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양길 따라

나이가 들어 세상사 미련을 내친 사람에게 전하는 이야기

by 길엽

한적한 시골로 들어온 지 1년이 갓 지났다. 도시에서 생활할 때 그렇게 꿈꾸던 전원생활이라 기대가 컸다. 평화롭고 고즈넉한 시골 추억을 떠올리며 찾아온 곳이다. 젊은 시절부터 석양과 해넘이 그리고 해질 무렵 온 세상을 발갛게 물들이던 노을을 정말 좋아했기에 퇴직하여 낙향하면 매일 석양길을 걷겠노라 다짐했다. 물새 소리가 꾸욱꾸욱 아득하게 들리는 들길을 따라 걸으니 시냇물도 나와 나란히 흐른다. 시간이 멈춰 버린 듯한 이곳의 시공간에서 다시 새로운 삶을 떠올린다.


젊은 시절 사는데 정신없어서 제대로 누리지 못한 나만의 삶을 오롯이 누리고 싶었다. 아무런 구속도 받지 않고 잠들고 일어나 책 읽고 글쓰는 그런 생활 말이다. 때로는 산책을 하면서 다시 아이디어를 떠올리다가 문득 어디선가 들려오는 자연의 소리를 접하는 그런 생활이 그리웠다. 오월 초여름 온 세상이 녹색으로 가득한 들길 비라도 곱게 내리는 날이면 홀로 우산을 들고 걸어가며 조용한 세상을 누리고 싶었다. 누구와도 연락을 하지 않고 세상과의 모든 끈이 떨어진 나를 꿈꾸었다. 어디 초여름뿐이랴 사 계절이 맴돌다 스쳐가는 그 공간을 오롯이 온몸으로 느끼고 싶었지. 지금 여기에 혼자 걷는 석양길 저만치 들길에서 늦가을의 정취가 나에게로 다가온다. 저쯤엔 그 옛날 친구들과 하루 종일 놀았던 모래 사장이 자라집고 있다. 오랜 가뭄으로 강바닥 모래 사장엔 풀밭이 탐스럽게 자리잡았고, 하루 종일 풀을 뜯은 소들이 곱게 내려앉는 저녁해를 받아 모래 위에 비스듬히 배를 깔고 누워 여유롭게 되새김질하고 있었다. 오늘은 그곳까지 천천히 걸으면서 옛날 기억을 더듬어야겠다.


그곳까지 가는 들길 그리고 제방 위엔 오래 전처럼 이름 모를 풀잎들이 가득하겠지. 바람이 불면 부드럽게 누었다가 다시 일어나 우리를 올려다보던 그 풀잎이 지금도 변함없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 열일곱 고교 1학년 수박밭 원두막에 수박을 사러 온 인근 여고생과 큰 수박을 들고 앞서서 걸었던 그 길에 해마다 풀잎들이 사라지고 또 새로 피어났겠지. 교련복 하의에 메리야스 런닝을 입고 앞장선 소년이 쑥스러움에 푸른 하늘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두 팔로 가득 안은 수박만 내려다 보며 그냥 걷기만 했던 그때가 있었지. 지금은 세월의 무게를 가득 안고 그 길을 걸어간다. 어쩌면 그 소녀도 둑길 저 멀리서 걸어오고 있지는 않을까. 알아나 볼 수는 있을까. 늦가을을 넘어 겨울로 넘어가는 즈음인데도 날씨는 포근하고 바람은 청량하다. 이쯤에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벙어리 사공이 산골 오지마을 사람들을 배로 실어나르던 나루터가 있었던 모래 언덕이 있을 터다. 스무 살 막 성인이 된 기분에 도취된 그 어린 시절 고향 마을 친구들이 강둑을 따라 갈대밭 사이로 들어섰다가 사공을 발견하고 놀리기로 함께 마음 먹었지. 누군가가 벙어리 사공이라고 말했는데도.


그 시절 아침일찍 잠에서 깨면 혼자 집을 나서서 아무도 없을 것 같은 새벽길을 자주 걸었다. 집을 나서서 물가를 걸으면 물안개가 부드럽게 피어오르고 강물을 만나러 지천을 타고 내려온 산골 마을 옹달생 물엔 아침 세수하러 왔다가 물만 먹고 갔다는 산토끼 소식이 가득 앉아 있었네. 아직은 덜 짙은 갈대밭 속엔 새롭게 연두빛 싹들이 돋았고, 아침해가 동녘 하늘로 오를 기운을 보이면 길게 뻗은 들길엔 수양버들 곱게 늘어졌었지. 사계절이 숱하게 돌아나간 들길엔 봄기운이 어느 새 여름 하늘로 바뀌고 가을 단품이 겨울 하얀 눈으로 세상을 가득 덮었다. 지금에야 생각나는 어린 시절 그 공간은 사계절이 섞여서 동시에 나에게 다가온다.


어느 여름 날 오후 늦은 시각에 강물이 무릎까지 올 정도로 얕았다. 강 한가운데까지 걸어가서 물길 건너 강마을을 바라보았을 때 수박밭 원두막에서 우리를 내려다보던 분홍색 스웨터에 하얀 브라우스를 입은 참으로 고운 그 소녀가 시골에선 도저히 바라볼 수 없는 입성을 하였고, 조금은 먼 거리인데도 고운 눈빛과 미소는 왜 그리 생생하게 보였는지 지금 생각해도 참 신기하다. 초승달처럼 부드럽게 그려진 눈썹에 유난히 잘 어울리던 고운 미소의 소녀와 딱 한 번 눈길이 마주쳤던 그 곳은 강물 이쪽 저쪽이었다. 이쪽은 풀밭이 막 생긴 모래사장 끝이고 소녀가 앉아 있는 원두막은 2~30미터 정도 어른 키 깊이의 강물 너머에 있었다. 그쪽 원두막은 강물을 건너 급경사 비탈진 언덕을 올라서야 만날 수 있다. 소녀와 잠깐 눈길이 마주친 순간 누가 볼세라 얼른 고개를 돌려 돌아오는데 정말 가슴이 쿵덕쿵덕 진정되지 않았다. 뒤돌아보면 누군가에게 혼날 것 같았다. 그래도 꼭 한 번 돌아보았으면 좋았으련만. 며칠간 가슴앓이를 하였지. 누가 물어도 도저히 말할 수 없었지. 그리곤 그 소녀 소식은 강물처럼 사라져 가고.


이제 이 나이에 어린 시절 추억이 가득한 석양길에 홀로 섰다. 추억의 그 공간에서 만난 사람들 중 누군가가 단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기적처럼 그 만남이 이루어진다면 이 석양길 외롭진 않겠지. 하기야 제발로 찾아온 시골 마을의 강변 석양길이라 외로움은 애초에 없었을런지 모른다. 시골 들길의 흙을 직접 느끼려고 운동화를 벗어들었다. 발가락 사이로 들어오는 흙의 감촉은 40여 년 전과 다름이 없다. 마음은 저절로 흥이 난다. 오늘따라 흙길까지 내려 앉은 석양길이 온 세상을 저녁 노을을 비스듬히 물를이고 있다. 청량한 강바람이 마침 온 몸을 휘감고 귓가까지 스쳐 지나간다. 손가락만킄이나 가늘었던 수양버들이 수십 년 세월을 너머 이길을 따라 지나간 그 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지켜보았겠지. 너무나 바쁜 도회지 삶에 지친 이들이 이곳을 찾아와 수양버들 가지 가지에 손을 쓸며 넋두리도 했을 테지. 수양버들은 넉넉한 마음으로 모두 안아 주었을 것이고. 그렇게 버들 가지 하나 하나에도 사람들의 사연이 촉촉히 녹아있겠지.


석양길 나서기 전 돌아본 시골 마을을 생각하면 애틋한 마음이 앞선다.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낯선 얼굴들만 보이는 고향 마을 골목길과 오래 된 집들 문패는 그대로인데, 골목 어디선가 누군가 달려나와 나에게 장난칠 것 같은데, 마을 앞산에 비슴듬히 누은 소나무 고목에 줄지어 나란히 앉았던 우리들에게 피리도 구슬프게 '전설따라 삼천 리'를 들려주던 사촌 형도, 우리를 양팔에 매달리게 하고 힘자랑하며 돌아주던 동네 형도, 애쁘고 인자한 미소로 언제나 우리 곁에 있을 듯했던 누나들의 포근한 얼굴들도 이젠 모두 세월의 깊은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스러져가네. 그래도 내 기억을 어슴프레하게 생각나게 해주던 먼 친척 형수님 댁 방 한 칸에 내 공간을 만들었다. 도시에서 가져온 책과 노트북 그리고 간단한 살림을 방에 놓자마자 추억의 공간으로 나섰던 첫 날이 벌써 1년이 지났네. 고향 마을에 오면 누군가 한 사람쯤은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현직 끝 무렵 고향 마을을 찾았을 때 동네 형님들이 내가 들고 간 술과 고기 안주를 놓고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었다. 조만간 퇴직하면 다른 거 생각지 말고 바로 고향으로 와서 함께 살자고 했던 형님들, 그리고 내 어린 시절 아재 아지매들 앞에서 들려준 '조웅전' 이야기도 다시 들려주고 옛날 이야기도 많이 기대한다고 하던 형님들께 "아니, 옛날 이야기를 제가 아니라 형님들이 해줘야 하는 거 아입니까?"라고 반문도 했는데, 이젠 그 형님들도 요양원으로 몇이나 가셨다네. 한데 모여 저녁밥을 맛있게 먹고 집을 나서서 보름달 세상을 환히 밝히는 동구밖 길을 같이 걷고 싶었는데. 이제라도 세상 욕심 모두 버리고 옛날 추억을 더듬으며 이 골목 저 골목 넓은 마당 그리고 강변 둑길까지 포근한 바람을 가슴으로 들이마시며 걷다가 강변 낡은 식당 평상에 둘러앉아 내가 사드리는 막걸리와 민물고기 매운탕을 풍성하게 펼쳐놓고 세상살이 이야기로 풀어놓고 싶었는데. 흥에 겨운 누군가가 평상 위에 올라서서 그 옛날 고향 마을 설 추석 명절 가설무대 노래자랑 때 울려 퍼졌던 '고향무정'을 선창이라도 했을 텐데.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