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자서(伍子胥)

잦은 충언은 상대를 질리게 한다

by 길엽


오자서는 본래 초나라 출신이나 아버지와 형이 초나라 평왕(平王)의 노여움을 사 처형된 뒤 초나라를 떠났다. 조국을 탈출하여 오나라로 망명한 오자서가 공자 광(光)을 섬긴다. 공자 광의 쿠데타에 동참하게 되었고, 광은 쿠데타가 성공한 후 즉위를 하는데 이 사람이 바로 오왕 합려이다.


이 때 초나라에 대한 분노와 원망이 극에 달했던 오자서는 유명한 병법가 손무와 함께 합려를 보좌하여 오나라를 강대국으로 만든다. 기원전 506년에 초나라에 출병하여 초의 수도를 함락시켰다. 철천지 원수 초 평왕이 이미 죽은 뒤였기 때문에 오자서는 묘를 파헤치고 평왕의 시체를 300번이나 채찍질하여 원한을 풀었다. 실로 한서린 보복이었다. 지난 날 초나라에 있을 때 친구였던 신포서가 오자서의 행위가 너무 가혹하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오자서는


“나의 해는 저물고 나의 갈 길은 머니, 도리를 역행할 수밖에 없다.”

吾日莫途遠, 吾故倒行而逆施之.



오자서 굴묘편시.jfif 평왕의 묘를 파고 시체에 300대 매질하는 오자서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다’는 뜻의 사자성어 일모도원(日暮途遠)은 여기에서 비롯한 것이다. 성어 그대로 할 일은 많지만 시간이 없는 상황을 빗대어 얘기할 때 자주 인용되며, '도리에 어긋남을 무릅쓰다'는 의미도 함축되어 있다. 초평왕에 대한 원한에 사무쳐, 무덤에 있는 시체를 꺼내어 300대나 채찍질하는 행위에 대해 오자서가 스스로 합리화하는 말이다. 그 후 강대해진 오나라는 패권 야욕으로, 월나라를 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키지만, 월나라에 패하면서 그때 입은 상처로 합려가 사망하게 된다. 합려의 아들 부차가 뒤이어 제위에 올라 부왕의 복수를 맹세하였고, 오자서도 그를 보좌하였다.


기원전 494년 회계산에서 월나라와 싸워 대승하게 된다. 항복한 구천이 부인과 함께 몇 년 간 오나라에 끌려가서 포로 생활을 하는 등 온갖 치욕스러운 생활을 감수한다. 부차는 아버지 합려의 능묘 옆에 돌집을 하나 짓고 구천 부부와 그의 신하들을 몰아넣고는 죄수 옷을 입히고 말을 먹이는 고역을 시켰다. 일국의 군주가 아무리 항복한 상태라곤 하지만 도저히 참기 어려운 극도의 수치를 당했다. 심지어 부차가 외출할 때면 구천에게는 말고삐를 잡게 했을 정도였다.


구천이 비록 오나라에 장기간 구속되고 온갖 수치를 겪고 있었지만, 항상 월나라를 다시 일으키겠다는 열망은 늘 가슴 속에 가득 차 있었다. 구천의 특급 참모인 범려는 부차의 신하 중 탐욕스러운 기회주의자 태재 백비(伯嚭)를 집중 겨냥하여 뇌물을 바침으로써 오나라 군신 간의 이간질을 시도한다. 백비에게 뇌물을 주고 부차의 믿음을 얻었다.




구천_001.jpg 월(越) 구천(句踐)

결국 구천은 많은 재물을 주고 오의 신하가 될 것을 굳게 약속하고 풀려 나온다. 이때 부차의 신하인 오자서는 후한을 남기지 않으려면 지금 구천을 살려서는 안 된다고 부차에게 집요하게 간하였다. 그런데 백비는 오자서와 달리 구천을 석방할 것을 계속 건의한다. 월나라로부터 뇌물을 계속 받은 백비는 월이 항복하여 신하가 되는 것이 오히려 오에 큰 이익이라고 강변하였다. 적은 내부에 있다는 것이 여실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부차는 그때부터 오자서를 점점 멀리하고, 대신 백비를 중용하였다. 구천이 부차의 믿음을 얻고자 ‘문질상분(問疾嘗糞)’ 즉, 대변의 맛을 보고 병세를 알아보는 극단적인 행위 같은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실제로 구천이 부차의 대변 맛을 보고 부차의 병이 낫는 날짜를 예상하였고, 구천의 말대로 부차의 병이 나으면서 부차의 깊은 신임을 받게 된다. 구천이 왜 그런 행위를 했는지를 훤히 꿰뚫어 보고 있던 오자서는 구천을 죽일 것을 강력하게 주창한다. 그러나 부차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간신 백비의 말을 따라 월나라를 속국으로 삼는 것으로 마무리지었다.


오나라에서 석방되었지만 구천의 위기가 깔끔하게 끝난 것은 아니었다. 오나라의 지속적인 감시 속에서도 월나라의 국력을 키우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와 함께 구천은 오나라 간신 백비에게 엄청난 뇌물을 써서, 지속적으로 오자서를 중상모략하게 한다. 이렇게 간접적인 방법으로 오자서와 부차의 관계를 끊임없이 이간질시킨다. 부차는 월나라에 대해 더 이상 염려하지 않았다. 오히려 부차는 북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천하의 맹주가 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킨다. 이에 오자서가 강력하게 간언한다.


“월나라는 우리에게 배 속의 질환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들은 우리와 접경하고 있으면서 항상 침략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습니다. 구천이 유순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야심을 실현시키기 위한 것이니 월나라를 속히 도모하느니만 못합니다. 우리가 제나라를 쳐 승리를 거둘지라도 이는 경작도 할 수 없는 돌밭을 얻는 것과 같아 아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월나라를 없애지 않으면 오나라는 장차 망하고 말 것입니다. 의원에게 병을 치료하게 하면서 ‘반드시 병근(病根), 병의 근원을 남겨두시오’라고 말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대왕은 병근을 남겨둔 채 대업을 이루고자 하시니 이는 지극히 어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부차는 일언지하에 오자서의 건의를 묵살한다.

“이미 출정의 명이 내려졌으니 더 이상 간하지 말라. 지엄한 군법은 예외가 없다!”


오자서는 부차에게 더 이상의 간언해봤자 의미 없다고 여기게 된다. 후에 오자서가 아들 오봉을 데리고 제나라에 사자로 가서 그곳 대부 포식에 맡기고 제나라로 귀국했다. 부차가 오자서가 아들을 제나라에 맡긴 사실을 뒤늦게 알고는 크게 노하여 사람을 시켜 자신의 보검 촉루를 오자서에게 전했다. 촉루검으로 자결하라는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부차의 아버지 합려가 왕위에 오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오자서가 합려의 아들 부차에게 버림받는 순간이다. 오자서는 개인적 원한 때문에 복수심에 불타 오나라의 힘으로 철천지 원수 초평왕의 시체에 매질을 가하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월나라 구천을 경계하란 오자서의 충정 어린 간언이 오 부차에겐 수용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충언이 오자서의 생명을 단축시키고 말았으니.


오자서가 보기에 월의 구천이 분명 무서운 사람이었다. 고난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수치도 고통도 이겨낼 수 있는 사람으로 보였다. 간언도 상황에 따라 다양한 결과를 낳기 마련이다. 오자서가 아무리 충정 어린 간언을 한다지만 그것도 횟수가 너무 지나치면 듣는 사람도 지치게 마련이다. 듣기 좋은 노래도 한번 두 번이지 같은 말을 계속하면 질리지 않겠는가. 더욱이 부차 곁에서 아첨하는 백비가 지속적으로 오자서를 험담하니 부차 입장에선 안 그래도 오자서가 부담스러우니, 이참에 자결을 명한 것이다. 오자서가 자결하기 전에 주위 사람에게 이같이 당부했다.


“나의 무덤 위에 가래나무를 심어 관재(棺材)로 쓰도록 하라. 내 눈을 도려내 오나라 동문 위에 매달아 월나라 도적들이 쳐들어와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을 똑똑히 볼 수 있도록 하라.”

必樹吾墓上以梓, 令可以爲器. 而抉吾眼縣吳東門之上, 以觀越寇之入滅吳也.


오나라 왕은 이 말을 듣고 몹시 화가 나서, 오자서의 시체를 말가죽으로 만든 자루에 담아 장강 물속에 띄워 버렸다. 중국 동남쪽 변방 소국이던 오나라를 강국의 수준으로 올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던 오자서가 말가죽에 싸여 장강 물속의 귀신이 되었다. 지난 날 부차의 아버지 합려가 제위에 오르는데 일등공신이었던 시대의 영웅이 정작 그 아들 대에 비참한 말로를 맞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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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날 부차의 아버지 합려가 쿠데타를 일으킬 때, 오자서는 합려를 위해 기발한 계략을 썼다. 당시 왕이 생선 요리를 좋아하는 것에 착안하여, 오자서의 명을 받은 자객 전제가 물고기 뱃속에 칼을 숨긴 일명 어장검(魚藏劍)으로 당시 왕을 암살한 것이다. 기발한 방법으로 상대방을 제거한 뒤 합려가 왕위에 올랐고, 오자서를 비롯한 손무 등의 참모들의 탁월한 보좌를 바탕으로 오나라가 강국으로 올라섰다.


그렇게 혁혁한 공을 세웠지만 합려의 아들 부차에겐 그러한 공적의 약발이 오래 가지 않았다. 오자서가 목숨을 걸고 부차의 아버지 합려가 군주에 등극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곤 하지만 부차에겐 오자서의 존재가 부담스러웠다. 마침 간신 백비가 달콤한 아첨과 함께 오자서를 모함하였으니. 아첨은 달콤하다. 간신 백비의 갖가지 아첨에 부차가 넘어가는 바람에 오자서의 간언도 귀찮은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물론 오자서의 간언이 직선적이어서 부차를 자극한 면도 있다. 신하가 군주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신임을 얻어야 한다. 간언은 효과를 발휘하려면 그 상황 맥락에 맞게 실행되어야 한다. 특히 신하가 군주에게 간할 때는 군주의 현재 심리상태가 절대적인 요소가 된다. 사람의 마음이 하루에도 열두 번 바뀐다고 하지 않은가.


그렇게 변화무쌍한 사람 마음을 어찌 파악하여 그에 적절한 간언을 한단 말인가. 더욱이 곁에서 백비란 자가 끊임없이 참소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오자서의 건의는 진정성이 있느냐와 상관없이 부차를 거슬리게 할 뿐이었다. 간언을 할 때 제3자의 존재는 뜻밖의 결과를 만들어 낼 경우가 많다. 대부분 부정적인 결과이지만.

그래서 간언이 어려운 것이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어떻게 간언해야 효과적인가. 간언하는 사람이 뛰어난 역량을 소유하고, 상대방을 존중하는 너그러운 마음을 갖고 간언할 때가 가장 효과적이다. 군주의 상황이 복잡 다양할 때도 주위 사람들의 신뢰를 전폭적으로 받고 있는 신하가 역량을 갖추고 너그럽게 간언할 때, 웬만하면 그 간언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래야 설득이 가능하다.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오해를 사기 십상이다.



공자는 『논어』 「자장」에서 이같이 언급한 바 있다.

“군자인 신하는 군주에게 간할 때 반드시 신뢰를 받은 이후에 간한다. 신뢰받지 못한 채 간하면 군주는 자신을 비방한다고 여긴다.”


공자는 ‘간언’의 이중성을 통찰하고 있었다. 신뢰받지 못한 사람의 중재와 충고는 오히려 역효과를 낳을 수 있다. 공자는 단지 군주의 ‘오해’를 언급하는데 그쳤으나 사실은 목숨을 잃을 소지가 더 크다. 한비자가 「세난(說難)」에서 말한다.


“군주와 가깝지도 않고 은총도 크지 않은데 대신을 평하면 군주는 군신 사이를 이간하려는 것으로 생각하고, 소신(小臣)을 평하면 군주의 권력을 팔아 아랫사람에게 사적인 은혜를 베풀려는 것으로 생각한다. 군주가 총애하는 자를 평하면 그들의 힘을 빌리려는 것으로 생각하고, 군주가 미워하는 자를 평하면 군주의 속마음을 떠보려는 것으로 생각한다. 유세할 때 거두절미하고 요점만 말하면 지혜가 없는 졸렬한 자로 여기고, 장광설을 늘어놓으면 말만 많은 조잡한 자로 여긴다.


사실을 생략한 채 결론만 말하면 겁이 많아 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자라고 질책하고, 일을 충분히 헤아려 자세히 진술하면 야비한 자가 오만한 모습을 보인다고 질책한다. 그래서 군주에게 간언을 하거나 논의를 하고자 하는 자는 먼저 자신이 과연 군주에게 총애를 받고 있는지 아니면 미움을 받고 있는지부터 살핀 연후에 유세해야 한다. 신하가 간하면서 군주가 아무래도 그만두지 못할 일을 억지로 그만두도록 간하면 곧 목숨이 위태롭다.”

구천, 부차, 오자서, 범려 등.jfif



도대체 어떻게 간언해야 한단 말인가.


군주의 마음에 맞추는 것이 저리 어려우니, 유세에 관한 한 최고의 명문이라 할 수 있는 「세난」의 저자 한비자도 실제로 간언하여 국정에 제대로 적용시킨 사례가 거의 없다. 오히려 동문수학한 이사(李斯)의 질투심 때문에 진시황에게 죽임을 당했다. 사실 그전에 진시황이 한비자의 저서를 보고 ‘이 사람을 한번 만나 보았으면 좋겠다’고 했었다. 하지만 이사는 진시황에게 한비자를 추천한 뒤에 막상 진시황이 한비자를 만나보려 할 때 마음을 바꾼다. 한비자가 진시황을 만나 유세를 하면 이사 자신의 위상이 추락할 것 같은 두려움과 질투심 때문에 한비자를 독살하고 말았다.


그렇게 사람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그에 관한 저서까지 남긴 한비자였건만 그도 간언이나 유세조차 하지 못하고 죽고 만 것이다. 하물며 직선적인 성향을 지닌 오자서야 오죽하겠는가. 오자서는 주군인 부차의 신임을 얻은 후 차분히 설득할 생각을 하지 않고 오직 강력한 충간(忠諫)만으로 설득하려 하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간언은 그 내용보다 형식이 훨씬 중요한 것 같다. 물론 안영은 내용이나 형식 모두 탁월한 간언을 하여 군주를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