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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엽 Jul 31. 2023

음식 때문이 아니라 이야기 상대가 되어 주니 고맙지요

오늘 낮 정말 더웠지요. 사전에 약속된 지역 문화도시센터 라운드 테이블을 진행해야 해서 상당히 힘들었습니다. 평균 연령 80대 노년 세대가 모이는 사랑방에서 회의를 진행하는데, 에어콘도 없이 선풍기 바람으로 이 폭염을 도저히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마을 동아리에서 여섯 분이 참여하시고, 지역 주민들 다섯 분이 오셨습니다. 요구르트 세트가 2900원 짜리 세트를 세 개 사고 아이스크림 메로나를 열 다섯 개를 샀습니다. 사비로 마련했습니다.


오늘 라운드테이블은 2차 회의였는데, 지난 번에는 12명 정도 노인분들이 두 시간 정도 긴 시간에도 앉아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아이스크림과 요구르트를 받아 드시자마자 덥다고 모두 자리를 떴습니다. 노인 분들의 의견 청취가 매우 중요한데 가장 중요한 분들이 덥다고 나가시니 난감했습니다.


비교적 나이가 젊은 동아리 분들은 더운 날에 이렇게 참여하려니 여간 고통스럽지 않은가 봅니다. 저야 의무적으로 자리를 지켜야 하니 어쩔 수 없다지만 이분들은 이 더운 날에 에어콘이 없이 선풍기로 이겨내기가 쉽지 않았겠지요. 한 분은 숨을 쉴 수가 없다고 하소연합니다. 가까운 카페로 장소를 옮기면 안 되느냐고 합니다. 오늘 여기는 진행하는 저도 참여한 동아리 분들도 주인공이 아니라 노인 분들이 진짜 주인공입니다. 저분들은 자리를 옮겨 카페로 옮기면 참석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이곳 사랑방은 평탄한 길이라 쉽게 올 수 있지만 카페는 가파른 길로 내려가야 하기 때문이이죠. 그래서 예정보다 빨리 마치기로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제서야 젊은 동아리 분들이 호응하는 눈치를 보입니다. 그 대신에 각자의 의견을 간단하게 발표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오늘 회의 주제가 바로 "노후를 행복하게 보내려면~"이라서 각자가 생각하는 노후 행복 방법을 들려 달라고 했습니다.


빨리 마치고 싶은 마음이 있었겠지만 그래도 열심히 각자의 의견을 내주십니다. 경제적 여유 또는 자립, 오랜 시간에 누릴 수 있는 취미, 부부가 함께 하는 여행, 이웃을 위해 행하는 의미있고 재미있는 활동, 시낭송 활동, 건강식품을 마음껏 먹는 것, 꾸준한 운동 등등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각자의 동아리 활동도 소개해 주셨지요. 막상 발표를 이어나가자 시간이 가는 줄 모르더군요. 그런데 70대 중반 여성분께서 한 마디 하십니다.


"여러분, 진짜 노인 세대 연령이 몇 살인지 아시나요? 지금 여러분들이 말씀하시는 노인은 아마 60대 70대 분들을 말할 겁니다. 여기 오시는 분들은 평균 80대 중반이고 90대도 수두룩합니다. 이분들은 지금 여러분들이 말씀하신 조건들과는 전혀 관계 없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 하루 어떻게 보내지 하는 걱정과 고민을 안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루 하루 살아나가야 하는 삶이 그들 앞에 놓여 있거든요. 그래서 여러분들께서 제시하는 노후 행복 조건도 이분들에게는 진짜 엄청난 사치에 불과하거든요.



이분들은 노래 한 곡만 온전히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이 큰 행복이 된답니다. 어딜 갈 데도 없고, 갈 수도 없고 그냥 골목에 나와 평상에 둘러 앉아 하루 좋일 멍하니 지나가는 사람만 쳐다 보다가 저녁 때가 되면 그냥 발을 끌고 집으로 들어가 저녁을 먹고 TV를 보다가 잠이 듭니다. 그런 날들이 이어지는 이분들의 현실에서는 여러분들께서 말씀하신 조건들은 아예 생각할 수도 없답니다.


누군가 한번씩 찾아와서 손이라도 잡아주고 말동무가 되어 주는 것이 이분들에게 큰 행복이고 기쁨이랍니다. 오늘 이렇게 더운 날에 이곳을 찾아 준 여러분들께 주제 넘은 말씀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너그러이 이해해 주세요."


가장 나이 어린 참여자는 보육교사로 00어린이집에 근무하는 여성인데 다른 사람들의 발표를 듣고 많이 배웠다고 고백합니다. 자신은 아직 20대라 노후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았지만, 가끔 시니어분들과 어린이집 아이들이 만날 때 시니어분들이 유난히 기뻐하던 것을 기억한다고 소개하셨지요. 그런 단순한 것들이 오히려 큰 행복일 것 같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폭염 때문에 힘들 것 같았고, 선풍기만 놓인 공간의 열악함 때문에 참석자들의 고통이 클 것 같았는데, 의외로 발표자들이 긴 시간 잘 해주었습니다.


다음에도 이런 기회를 많이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의견도 나왔습니다. 그렇게 라운드 테이블 2차 회의도 의미있게 마무리짓고 일어섰습니다 뒤늦게 아이스크림을 받은 분은 더위로 녹아내리는 바람에 휴지로 열심히 닦는 해프닝도 겪었습니다. 그렇게 어떻게 어떻게 회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다른 동네 가서 어르신들 노후 행복을 논하다가 정작 우리 아파트엔 소홀한 것이 신경이 쓰여 가까운 마트에서 '메로나 아이스크림'을 가득 사서 아파트 노인정에 들렀습니다. 다들 열심히 고스톱을 치시다가 저를 반겨줍니다.


빈손으로 오지 않고 올 때마다 뭐든 들고 오느냐고 가볍게 타박하시다가 제가 하나씩 드리니까 큰소리로 감사합니다라고 하시며 환한 웃음을 보이십니다. 나머지는 냉동고에 담아 두었으니 또 심심하면 드시라고 했지요. 잠깐 앉으라고 해서 곁에 앉았더니 하루 내내 심심했던가 봅니다. 하루 종일 이 노인정에서 시원한 에어컨 바람에 기분 좋게 고스톱만 쳤을 텐데로 하고픈 말이 많았던가 봅니다. 제가 자리를 뜰까 봐 그랬는지 다들 말이 상당히 빠릅니다. 제가 천천히 말씀하셔도 된다고 하니 그제서야 말의 속도를 늦춥니다. 어느 분께서


"선생님이 우리를 이렇게 잘 해주는데 고향 마을에 가면 그쪽에도 잘 하시지요. 그럴 것 같아요. 맞지요?"


그래서 예전엔 제 고향 마을에 갈 때는 생선회 박스와 연양갱 박스 유부초밥 그리고 음료수 등을 가득 싣고 가서 인사를 드렸는데 코로나 이후론 아직 인사를 드리지 못했다고 솔직히 말했지요. 가지고 간 음식을 나눠 드시며 저에게 정말 고마워하시던 동네 아지매들 형수님들 이야기를 들려 드리니, 한분께서


"그분들이 그렇게 고마워 하는 이유는 음식 때문이 아니라 이야기 상대가 되어 주기 때문에 고마운 거지요. 음식도 중요하긴 하지요. 그런데 여기 도시처럼 편안하지 않은 시골에서 누구 하나 찾아오는 사람 하나 없는데 그래도 잊지 않고 찾아와 이야기도 나누고 들어주니 얼마나 고맙겠능교? 안 그렁교? 필시 그럴 낍니더. 지금 여기도 아무도 안 와 보는데 오늘 같이 이렇게 아이스크림도 사오시고, 우리들과 이야기를 섞어 주이 얼마나 고맙겠능교?"


제가 이분들께 무슨 감사 인사를 들으려고 들른 것이 결코 아닌데 이렇게 고마워하시니 자주 들여다 봐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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