사님께서 한 번 오셔서 점심 식사도 하시고 반주도 좀 드시게 하시어 검사 분위기라도 좀 부드럽게 해 주시면 어떨지요? 인근에 마땅한 식당이 있으니 미리 평가사님 이름으로 예약을 해 두겠습니다."
점심시간에 맞춰 A 거래처 검사장으로 갔다. L 반장님과 반원들에게 인사를 하고 같이 점심 식사를 하자고 말씀드렸다. L 반장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요즘 검사 기간 중에는 외부 인사와 절대 식사를 하지 말라는 지시가 엄격해. 한국은행 출신이니 굳이 외부 인사는 아니라고 하겠지만 보는 사람들 눈이 많아 제대로 같이 식사를 하기 어렵다네. 이왕 왔으니 옛날 당신과 검사 다닐 때 먹던 순댓국이나 같이 하지. 물론 식대도 자네가 부담해서는 안되네..."
순댓국집으로 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순댓국과 암뽕 오소리 감투, 머릿고기가 정말 맛있어 보였다. 지난 날 동료 은행 검사역들과 같이 지방에 출장가서 그 곳 명물이라는 순댓국과 소주를 먹던 생각도 났다. 그러나 입맛이 없었다. 입 안이 깔깔했다. 먹는 둥 마는 둥 식사를 끝냈다.
'A 거래처 B 부사장이 다른 곳에 점심 예약을 한 것 같은데 이를 어쩌나! 제대로 식사 대접하라 부탁했는데... 반주까지 곁들이라 했는데... 이제 A 거래처와의 거래를 계속 할 수 있으려나...' 걱정이 돼서였다.
식사 후 L 반장님 방으로 갔다. 그리고 답답한 사정을 말씀드렸다.
"L 반장님 사정 좀 봐주십시오. 이곳은 제가 은행감독원 출신이라 하여 겨우 거래를 트고 이제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습니다. 저도 은행감독원 출신인데 검사 나오신 분들에게 점심도 한 번 사지 못하는 무능한 사람이라 그들이 그리 알면 저는 더 이상 이곳의 감정평가 일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오늘 B 부사장이 전화를 했고 반주까지 대접하라 하며 식당까지 정해줬는데 이를 어찌합니까! 이곳에 반장님이 검사를 나오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거래를 계속 할 수 있었는데 이제 끝이 난 것 같습니다. 이런 사정이라면 제가 거래하는 금융기관에는 차라리 은행감독원 검사는 나오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리고 격앙되었으며 참으려 했지만 눈앞이 뿌옇게 흐릿해져서 천장을 보며 눈을 껌뻑거리고 있었다.
L 반장님이 깜짝 놀라시며
"자네가 그렇게까지 힘든 줄은 몰랐네. 나는 오히려 은행감독원 출신이라 금융기관들이 더 잘 봐줄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우리 검사역들의 생각이 너무 순진한 것이었구먼. 세상이 다 그런 것이구먼..." 하셨다.
그 후 L 반장님은 거래처 금융기관에 검사를 나오시면 먼저 나에게 전화를 주셨다.
"이 곳 점포장에게 당신 잘 봐주라 부탁했다. 와서 점심이나 사고 가라. 순댓국 같은 것 말고 제대로 된 식사 한 번 하고 가라."하셨다.
그것도 그 거래처 점포장을 앞에 두고 큰 소리로 그리 전화를 하셨었다.
그것이 벌써 25년 전의 일이었다. 나도 이제 은퇴를 했고 L 반장님은 여든이 훨씬 넘으셨을텐데 어디에 사시는지도 모르고 있었으니 나도 참 무심한 사람이구나 생각했었다.
용인시 백암면 **순대국집이었다. 날씨는 무덥지만 순대국집안은 시원했고 점심이라면 너무 늦고 저녁 시간이라면 이른 시간이라 그 유명하다는 백암의 순대국집이지만 손님은 많지 않아 조용했다. 어제 마신 술이 다 깨지도 않은듯한데 나는 계속 소주를 홀짝거리고 있었다.
순댓국맛이 좋고 암뽕 오소리감투, 머릿고기 등 안주가 좋아서였을까? 창문밖에 내리고 있는 한줄기 소나기가 시원해서였을까? 그러나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머리가 하얗게 쉬시고 여든도 훨씬 넘으신 L 반장님이 얼굴에 미소를 보이시면서
"나 그 때 일 기억나지 않아. 아마 자네가 날 잘못 기억하고 있을거야..."
하시면서 다 비워지지도 않은 내 술잔에 연신 소주를 따르시고 계셨기 때문에 그날 술은 점점 더 취해올 수밖에 없었다.
이제 됐다! L 반장님이 이 곳 백암에 귀촌해 오신 것을 알았으니 이제 백암 순댓국과 소주는 자주 먹게 되겠지... 그래 많이 먹고 마시자. 아쉽지만 우리 앞에는 그렇게 할 수 있는 남은 세월도 그리 길지는 않을테니....
2018년 8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