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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엽 Aug 28. 2023

나이가 들면 퇴직한 남편이 밥해야

뭘 밥을 기다리고 그래. 그냥 혼자 해먹을 생각 안 하고

강원도 원주에서 1박 2일 하면서 그 많은 사람이 펜션에서 저녁을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가운데 한 친구가 처음부터 끝까지 설거지를 하였습니다. 스무 명 가까운 대군이  모였습니다. 마당에선 또 다른 친구가 고기를 굽고, 다른 이들은 특산 막걸리를 앞에 놓고 술잔을 나누며 담소를 즐기면서 계곡 여름밤을 즐겼습니다. 연이어 터져나오는 폭소가 그 순간 우리의 만남을 즐겁고 행복하게 장식하였지요. 그 와중에 잠깐 화장실에 다녀오려고 부엌 싱크대를 지나가는데, 한 친구가 그냥 앞만 보고 열심히 설거지하고 있더군요. 싱크대에 빈 그릇이 그야말로 산만큼 쌓여 있었습니다. 그냥 지나치기 미안해서


"야 00아 이 많은 거 설거지한다고 고생 많네. 내가 좀 도울까."

라고 했더니, 그제서야 그 친구가 뒤돌아보며 씩 미소를 짓습니다. 그리고

"괜찮다. 내가 매일 하는 긴데 뭐. 조금만 하면 된다. 괜찮다."

라고 답합니다.


학창 시절에도 같은 동기지만 늘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급이 다른 언행을 보여 준 친구입니다. 무슨 말을 해도 우리들에게 지혜가 될 만한 '뭔가 있어 보이는 친구'였지요. 우리가 스물 다섯 살 대부분 군에서 제대하여 복학하면서 모임을 결성한 뒤 지금까지 해마다 여름, 겨울 그렇게 일 년에 두 번씩 꼬박 꼬박 만나 지금에 이르렀고, 그 세월이 벌써 40년이 되어 갑니다.


군부독재에 저항하던 민주화 운동 기간 우리 모두 군부독재 철폐에 몸과 마음을 보탤 정도로 시대의 아픔에 공감하는 마음도 함께 갖고 있었고, 재학 시절 갖고 온 도시락을 들고 학과 건물 앞 잔디밭에 모여 앉아 점심도 나눠 먹었지요. 저는 홀로 학생 기숙사에 들어가 생활하는 바람에 그들과 점심 식사는 함께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식사 시간이 끝나면 합류하여 담소를 나누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대구 시내 있는 대학에서 달성군 논공면 위천 1리 제 시골집까지 단체로 몰려와서 우리집 농삿일을 함께 해주기도 하였습니다. 시골 출신이던 어느 친구가 우리집 경운기 운전을 하고 우리들이 우루루 그 위에 앉아 동네 밖 동구 길로 지나갈 때, 당시 고향 마을에 대학생이 많이 왔다고 신기해 하기도 하였습니다. 마을 처자들은 우리 동기들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답니다.


1년에 몇 번이나 와주었습니다. 토마토 특작 비닐하우스 준비 시 큰 해머를 들고 깡깡 언 땅에 구멍을 내던 일, 토마토 수확기를 낭만적으로 생각하고 교수님께 휴강을 단체로 부탁드리고 여학생 동기들과 몰려와서 비닐 하우스를 보다가 팬티 하나만 입고 농약을 치던 제가 흑인처럼 온몸이 시커멓게 해서 커다란 농약 호스를 들고 하우스 문을 나올 때 다같이 까무리치듯 비명을 지르던 일, 모내기 도와주고 대구 시내로 돌아간 날 그 누군가 모를 제대로 심지 않아 둥둥 뜨는 바람에 형과 둘이서 밤에 그 부분을 다시 모내기하던 일, 수박 수확기에 몰려와 낙동강변 수박밭에서 뜨거운 여름날 일도 함께 하고 수박을 들고 강변 모래사장으로 힘차게 달려가 수박을 강물 위에 던져 놓고 수영하며 이야기를 나누던 추억 등등 생각해 보니 우리 동기들이 시골 우리집에 온 기억이 정말 많습니다. 시골 푸세식 화장실에서 기겁하던 후배도 떠오릅니다.


저녁엔 어머니께서 우리 시골집 마당에 덕석을 두어 장 깔고 그 위에 호마이판 상을 대여섯 개를 놓아 당시로선 진수성찬을 해주셨습니다. 동네 형수님들이 그날만은 우리집 저녁 식사를 위해 정성껏 마련해 주셨지요. 그리고 우리들이 둘러 앉아 부모님께서 내오신 막걸리를 마시며 '권주가'도 부르고 유행가를 부르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때 우리집 마루나 대문 없는 입구 평상에서 우리 마을 아지매들이 음식을 나눠 드시며 우리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추억이 생생합니다.


시골집에서 겨울 토마토 특작을 준비한다고 비닐하우스 설치용 파이프를 꽂을 구멍을 만들기 위해 셋이서 커다란 해머를 들고 깡깡 언 땅을 내리치던 날도 아스라히 떠오르고, 그렇게 일하다 힘들면 둘러 앉아 막걸리를 마시면 겨울 그 추운 날에도 우리들 몸에서 수증기가 엄청나게 피어올랐지요. 우리집과 동기들 사이에 숱한 인연이 있었습니다. 수확기가 끝나면 형님이 대구에 와서 우리 동기들 전체를 모아 저녁 식사를 대접하였고, 친구들 권유로 '울려고 내가 왔던가~"를 선창하면 나중엔 합창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형님께선 지금도 그때가 정말 좋았노라고 합니다. 동생에 대한 깊은 사랑으로 제 대학 캠퍼스를 찾았지만, 우리 동기들하고 그럲게 친한 사이가 되었지요.


훗날 세월이 흘러가서 대학 복학 후 어머니 돌아가시고 1년 뒤 아버지도 세상을 버리시던 날 시골 우리집에서 다같이 밤샘을 하면서 저를 위로해 주었습니다. 비록 4학년 2학기 중간 시기지만, 부모님이 계시지 않은 시골집에서 더 이상 형님 부부께 기댈 수 없기에 아버지 장례를 치른 뒤 곧장 목포로 가서 외항 선원이 되어 돈을 번 뒤 다시 학교를 마치겠다는 저에게 친구들이 이구동성으로,


"00아, 이제 대학 4학년 2학기 졸업 시기인데 어떻게 해서든 대학을 졸업하고 어딜 가더라도 결정하는 것이 좋겠다. 지금 만약 외항선을 탄다면 돈은 벌지 모르지만 이제 끝이 보이는 베움이 마무리가 엉망이 될 것 같다."라며 강력하게 말렸지요.


제 입장에선 어떻게 대학을 졸업한다고 해도 당장 생활비를 형수님께 받아 쓴다는 것이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젊은 날 고생 한번 해서 목돈을 쥐고 다시 돌아와 대학을 졸업하겠다는 결심이 정말 강했습니다. 실제로 목포 외항선 선원 모집 연락처를 알고 전화도 해둔 상태였지요. 그렇지만 밤샘을 함께 하고 새벽 첫 버스로 친구들이 우리 마을을 출발하던 날, 이른 새벽 마을 입구 길게 난 동구밖까지 함께 걸었습니다. 비록 맏상주인 형이 집에 있긴 했지만 상복을 입고 빈소를 벗어아는 것은 분명 예의에 어긋난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저를 위해 멀리서 찾아와 위로해 주로 밤새 함께 한 벗들의 정성을 생각하여 상복을 입은 채 전송하러 갔지요. 친구 한 명이 다시 한번 강조했습니다.


"여기까지 왔는데, 딴 생각하지 말고 우리하고 반드시 함께 졸업해야 한데이. 딴 생각하믄 절대 안 된데이. 암만 어려워도 형님부부께 잠시만 신세진다 생각하고 한 학기만 견뎌야 한데이. 그리고 나서는 니 마음대로 결정해라 알았제."


라고 신신당부합니다. 그들의 그 말 때문일까요. 그들은 처창 너머 손을 흔들며 저는 길게 고개를 이 숙였습니다. 그렇게 그들을 보내고 상복을 입은 채 마을 동구밖 길을 걸어들어오던 그 새벽 제 마음이 흔들렸고, 형님 형수님 덕분에 어렵게 등록금 지원을 받고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그래도 형님 부부께 손벌리기 싫어서 노가다 알바를 열심히 했었지요. 지금 생각하면 그 이른 새벽에 상복을 입고 고향 마을 동구밖 길을 걸어서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했을 것 같습니다.


이번 모임에서 이틀 내내 열심히 설거지하던 친구가 합석하여 식사를 할 때, 어느 친구가

"야, 00아 설거지 한다고 정말 고생했다. 퇴직하여 이제 쉴 만한 시점에 우리들 때문에 정말 고생 많이 했다. 고맙다. 다같이 00 친구의 수고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큰 박수!"


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설거지하느라 고생한 그 친구가 말하기를,

"괜찮아 이 건 요새 내가 매일 하는 거라서. 그래도 알아주이 고맙다. 오늘 전국에서 우리들 얼굴 보려고 달려오니 나도 정말 기분이 좋다. 진짜 즐겁다."


그렇게 깊어가는 여름밤 계속 소리를 들으며 막걸리 잔을 부딪치며 우정을 다시 한번 진하게 느낍니다. 그리고 어느 쪽인가 확실히는 모르겠는데, 어느 테이블에서 설핏 들려오는 말,


"~퇴직한 남편이 밥하는 게 당연하지. 마누라가 30 년 넘게 고생고생하면서 우리를 먹여 줬으면 이젠 우리가 그 보답을 해야 한데이. 식탁에 앉아 밥 오기를 기다리면 절대 안 된데이. 잘 못해도 직접 요리 만들어가 지금까지 고생한 마누라에게 고마움을 담아 잘 해줘야 안 되겠나. 우리 친구들 그렇게 해야 집에서 대접 받는다고."


대충 이런 말입니다. 시끌벅적한 상황에서 누군가 이렇게 깊은 철학이 담긴 말을 해주다니. 착하고 순수한 우리 동기 친구들 지금껏 40년 가까이 일 년에 두 번 만나왔지만 사소한 언쟁 한번 없이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십 대 아름다운 청춘 시절에 만나 지금껏 행복한 인연을 꾸며 왔으니 대단하지 않나요. 코로나 기간엔 상당 기간 모이지 않았지만 그 새 회비 적립금이 거액으로 모여 앞으로도 든든하고요. 이젠 더 자주 만났으면 좋겠다는 말도 나오기도 합니다. 가정으로 돌아가 퇴직한 우리 동기들이 전원 밥을 하고 가족을 위해 노력했다는 말을 다음 모임에서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 우리 학과에서 크게 유행했던 권주가는 "막걸리가 부른다. 대폿잔이 부른다~"로 시작하는데 바로 1년 선배 용진 형이 멋지게 불러주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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