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가족여행

by 임성규


5월이다. 사방이 푸르러지고 공기도 맑고 날씨도 딱 좋으니 마음이 심숭생숭해진다. 집을 떠나 어디론지 여행을 가고 싶은 요즘이다. 불경기다. 경제가 좋지 않다. 하지만 어린이날이 있고 어버이날도 있는 가정의 달 5월이니 아이들 등쌀에 못 이겨 또는 부모님께 효도한다고 짧게라도 가족끼리 여행을 간다, 갔다 왔다는 소식들이 들린다.


내가 가족여행이라 이름을 붙일 수 있는 맨 처음의 여행은 1980년 여름인 것 같다.


당시 우리나라 여행 인프라는 지금 생각하면 그런 때도 있었나 싶을 정도로 열악했다. 도로 사정, 차량 사정, 관광지 숙박시설 모두 형편 없었고 경제 사정도 좋지 않으니 여름휴가라 해도 가까운 계곡이나 물가를 찾는 것이 고작이었고 가족끼리 여행을 간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 당시 내가 근무하고 있는 한국은행은 직원 복리후생이 매우 좋은 직장이었다. 하계휴가 기간 중 자녀가 있는 기혼 직원을 대상으로 설악산 설악동에 2박3일 숙소를 제공하고 인근 해수욕장까지의 셔틀버스와 약간의 간접 경비까지 지원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휴가 기간 중에만 한시적으로 하는 것이니 경쟁이 있어 신청을 받아 추첨으로 일시를 정했고 신청자 중 일부는 탈락해야만 했다.


7월 말인 것 같았다. 정해진 날 날씨가 궂었다. 하늘은 잔뜩 흐리고 비까지 오락가락했다. 한국은행 본관에서 관광버스가 여러 대 출발했다. 나는 당시 딸이 셋이었다. 딸 아들 구별 말고 하나 낳아 잘 잘 기르자 했고 직장의 자녀 학자금도 둘로 제한했던 시절인데 나는 용감(?)하게도 딸을 셋이나 낳았다.


비도 오락가락하고 영동 고속도로의 제한속도가 최고 80km 일부 구간은 40km이던 때이니 버스에서 김밥으로 점심을 대신했는데도 오후 2시가 넘어 설악동에 도착했다.


설악동의 내가 묵을 숙소는 열악했다. 과장급 이상에게 배정될 A지역은 좀 나은 것 같았지만 신참 대리급인 내가 묵을 B지역은 지금 생각해도 한심했다. 여관들이 대부분 길이만 길쭉했지 2~3층의 낮은 건물로 각층에 크지 않은 방들만 여럿 두었고 세면장 화장실은 한 켠에 마련하여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식당도 제대로 없어 한 켠에 마련된 공동 취사장에서 석유 버너 코펠로 식사를 해결해야 했다.

첫날 셔틀버스로 송지호 해수욕장에 갔다. 애들 셋은 신이 났다. 처음 보는 바다이니 좋아 어쩔 줄 몰랐다. 얕은 바닷물에 올망졸망 셋이 하나의 튜브를 잡고 물장구치고 재잘거리고 깔깔대니 주위 사람들까지 박수치며 애들 주위로 몰려오기도 했다.

다음날은 비가 또 오락가락했다. 해수욕을 포기하고 설악동 물가에서 놀았다. 여기서도 우리 딸 셋이 주인공이다. 같은 옷에 같은 비닐 비옷을 입고 같은 비닐우산까지 손에 들고 오리새끼들 같이 동동거린다. 세 살짜리 막내가 다리 아프다고 주저앉으면 일곱 살짜리 큰 애가 등을 대고 업어주며 놀고 있으니 같이 있던 사람들도 그 모습 귀엽다고 과자를 나눠주고 말을 걸기도 했다.

애들은 좋았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부부의 첫 가족여행은 힘들었다. 숙소도 다섯 명이 자기는 좁았고 이불도 눅눅했고 냉방도 작은 선풍기 하나뿐이니 자는 것이 편하지가 않았다. 더욱이 애들 셋을 공동 세면장에서 씻기고 옷을 갈아입히고 공동 취사장에서 밥을 해서 먹이고... 내 기억 속 첫 가족여행은 애들의 웃는 모습을 빼면 남는 것이 없는 여행이었다.

사진첩을 뒤져 그때의 사진들을 찾아보았다. 올망졸망 셋이 같은 옷 위에 같은 비닐 옷을 입고 웃고 있는 사진이 보인다. 그때 앞장서서 동생들을 데리고 놀고 엄마를 도와 동생들을 먹이고 씻기고 했던 큰딸의 얼굴에서 울컥 목이 메였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그 아이는 지금 없다. 하늘나라에 있다.


하늘나라에는 가족여행이 있을까! 있으면 무엇하나. 딸 둘, 남편, 셋을 모두 두고 저 혼자 하늘나라에 갔으니 그런 여행이 하늘나라에 있은들 무엇하겠는가!


“주님 저희 딸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그리고 그곳에서는 그 아이 이제 그만 아프게 해주소서...”

간절히 기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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