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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엽 Jun 24. 2023

딱 믿고 있심더

가족들이 모두 외출하고 난 뒤 저 혼자 집에 남았습니다. 청량한 초여름 날씨 기분도 상쾌합니다. 쓰레기 분리 수거하고 음식물 쓰레기도 함께 버립니다. 마침 재활용쓰레기를 정리하던 경비원 분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눕니다. 혹시나 그분들이 하고픈 말이 있을까. 잠시 그 자리에 머물렀습니다. 수고하십니다, 감사합니다 같은 의례적인 인사가 오가고 나서 한참이나 지나도 그분들이 제 눈치만 보는 듯하여 제가 먼저 자리를 뜨려고 돌아섭니다. 그때 나이가 제일 많은 할아버지 경비원께서 



"늘 고맙심더. 아파트 동대표자회의 대표들이 나이 많은 경비원을 짜른다고 할 때 나서서 우리를 지켜주신 거 진짜 안 이자뿝니다. 참말로 고맙심더. 우린 6개월 전부터 나가야 한다고 각오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고 기다렸다 아입니꺼. 한 사람은 매일 저녁 수면제를 먹고 견뎠지요. 그 사람 경비원 연장 근무 계약하고 얼굴에 화색이 가득합니다. 정말 고맙심더. 우리 경비원 모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심더."


"인자 그런 말씀 고만 하셔도 됩니다. 저 혼자 결정하는 것도 아니고 대표자들 회의에서 결정한 것이니 저 혼자 공치사 받는 것은 좀 그렇습니다. 자꾸 만날 때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에게 부담이 됩니다. 지금처럼 건강하게 근무하시는 것만 봐도 보기 좋습니다."


"작년 대표자회의에서 나이 많은 경비원들 내보내기로 결정되었는데, 그때 관리소장께서 시행하지 않다가 몇 달 전까지 왔지요. 그때 들어오셔서 아주 쎄게 저희들 입장을 말씀해 주신 거 우리 다 압니다. 아마 아파트 주민들도 대부분 알고 계실 겁니다. 어려운 사람들 사정을 누구보다 잘 헤아려 주시는 거 우리가 고맙지예. 앞으로도 딱 믿고 있심더."


10여 년 우리 아파트에서 열심히 근무하신 이분은 주민들의 신망이 매우 높습니다. 주민들이 수시로 경비실로 먹을 것을 가져다 주면서 감사인사하는 것을 수없이 목격했지요. 가족인 것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재활용쓰레기 분리 작업하는데 곁에서 조금 거들며 그분들의 애로를 들었습니다. 처음엔 심중을 드러내지 않다가 한 분 두 분 말씀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한 분께서는 이야기를 열심히 하다가 손녀 사진도 보여주십니다. 제가 보기엔 그냥 평범한 아이 사진인데 그분께는 세상에서 최고 예쁜 손녀인 것 같습니다. 


"우리 손녀 이쁘지예. 어린이집 재롱잔치 하는 거를 며느리가 찍어 보내서 매일 이거 보는 재미로 삽니다."


"아이구, 손녀가 진짜 이쁘네요. 행복하시겠습니다."


제가 손녀 예쁘다고 말씀드리니 이분 더욱 신이 나셔서 손녀의 근황을 장황하게 전해 줍니다. 다른 경비원들은 조금 싫은 표정을 지었지만, 저는 이분 곁에 바싹 붙어서 말을 들어주었지요. 조금 있으니 다른 분들이 자신의 현재 삶에 대해 이야기를 해줍니다. 월급 받아가면 사모님께서 30만원만 딱 떼서 준답니다. 나머진 살림 비용이라 합니다. 그래서 그 돈으로 한 달 생활 가능하시냐고 물었더니 노령연금인가 국민연금인가가 한 20만원 나오기 때문에 생활에 큰 어려움이 없다고 이 아파트 주민들께 진짜 고마운 마음이라 합니다.


젊은 시절 사업하느라고 하루 저녁 술값을 얼마를 쓰면서 호기 부린 이야기도 들려주십니다. 결국 사업이 망해서 사모님께 죄인 같은 심정으로 살아가고 있는데. 이렇게 월급이라도 받아서 집에 갖다 줄 수 있어서 다행이라면서 너털웃음을 짓습니다. 70대 초반에 이렇게 좋은 일자리가 어디 있냐면서 저를 보고 시원한 말투로 말씀하십니다. ㅎㅎ.


그 순간 차 안에 있던 떡이 생각났습니다. 오후에 지역 문화원의 "동양고전 함께 읽기-사기열전" 강의에 수강생 몇 분이 떡이랑 음료수들을 사와서 먹고 남은 것이 있었지요. 그래서 차에서 떡과 마실 것을 가져다 경비원 분들께 드렸습니다. 황송해하시면서도 기꺼이 받아주셔서 좋았습니다. 지역 시니어들이 동양고전 함께 읽기를 해낼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의외로 적극적으로 참여해주셔서 저도 정말 좋았지요. 


하반기엔 "논어(論語)"를 함께 읽으까 합니다. 저의 일방적인 강독이 아니라 적은 분량의 텍스트를 읽고 참여 수강생들이 고루 고루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말하게 하기 때문에 2시간이 금방 지나가버립니다. 지역 내 시니어 대상 강의는 두 시간 에 10분 휴식은 필수인데, 이분들 이야기하시느라 쉬는 시간도 없이 자신의 생각을 기탄없이 털어놓습니다. 저 또한 리엑션이 상당히 크고 칭찬을 많이 해드립니다. 그래서인지 만족도가 상당히 높습니다. 



경비원 분들께 떡과 음료수를 다 드리고 돌아오면서 수고하시라고 인사를 드립니다. 경비원 분들의 얼굴이 한층 밝아져 있습니다. 얼마 안 되는 월급이지만 저렇게 감사해하시니 저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추신:


경비원 분들과 대화를 나누는 도중에 한 분께서 저에게 중국산 라면을 드실 거냐고 물었습니다. 왜 그러시냐고 했더니, 경비실로 중국산 라면이 두 박스가 왔는데, 아무도 먹지 않으려 한답니다. 중국산 라면 맛이 별로라네요. 저야 평소에 라면을 별로 좋아하지 않기에 중국산 라면이 썩 반갑지 않았지요.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그러지 마시고 댁에 가셔서 사모님과 함께 드시면 안 되겠습니다."


"에에이~. 저도 중국산 라면 맛없어서 안 묵심더."


저도 모르게 빵 터졌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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