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길엽 Jul 31. 2023

여름 날 기억 하나

국민학교 5학년 즈음에 있었던 기억이 하나 떠오릅니다. 동네 형님들이 경운기를 두 대나 동원하여 흘러가는 시냇물을 완전히 퍼냅니다.


시냇물 줄기를 약 10m 정도를 끊어 양쪽을 막아버립니다. 그리고 끊긴 물줄기를 휘게 만들어 흘러가게 합니다. 그리고 양수기에 연결한 대형 호스를 물 속에 담급니다. 경운기 두 대가 쉼없이 돌아가면 3~4시간 정도 되면 바닥 윤곽이 서서히 드러납니다. 물줄기를 막은 두렁이 행여 터질까 봐 열심히 손바닥으로 물을 섞은 흙을 돋아올립니다. 매끈하게 바르기도 하지만 그래도 시간이 지니면 이곳 저곳 구멍이 생겨나니 신경을 써야 합니다. 만에 하나 윗 두렁이 터지만 지금껏 물을 펴낸 것이 무의미해지거든요.


그렇게 경운기에 연결된 양수기가 열심히 물을 퍼올리면 형님들이 저에게 심부름을 시킵니다. 왜 그 자리에 저 혼자 있었는지, 왜 형들이 굳이 저에게만 시켰는지 잘 모릅니다. 동네 근처 저지대에 고인 물을 당시엔 우리가 늪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렇다고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발이 질퍽 절퍽 빠져서 거동이 불편한 그런 늪은 아니었습니다. 아마 호소(湖沼)라고 하는 것이 적합하겠네요. 그냥 저지대에 물이 모여 들었던 곳이라 겨울에 동네 아이들이 얼음을 지치기도 한 놀이 공간이었습니다. 그 호소로 들어가는 물줄기 어느 곳을 절단하고 양쪽 두렁을 판 형국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우리 동네까지 약 500m 정도 되는데 왕복 1km 가량 되었지요. 두 되 짜리 약간 누런색 막걸리 주전자였는데 국민학교 5학년이 양 손에 들고오는 것이 조금은 불편할 수 있었습니다. 제 성격이 무던한 탓에 동네 형들이 뭔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말을 잘 들었던 모양입니다. 지금도 고향 마을 회관에 들르면 80대를 바라보는 형님들이 그때 그 시절 추억을 떠올리며 함께 폭소를 터뜨리기도 합니다.


가끔 지인들과 만나 그 시절 술 주전자 심부름 이야기를 꺼내면 희한한 에피소드가 나옵니다. 술 심부름을 할 때 한 입씩 마신 것은 다반사고, 좀 많이 마셔서 표가 나면 물을 섞어 양을 채운 에피소드도 들려줍니다. 전 그 당시 그런 것은 상상도 못해 봤습니다. 그냥 형들이 시킨 대로 부지런히 걸어서 온전히 가져다 주었지요. 술 주당들인 형들이 제가 가져온 주전자에서 술잔에 막걸리를 따라 마시면 중간에 속였는지 아닌지 대번에 알 수 있었겠지요. 단 한번도 그것을 속인 적이 없기에 형들이 저에게 심부름을 시켰던 것 같습니다. 아니면 다른 아이들이 심부름 하기 싫어 도망치기도 했겠지요. 최근에도 마을에 들러 형님들과 둘러앉아 추억의 그 시간을 떠올리면 형님들이,


"자네는 참 착했지. 성격도 무던하고 뭐든 시키면 시키는 대로 말을 잘 들었지. 그래서 우리가 동생 자네를 믿고 그런 심부름을 시켰을 거야. 다른 놈들은 심부름 시킬 상황이 되면 미리 눈치채고 달아나 버리기도 했지. 그러면 심부름 시킬 사람이 동생 자네밖에 안 보였지. ㅎㅎ."


물을 퍼내면 바닥에 온통 물고기들만 가득합니다. 바케스에 그냥 퍼담기만 하면 됩니다. 잔챙이들은 다시 보내줍니다. 그리고 논바닥에서 민물고기 매운탕을 진하게 끓입니다. 정말 맛이 좋았지요.



경운기 옆에 자리를 깔고 막걸리를 마시기 시작합니다. 며칠 전에 잡은 물고기로 매운탕을 끓인 것이 남았는데 남은 것을 술안주로 해서 막걸리를 맛있게 마시더군요. 저에게도 막걸리를 마셔보라고 권하기에 저도 좀 마신 기억이 있지만 많이는 안 마셨습니다. 한번은 그런 술 심부름을 두 번 시킨 적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다시 심부름을 다녀 왔습니다. 저도 그렇게 오가는 것에 큰 불만이 없었습니다. 그냥 형들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지요. 그렇게 해야 하는 줄 알았습니다.


여름날 추억이 경운기, 양수기, 대형 호스, 물줄기, 바케스, 두렁 등으로 대변된다면 겨울엔 유난히 결혼식 잔치 음식 심부름이 많았습니다. 당시엔 마당에서 결혼식이 거행되었고, 신랑 신부가 신혼여행을 떠나면 그날부터 3일간 손님들 음식 대접이 관례처럼 벌어졌습니다. 결혼식 집 마당엔 동네 각각 집에서 가져온 각종 상들이 차곡차곡 쌓였고, 아지매들과 형수님들이 부지런히 음식을 장만하였습니다. 남정네들은 어느 집 사랑방에 모여 누군가를 시켜 가져온 술과 음식을 배불리 먹었지요. 아재들 음식 심부름은 별로 기억이 없고 동네 형님들이 결혼식 당사자 집에서 불과 20여 미터 정도 떨어진 집 사랑방에 대거 모여 저에게 심부름을 시켰지요.


저 혼자 그 심부름하는 것이 여간 바쁘지 않습니다. 형수님들도 형님들이 시킨 것을 알고 있기에 찌짐을 가득 담아줍니다. 두 되 짜리 술 주전자는 필수입니다. 먼저 술을 양쪽에 들고 와서 형님들에게 전달하고 다시 안주를 받으러 갑니다. 그런데 술 안주를 갖고 그곳에 가면 이미 술은 동난 상태가 됩니다. 안주용 찌짐은 없어지는 속도가 비교적 느린데 술이 줄어드는 속도는 매우 빠릅니다.  또 갑니다. 형수님들이 술을 내 주면서 오히려 저를 짠하게 바라봅니다.


"디럼, 심부름 그만 하이소. 먹고 싶으면 형님들이 와서 직접 가져가라 카소. 디럼 혼자서 그 많은 형님들 술캉 안주 찌짐을 왔다리 갔다리 하는 기 영 안 되 보입니더. 요것만 갖다주고 집에 갔뿌이소. 알았지요 디럼."


저는 아무 말도 않고 그냥 술과 안주를 받아들고 섰습니다. 두 손 위에 가득 놓이면 그대로 형님들에게 가져다 줍니다. 그런 날들이 진짜 많았습니다. 겨울 결혼식 음식 심부름 때도 우리 동네 아이들이 도대체 어딜 갔는지 아무도 없었지요. 동네 집안 결혼식이 있어서 대구에 올라가 그 사연을 털어놓으면 우리 또래들이 저를 보고


"니가 공부만 잘 했지, 다른 것은 영 몰라서 그렇게 형들이 심부름 시킨 거 아이가. 어찌 보면 니가 착한 기고, 어찌 보면 니가 좀 바보 같고, 그랬다 아이가. 학교 공부는 니가 잘 했는데 어딜 내빼지는 못 했지. 우린 그때 형들이 시켜도 그냥 도망 갔뿠다 아이가. 니도 그땐 잘 몰랐제. 우리가 00집 담 너머로 보니까 그 추운 겨울 날 니 혼자 열심히 술 심부름 하대. 한번도 불평도 하지 않고 그랬지."


만약에 당시 심부름할 때 어머니께 일렀다면 동네 그 형들 엄청나게 혼났을 겁니다. 오늘 불현듯 그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그래도 부모는 자식 걱정이지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