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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엽 Jun 26. 2023

우리 너무 오래 살았네

6.26 결혼 35주년 날 맞아-일본 벳푸만 휴게소에서

새벽에 눈을 떴습니다. 주말에 무리해서 책을 여러 권 읽어 피곤했던가 봅니다. 다른 날엔 아침에 일어나면 몸과 마음이 개운했지만 오늘은 약간 무겁습니다. 창밖을 보니 빗물이 타고 내립니다. 밤새 비가 내렸던 모양입니다. 안개도 자욱하니 시계 거리가 상당히 짧습니다. 책상에 앉아 잠시 생각해 봅니다. 오늘 하루 일정도 파악하면서 어제 읽었던 책 서평도 준비하려 합니다. 아내 아침 식사는 아직 시간이 덜 되었지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오늘 결혼 35주년이네요. 마침 출근 준비하는 딸 아이에게 저녁에 퇴근할 때 케익 하나 사오라고 했더니 오늘 무슨 날이냐고 물어옵니다. 


"예쁜 딸 오늘 옷도 이쁘네. 있잖아 오늘 엄마 아빠 결혼 35주년이다. 그래서 저녁에 다들 모이면 간단히 축하 노래를 불러야 하지 않겠나. 느그 엄마한테는 아빠가 봉투라도 준비해서 돈을 좀 넣어 전하마. 너희들은 월급 받아도 생활비가 빠듯할 테니 이번엔 내가 준비할게."


딸 아이가 "예!"하고 출근길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아내가 일어나 아침 식사하고 출근 준비한 다음에 차에 올라탑니다. 아내가 가지고 갈 가방은 제가 미리 들고 내려가 차안에서 대기하고 있었지요. 비가 오는 날이면 아내 몸 상태가 좋지 않은데, 오늘은 기분이 괜찮은가 봅니다. 아파트 1층 현관을 나오는데 바람이 갑자기 불어서 아내 머리가 날립니다. 그러자,


"아이고, 머리카락도 별로 없는데 바람이 이렇게 불면 우짜노. 스타일 다 망가지네."


제가 그랬지요. 


"괜찮다. 차안에서 잠시 손보면 원체 이쁜 얼굴이라 금방 돌아올끼다. 어제 밤에 다리가 좀 부었던데 지금 괜찮제. 함 보자. 많이 가라앉았네. 장기간 병원 약을 먹어서 후유증이 아닐까 싶네. 신장이 좋지 않으면 붓는다고 하는데, 장기간 복용한 약이 신장에 무리를 준 것은 아닐까 몰라."


"인제 당신이 반 의사가 되었네. 좀 가라앉아서 다행인가 싶어."


"내가 의사 흉내 내다가 잘못하면 반풍수 집안 망한다고 어설픈 목수 대들보 무너질지 몰라. 잘 모르면 그냥 의사한테 문의해야 하겠지."


그렇게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제가 말했습니다. 


"지금까지 나와 이렇게 오래 살아주어 감사합니다. 더 이상 아프지 않고 살았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아내 손을 살짝 잡았습니다. 제가 평소에도 아내 손을 잘 잡습니다. 아내도 자연스럽게 저를 바라보면서 손을 잡아줍니다. 그러면서 아내가, 


"우리가 서울 올림픽할 때 결혼했나. 올림픽 전이지. 벌써 35년이면 우리 너무 오래 살았네."


둘이 너무 오래 살았다는 말에 동시에 빵 터집니다. 제 나이 스물 여덟, 아내 스물 넷에 결혼했을 때가 1988년 6월 26일입니다. 정확하게 35년이 되었습니다. 신혼여행 후 처가에 들렀다가 나올 때 한복을 곱게 입은 아내가 눈물을 쏟았던 일이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경북 상주 이안 흑암1리(모산) 친정에서 처가 식구들의 배웅을 받고 함창역까지 가서 무궁화 열차에 올라 친정집 동네가 스쳐가자 아내가 눈물을 흘린 것이지요. 친정에 자주 못오고 집을 떠나는 것에 대한 회한때문이겠지요. 아내는 지금도 예쁘지만 젊은 날엔 진짜 예뻤습니다. 결혼 1년 전에 장인 어른과 시외 전화를 하면서 결혼하고 싶다는 말을 드렸을 때 장인 어른께서, 


"우리 아~가 나이가 너무 어리네. 좀더 있다가 하면 좋겠는데."


라며 완곡하게 거절하였지요. 다행히도 장모님께서 저를 전폭적으로 밀어주셔서 어린 나이에 그렇게 결혼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처가 1남 6녀 중에 저희 집 경제 형편이 가장 좋지 못했는데, 장모님께서 사람 하나 딱 보고 딸 보낸다고 하셨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실제로 처가에서 저희 집에 유난히 신경을 많이 써주셨습니다. 해마다 쌀가마를 가득 보내 주셨고 시골에서 나오는 온갖 곡식을 매년 보내주셨지요. 특히 아이들 건강식으로 9곡 미숫가루를 보내주셔서 매년 우리 아이들이 더욱 건강하게 자랄 수 있었습니다. 장모님께서 점촌 시장까지 가셔서 부산 손주들 먹일 것이라고 정성껏 준비해주셨습니다. 아이들이 약한 몸으로 태어났는데, 해마다 장모님께서 보내신 9곡 미숫가루 덕분에 무럭무럭 자랐습니다. 그후에도 장모님께서 가끔 우리집에 오셔서 1주일 정도 계시면서 우리집 3남매를 보며 정말 즐거워하셨습니다. 지금이야 두 분 돌아가셔서 참으로 안타깝지만 살아 생전 베풀어주신 은혜를 절대 잊지 않으려 합니다. 대신 아내에게 전력을 다해 보답하려고 합니다. 


결혼 35주년이 되었으니 아내 말처럼 참 오래 함께 살았네요. 앞으로도 더욱 행복하게 살아가려면 아내의 건강이 정말 중요하겠지요. 제가 지금까지 잘 못해 준 것을 생각하면서 앞으로 최선을 다해 아내를 챙겨야 할 것 같습니다. 


아내가 차에서 내려 근무처 건물로 걸어들어가는 뒷 모습이 예쁩니다. 제가 말을 건넵니다. 


"오후 5시 30분에 대기하겠습니다. 그때 만나요. 그리고 당신 오늘도 예쁘네."



*추신: 저녁에 딸 아이 퇴근하고 아내랑 셋이서 케이크를 놓고 결혼 35주년 기념 행사를 정말 조촐하게 하였습니다. 아직도 축하 노래는 어색합니다. 아내에게 봉투에 돈을 좀 넣어 주면서 지금껏 정말 고생도 많았고, 이렇게 함께 살아줘서 진짜 고맙다고 인사했습니다. 아내도 어색해하기 마찬가지입니다. 그 돈은 아내가 혼자 자 썼으면 좋겠다고 했지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큰아들 갑자기 약속이 생겨 귀가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아들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건가요.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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