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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엽 Aug 18. 2023

버려진 담배 꽁초도 돈이었지요

80대 중반의 할머니가 우리 앞에서 당신의 삶에 대해 담담하게 털어놓습니다. 어떨 때는 자신도 모르게 울분이 터져나오기도 합니다. 잉꼬 부부로 남부러운 줄 몰랐던 신혼 생활이었는데, 어느 날 남편이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신 날부터 세상에 홀로 남겨진 것이지요. 아이들 올망졸망 쳐다보는 것이 얼마나 기가차던지 말도 안 나오고 그랬지요. 도대체 손에 든 것이 아무 것도 없으니 '죽음'만 떠올렸답니다. 급한 마음에 장사를 치르자마자 친정으로 아이들을 앞장세우고 들어갔더니, 친정 아버지는 양반 집안 사람으로 시집 간 몸이 어떻게 친정에 들어서느냐고 호통이나 치고 매몰차게 쫓아내던 날 그렇게 돌아나오던 순간을 떠올리면서 눈물을 왈칵 쏟았습니다. 그놈의 양반 가문이 무슨 소용인가요. 그날부터 친정엔 발길을 들이지 않겠노라고 정말 단단히 마음을 먹고 셋방으로 오는데 서러움도 서러움도 왜 그리 서럽던지 정말 힘들었답니다. 


처녀 시절엔 유복한 가정에서 어려움이 없이 자랐지만, 달콤한 신혼 생활도 순식간에 지나가고 남편의 사망 이후 지금까지 손에 일을 놓아본 적이 없었습니다. 일제시대부터 6.25를 거쳐 새마을 운동 등에 대해 아주 상세하고도 구체적으로 겪었던 당신의 삶을 들려주십니다. 지난한 세월이었고, 그야말로 죽지 못해 산 인생이었습니다. 청상과부라고 주위에서 손가락질하는 것을 모르진 않았지만, 남의 시선 따위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당장 내 새끼들이 길바닥에 내다앉을 것 같았고, 한 끼도 못 먹고 죽을 판이니 남의 시선이 그 뭣이라고 의식할 수 있었을까요. 갓난 애를 들쳐 없고 시장터에 나가 구석에서 물건을 팔았고, 아이는 배고프다고 얼마나 크게 울던지, 아이 울면 자신도 모르게 서러움으로 남들이 보기나 말거나 함께 울음이 터져나왔습니다. 세상에 자기를 도와 줄 사람이 어떻게 한 사람도 없나 하는 지독한 외로움을 처절하게 겪으면서 그렇세 한 많은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더. 당시에 길에서 담배꽁초가 돈이 되던 시절입니더. 피다 남은 담배꽁초를 풀어서 모아 가져 가면 그게 생각보다 꽤 돈이 되었거든요. 갓난애를 들쳐 업고 할 수 있는 일이었지요. 주위 사람들이 새댁이 저런 거 한다고 말도 많았지요. 그래도 꾹 참고 열심히 꽁초를 줍고 집에 와서 밤새 풀어 모았지요. 아이들 하루 땟거리는 충분했어요. 하기야 그것만 했겠능교. 당시 우리 동네는 피난 온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 사람들도 내캉 마찬가지로 진짜 고생 마이 했지요. 그렇게 여~서 함께 살며 친구가 되고 계도 하며 재미나게 살았는데, 한 사람 한 사람 저 세상으로 가더이 어느 날엔 이 주위에 친구가 없다 아인교? 하기사 내가 이만큼 나이 먹었는데 지금까지 살은 기 어디요. 당연히 친구가 없는 기지 안 그래요. 우리집 아~들은 저 고생한 거 이야기 하믄 '또 그 이야기냐'고 타박을 그리 줍니다. 좀 들어주만 어디 병나요. 그래요 선생님들은 이렇게 긴 시간 이 철없는 노인네 말을 좋게 들어주이 참말로 고맙심더. 진짜 복받을 낍니더."


80대 중반이 된 당신의 삶에서 어디 편할 날이 있었겠습니까만 '담배꽁초'를 주워 돈을 만들었다는 말은 저도 처음 들었습니다. 하기야 저만 해도 근대화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던 시절에 농촌에서 태어났으니 이분처럼 배곯을 일은 거의 없었지요. 농촌 시골은 산이나 들판에 먹거리가 꽤 많았지요. 물론 남이 농사지은 것을 서리한 적도 많았고요. 지금 생각해 보면 먹을 것이 별로 없던 세상에 아이들이 '서리'하는 것을 어른들끼리 적당히 표 안나게 묵인했던 분위기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노년세대들이 그렇게 고생 고생하여 만들어 놓은 살기 좋은 세상을 우리가 누리며 살아갑니다. 그분들이 가끔 젊은 사람들을 잡아놓고 무슨 말씀을 좀 길게 해도 넉넉한 마음으로 들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젊은 날 죽도록 고생하고 이제 좀 편해지려 하면 주위 사람들이 다 사라져간 현실이 통탄할 지경이니 젊은 세대들이 그분들의 하소연을 조금이라도 편안하게 들어주면 좋지 않을까 다시 생각해 봄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반드시 이분 연령대의 고령 노인이 됩니다. 그것이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실제 미래 모습입니다. 


"나이가 들면 입은 닫고, 지갑은 열어라."라고 흔히 말하지요. 물론 나이가 들어서 인색하지 말고 베풀어라라는 것에 방점이 있겠지요. 그런데 이 말도 따지고 보면 참 고약한 뉘앙스를 풍깁니다. 나이 먹었으면 입은 그냥 다물고 돈이나 내놓아라라는 뉘앙스 말이지요. 그렇게 하지 말고 지갑을 열었으면 그에 걸맞게 말씀도 충분히 할 수 있도록 기회를 드리고 진정성있게 들어주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새파란 과부가 갓난애를 들쳐 없고 '담배꽁초'를 주워가며 자식들을 먹여 살리려 진짜 고생했던 그분들의 노력을 외면하지 않으면 합니다. 



P.S

양반 가문 하니 생각나는 일이 있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돌아가신 분인데 안동김씨 양반 가문의 뼈대 있는 집안 출신이라고 얼마나 으스대던지 진짜 꼴불견이었습니다. 함께 오신 부인께 얼마나 막대하던지, 주위 사람들보고 양반 집안 출신이 아니니 도대체 예의를 제대로 배웠는지 하면서 은근하게 무시하더군요. 하기야 저는 양반 집안 출신이 아니라 할 말도 없었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다 싶어 듣고 있다가 한 마디 했지요. 


"선배님 여기 와서 그런 안동김씨 양반이니 마니 하는 말씀은 자제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제가 조선 시대 역사에 접해 보니 진짜 양반은 부인에게 절대 하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랫사람들 특히 종들에게도 그렇게 막 대하지 않고 점잖했대요. 더욱 부인에게는 정말 말씀을 조심하고 존중했답니다. 그런데 선배님은 우리들 앞에서 사모님에 말도 놓고, 우리들을 막 무시하시니 진짜 양반 가문 출신이 아닌 것 같아요. 우리 역사에서 진짜 양반 족보가 많이 없다고 하던데, 혹시 모르지요. 안동김씨 족보에 억지로 들이밀었는지 말이지요. 앞으로 우리 앞에선 시대착오적인 양반 말씀은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들이 진짜 불편해요."


 그 선배님과는 상당 기간 대화가 없었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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