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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엽 Jun 25. 2023

당신 굶어 죽을 상이오

장군과 승상에 올랐지만 결국 관상가의 말대로 굶어죽은 주아부 周亞夫

한나라 초기 허부(許負)는 나라 안에 이름을 날리던 관상쟁이였다. 허부가 주아부를 보고 이렇게 말한다.


"그대는 3년 뒤에 후(侯)에 봉해지고, 다시 8년이 지나면 장군과 승상이 되어 큰 권력을 잡을 것이오."


그런데 주아부는 허부의 이 말을 수긍할 수 없었다. 한고조 유방을 도운 개국공신 주발(周勃)의 아들이지만 주아부는 장남이 아니었다. 부친 주발이 세상을 떠나면 장남인 주승지가 작위를 이어받을 것이며 맏아들이 죽더라도 그의 아들이 작위를 이어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주아부가 부친의 작위를 이어받을 가능성이 전무했기 때문에 아무리 당대의 관상가라 해도 허부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이다. 더욱이 허부가


 "부친이 작위를 이어받고 9년이 지나면 굶어죽을 것이요."

라고 했다. 주아부로선 수긍도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의 미래 삶이 그렇게 전개된다면 기절초풍할 일이었다. 그래서 주아부가 허부에게 반박한다.


“당신 말대로 후(侯)가 되고 다시 장군과 승상이 되어 권력을 손에 넣는다면서 어떻게 굶어죽는다는 말씀을 하실 수 있소?”


허부가 주아부의 입을 가리키면서 말한다.


당신 입가의 가로무늬가 입으로 들어가고 있소. 이게 필시 굶어죽을 상일 것이오.


             許負指其口曰: “有從理入口 此餓死法也.”


주아부의 초상화를 아무리 봐도 입가의 가로 무늬기 입으로 들어간 것 같진 않지만, 허부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는가 보다. 하기야 초상화에 그런 액상을 남길 리는 없겠지만.


한문제(漢文帝) 시절 총애를 받던 등통(鄧通)도 허부가 굶어죽을 것이라고 말했는데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그 과정이 참으로 드라마틱했다. 등통은 촉군(蜀郡) 남안( 南安) 사람으로 배를 잘 부려서 선박을 관장하는 황두랑(黃頭郞)이 되었다.


한번은 한문제가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하늘에 오르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잘 안되는데 어떤 황두령(黃頭郞)이 하늘로 밀어 올렸다. 그래서 문제가 뒤돌아보니 황두령의 허리띠 디가 뚫어져 있었다. 잠에서 깨어 점대(漸臺)에 올라가서, 꿈속에서 만난 그 사람을 남몰래 찾았다. 꿈에 본 사람을 은밀히 찾다가, 옷 뒤가 뚫어진 사람을 보았는데 꿈속에서 본 사람이었다. 마침 옷 뒤가 어진 사람을 보고 이름을 물었다.


그래서 문제가 기뻐서 그 사람을 총애하였다. 상금도 몇 만냥 씩 10여 차례 주었고, 벼슬도 상대부(上大夫)에 이르렀다. 하지만 등통은 다른 능력이 별로 없어서 더 이상 현달(顯達)하지 못했다. 그냥 황제의 눈치만 보면서 조심할 뿐이었다. 한번은 문제가 관상가를 불러 등통을 보이니, 그 관상가가 말하기를


"마땅히 가난하여 굶주려 죽을 운명입니다."                         當貧餓死.


문제가 그 말을 듣고 등통을 부자가 되게 하는 것은 문제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호기를 부린다. 그래서 촉나라의 엄도(嚴道)의 구리광산을 하사하여 직접 화폐를 주조하게 한다. 이에 등씨전(鄧氏錢)이 천하에 퍼졌으니 그의 부유함이야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었다.


어느 날 한문제가 등에 종기가 생겼는데, 등통이 자신의 입으로 그 종기를 빨았다.


                                                      上嘗病癰 通爲上嗽吮之.


황제는 악성의 종기를 앓은 적이 있고 등통은 황제를 위하여 입으로 종기를 빨았던 것이다. 다. 때마침 태자가 들어와서 그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태자도 황제의 명령대로 종기릏 압으로 빨았지만  난처한 빛을 보였다. 태자가 훗날 한경제(漢景帝)로 즉위하자마자 곧장 등통을 면직시켜 버렸다. 누가 등통을 고발하였다. 등통이 화폐를 나라 밖으로 유출한다고 관청에 고발되었고, 조정에서 관원에게 조사하도록 명한 뒤 등통의 재산을 몰수하였다. 남의 집에 얹혀 살다가 죽었다.


B.C 158년, 한나라 문제 후원(後元) 6년에 북방 흉노가 대대적으로 국경을 뚫고 침입한다. 문제는 당시 하내(河內)지방 군수였던 주아부를 장군으로 삼아 군사를 이끌고 세류(細柳)에 주둔하도록 하였다. 세류는 한나라 도성 장안 서남쪽에 위치했다. 결국 문제는 주아부에게 도성 외곽 경비 책임을 맡겼던 것이었다. 당시 한문제가 군영을 방문하게 된다. 먼저 패상(覇上)과 극문(棘門)의 군영을 찾았다. 문제는 말을 타고 군영 안으로 들어갔고, 장병들이 나와 문제를 영접했다. 그후 이어서 문제가  주아부가 지휘하는 세류의 군영을 찾았다.


이곳의 분위기는 앞서 방문한 패상과 극문과는 달랐다. 갑옷을 걸치고 날카로운 창을 든 병사들이 황제의 행차를 막아섰다. 절대 군주의 전제체제 하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더욱이 화살을 메긴 병사들은 활을 잔뜩 겨누고 있었다. 물론 성벽의 문도 열리지 않았다. 군중에서는 오로지 장군의 명령만이 통할 뿐이었다. 먼저 부절(符節)능 맞춰본 뒤에야 주아부는 황제를 군영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했다.주아부는 갑옷 입고 투구 쓴 병사는 절을 올리지 않는 법이라며 군대의 예에 따라 황제를 맞았다. 한문제 입장에선 충분히 대노(大怒)할 일이었지만, 오히려 주아부를 격찬한다.


“오호, 이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장군이로다! 앞서 찾았던 패상과 극문의 군영은 어린 아이의 장난 같아서 가만히 공격하여 사로잡을 수 있겠지만,주아부라면 어찌 범할 수 있겠는가!”


“嗟乎,此眞將軍矣! 曩者覇上, 棘門軍, 若兒戱耳, 其將固可襲而虜也. 至於亞夫,可得已犯邪!”


문제의 뒤를 이은 경제는 주아부를 거기장군車騎將軍에 임명했다.


B.C 154년 한나라 경제가 황제의 자리에 오른 지 3년째 되는 해에 거대한 반란이 일어난다. 황제가 임명한 제후국들이 일으킨 반란인데, 오초(吳楚)7국의 난’이라 이른다. 오왕(吳王) 비(濞), 초왕(楚王) 무(戊), 조왕(趙王) 수(遂), 제남왕(濟南王) 벽광(闢光), 치천왕(淄川王) 현(賢), 교서왕(膠西王) 인(印), 교동왕(膠東王) 웅거(雄渠)등이 바로  7제후들이다. 한나라 초기 강력했던 중앙 권력 체제 하에선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지방 제후들의 힘이 강대해지자 어사대부(御史大夫) 조착(晁錯)이 올린‘삭번책(削藩策)’을 한경제가 받아들여 시행한 것이 지방 제후들을 자극하게 된 주요 원인으로 보는 역사학자들의 견해가 있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한문제 때 오(吳)왕의 태자가 조정에 들어가 천자를 뵙고 나서 황태자를 모시고 술을 마시고 바둑을 두었다. 오나라 태자의 스승은 모두 초나라 사람으로서 경박하고 사나웠으며 태자 또한 평소에도 교만하였다.황태자와 바둑을 두는데 길을 다투는 모습이 공손하지 않았다.황태자는 바둑판을 끌어당겨 오나라 태자에게 집어던져 죽이고 말았다.오왕은 이때부터 봉토를 받은 신하로서의 예의를 지키지 않고 병을 핑계로 조정에 들지 않았다.



孝文時,吳太子入見,得侍皇太子飮博.吳太子師傅皆楚人,輕悍,又素驕,博,爭道,不恭,皇太子引博局提吳太子,殺之.……吳王由此消失藩臣之禮,稱病不朝.




제국의 근간을 흔들 수 있었던 오초 7국의 난을 평정하는데 주아부가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그리고 승상에 올랐다. 관상가 허부의 예견에 맞게 전개된다. 이제 굶어죽을 일만 남았다. 장군과 승상에 올랐는데, 굶어 죽는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인생살이 새옹지마라 했던가. 아니면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하던가. 좋은 일에 마가 끼고, 인생에 좋은 일이 생기다가도 우환도 생기는 법이다. 그런데 주아부의 위기는 그야말로 자초한 성격이 강하다. 직언(直言)이 문제였다. 주아부가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고자 그렇게 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의 말이 하나 하나 틀린 말이 없었다. 하지만 충심에서 우런 나온 직언이라고 생각했기에 유연하지 못했다.


겸손했어야 했다. 한경제가 한때 총애했던 율희(栗姬)소생의 태자를 폐위하려고 마음을 굳혔는데, 주아부가 결사 반대했다. 황제가 결정한 사항을 돌리려면 완곡한 표현을 써야 했다. 강경하게 직언하는 주아부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한고조 유방이 태자 유영을 폐위하려 할 때 장량이 직언 대신에 동원공(東園公)과 각리선생(角里先生), 기리계(綺里季), 하황공(夏黃公)과 같은 당대 현인 상산사호(商山四皓)를 대동하여 유방의 의도를 바꾸게 하지 않았던가. 주아부는 그렇게 하지 않고 강경하게 황제에게 직언하니 경제가 이후 주아부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두태후(竇太后)의 미움까지 더해졌다. 두태후의 큰아들이 한경제요, 둘째 아들 유무(劉武)는 제후국 양(梁)의 군주 효왕(孝王)이 되었다. 그런데 이 양효왕이 황제를 조회하러 올 때마다 두태후에게 주아부의 험담을 늘어놓았다. 황후의 오라비 왕신(王信)을 후(侯)에 봉하는 것에도 주아부는 강력하게 반대한다. 투항한 흉노의 왕에게 후 작위를 주는 문제도 또 반대했다. 주아부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황제의 결정 사항에 대해 사사건건 반대한다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주아부가 승상 자리를 그만두고 돌아온 뒤, 그의 아들이 부친의 무덤에 넣을 갑옷과 방패를 5백 개나 구입하여 아버지에게 올렸다. 그것도 관청에서 사사로이 옮겼기에 커다란 문제가 된다. 황제의 총애가 클 때에야 별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황제나 두태후 모두 주아부를 눈엣가시로 보고 있는데, 발생하였으니 간단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무기를 집으로 옮길 때 임금도 제대로 지불하지 않았기에 불만을 품은 자들이 주아부 부자를 모반 혐의로 관청에 고발한다.


황제는 정위(廷尉)에게 명을 내려 다스리게 했다.


정위가 꾸짖어 물었다.

“그대는 모반하려고 하는가?”

주아부가 대답했다.

“내가 병기를 산 것은 다 순장품(殉葬品)인데 어찌 반역을 말하오?”

관리가 받았다.

“그대가 설령 이 땅에서는 모반하지 않는다지만 지하에서는 모반할 게 뻔하오.”



廷尉責曰: "君侯欲反邪?”亞夫曰: “臣所買器,乃葬器也,何謂反邪?”吏曰: “君侯縱不反地上,卽欲反地下耳.”


황제가 주아부를 내치기로 결정하였으니 이런 황당무계한 죄가 형성되는 것이다. 지하에서 반란을 일으키다니 죽은 자가 무슨 반란이란 말인가.


한나라 개국공신 주발에 이어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고 황제를 보필한 주아부가 뛰어난 공적을 세우고도 이렇게 비참한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부인의 만류로 스스로 목숨을 끊지도 못한 주아부는 결국 정위에게 넘겨졌다.그로부터 닷새 동안 곡기를 멀리한 그는 끝내 피를 토하며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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