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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얼굴 보는 값이라

by 길엽

퇴직 후에도 이런 저런 일로 조금 바쁩니다. 뛰어난 재주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누군가 도와달라고 부탁하면 '불러 줄 때 좋은 거지.'라고 하면서 냉큼 해주겠다고 하는 것이 몇 가지 누적되니 1주일 내내 일정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슈퍼노인증후군'이라는 것을 극도로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제 생각대로 잘 안 가네요. 노년 세대가 되어도 1년 내내 일할 거리가 있어서 남에게 큰 능력이 있는 것처럽 모이는 생활을 이런 증후군의 하나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저는 그렇게는 하지 않겠노라고 했습니다만.


아침에 딸 아이가 가장 먼저 출근합니다. 아내는 아직도 침대에 뒹굴뒹굴 하면서 제가 아내의 아침 식사로 '죽'을 준비하는가를 살피고 있네요. ㅎㅎ. 몇 년 동안 이렇게 죽을 데우고 해독주스를 내놓고, 냉동시켜 놓은 타월을 다시 해동하여 올려놓습니다. 물도 온도가 적당하게 섞어 컵에 담아 준비해야 합니다. 그래서 아침엔 제가 가장 바쁩니다. 요즘 열심히 읽고 있는 채근담(菜根譚) 책을 새벽부터 읽다가 이렇게 부산하게 준비하는데, 아내가 슬슬 나옵니다. 오늘은 기분이 좋은가 봅니다. 환한 미소로 다가옵니다. 제가 한 마디 했습니다.


"있제, 딸 세탁물을 어제 맡겼는데 옷만 10개고 가방까지 있으니 양이 매우 많더라. 그래도 딸 생각해서 내가 어제 낮에 차로 실어 세탁소에 맡겼거등. 세탁소 주인이 상당히 놀라더라. 그런데 오늘 아침에 딸한테 세탁비가 많이 나올 것 같더라고 얘기했더니 아이가 '감사합니다.'라고 하네. 아니 이건 내가 다 맡겨주고, 세탁비까지 모두 내가 주게 생겼네.'


물론 딸 아이에게 무슨 돈을 받자고 한 것은 아니기에 농담 삼아 그렇게 말한 것이지요. 심지어 옷 10벌 중 하나는 제가 시내 모임 가다가 옷 가게 마네킹이 입고 있는 옷이 참 예쁘게 보여 즉석에서 사고 집에 와서 딸 아이에게 준 것이네요. 당시 딸 아이가 썩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던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제가 사준 것이라 감사합니다 하고 받긴 했지만요. ㅎㅎ. 반코트인데 딸 아이는 키가 작은 편이라 좀 그랬던 것 같아요.



이어서 아내의 일장 훈시가 나옵니다.


"당연하지. 당신이 딸 세탁물을 맡길 때 기분 좋았제? 당신 성격에 아~들 일이라면 무엇이든 좋아하니까. 그러면 당신이 돈을 조야지. 안 그래."


"아니 우리집에 내 혼자 백수건달이고 다 직장인인데 아~들 세탁비까지 부담해야 되는지 모르겠네."


제가 한 번 튕겨봅니다. 다시 일장 훈시가 나옵니다.


"우리가 아이들 태어났을 때 얼마나 좋아했노. 큰아들은 큰아들이라고 좋았고, 딸은 딸이라고 좋았제. 막내아들은 막내라고 또 하나 더 태어났다고 좋아했지. 나도 좋아했지만 당신이 우리 아~들 태어나고 자랄 때 유난히 좋아핸 거 알제. 막내아들 여섯 살 때 당신 학교 고등학생들과 소풍가는데 데리고 가서 내내 업었었지. 나중엔 학생들이 우리 막내를 돌아가며 업어 주었던 날 생각 안나? 학생들이 우리 막내 이뻐하는 것을 보고 당신 집에 와서 얼마나 자랑했노. 그리고 우리집 아~들 클 때부터 단 한번이라도 당신한테 인상을 쓰거나 소리친 적이 없제. 나한테는 몰라도 당신한테는 우리집 아~들 진짜 효자였고, 지극정성 아니었다. 나한테는 가끔 불만을 표시하긴 했지. 그러니 앞으로 두고 두고 아~들 얼굴 보는 것만으로도 돈 많이 써야 되. 안 그래. ㅋㅋ. "


그 말을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듯합니다. 하기야 아이들에게 부담을 줄 생각도 없었고, 그냥 웃자고 가볍게 농담을 했는데, 아내는 '진지한 농담'으로 저를 놀리네요. 아내 말로는 아침에 아이들과 있을 때, 제가 가장 많이 웃고 목소리도 제일 크답니다. 그렇게 신나 한답니다. 아직 우리집 3남매가 혼인을 하지 않은데도 자식들을 저리 좋아하는데, 나중에 손자 손녀라도 태어나면 제가 까무칠 것처럼 좋아할 것 같다고 아내가 또 놀리네요. 손자 손녀들 절대로 땅에 걷게 하는 일이 없지 않을까 하면서 태어나지도 않은 손주 건강 걱정합니다. 많이 걸어야 건강할 텐데 하면서 말입니다. ㅎㅎ.


나이가 들면 자식들 얼굴 보는 값을 많이 치러야 하는가 봅니다. 그래도 우리집은 3남매 중 아이 둘이 늘 집에 함께 있으면서 부모를 챙겨주니 그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고, 어쩌다 멀리 경기도에 혼자 지내고 있는 막내아들이 주말을 틈타 멀리 부산까지 오면 그 얼굴 보는 값으로 제가 용돈을 줘야 한다는 아내의 논리 말씀 이해도 되네요. 지난 번 추석 때 막내아들을 부산역까지 태워다 주면서 용돈을 전해 줄 때 막내아들이 놀라면서 절대 받을 수 없다고 몇 번이나 사양하던 것을 제가 억지로 전해 준 것을 아내가 알지도 모르겠습니다. 막내가 기차를 탈 때 플랫폼까지 가서 아들 떠나는 모습 보고 손을 흔들었지요. 우리 막내 아들 건강하게 잘 지내라고 말하니까 막내아들은 몇 번이나 절하면서 감사합니다만 반복하고.


앞으로도 아이들 얼굴 보는 값으로 제가 돈을 줘야 한다는데,


맞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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