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양을 따라 강변을 바라보며 둑길에 올라서서 저멀리 온 세상이 빨간 노을로 물둘어 있다. 강변에 있었던 허름한 매운탕집 식당은 보이지 않고 그 집이 있었던 곳은 공터로 남았다. 집은 허물어졌고, 누군가 가져다 놓은 평상만 외로이 놓여 있었고, 사계절 찾아왔다 떠나간 바람들만 흙먼지 가득하게 자욱을 남겨 놓았다. 사람 손길이 닿지 않은 지 꽤 오래된 것 같다. 나처럼 추억에 젖은 사람이야 이 식당에 대한 기억이 있을 뿐 어쩌다 오가는 사람들에게야 그냥 단순한 시간과 공간에 불과할 뿐이니.
평상 한 쪽을 비집고 앉았다. 먼지가 그래도 덜 묻은 평상 끝에 입으로 후후 불어 먼지를 어느 정도 날린 후에 평상에 앉아 강마을을 바라보니 40여 년 전 그 아득한 세월 너머의 일들이 바로 어제처럼 생생하게 살아나온다. 예전에는 이보다 훨씬 큰 평상이 있엇고, 그곳에 민물고기 매운탕을 파는 식당이 자라잡았지. '락희식당' 간판도 생각난다. 주인집 아저씨는 인상이 좋아서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아주머니의 요리 솜씨가 일품이라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아 그곳에 가기만 하면 사람 구경도 쏠쏠하였던 터다.
내가 대학생이 되던 해 전두환 군사독재 시절 5.18광주민주화 운동이 발생했다. 당시는 '광주폭동'이라고 했다. 아버지께서 광주에 무슨 볼일이 있어 가셨다가 광주역을 마지막으로 빠져나오는 기차를 탔노라고 훗날 술회하면서 가슴을 쓸어내리던 일도 떠오른다. 당시엔 광주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구 내 고향에선 전혀 몰랐다. 대구 시내 동성로 대형 큰 건물에 '전국대학휴교'라는 현수막이 걸렸다. 대학 휴교가 사전 통보되지 않고 이렇게 현수막으로 써 있으니 긴가민가해서 대학으로 확인 차 가 보았지.
산격동 대학 캠퍼스 후문 즈음에 시내버스에서 내리고 조금 걸어들어가자마자 태어나고 처음으로 장갑차를 만났다. 군인들이 살벌하게 총검을 한 채 오가는 사람들을 날카롭게 쳐다보고 있었다. 난 그 장면만 보고 그대로 다시 돌아와 시내버스 127번을 탔다. 이젠 대학으로 들어가지 못하는구나. 서부정류장 일명 '성당주차장'까지 와서 다시 시외버스로 바꾸어 탔다. 고령이든 현풍이든 상관이 없었다. 시외버스에 올라타서 24km 떨어진 내 고향 달성 논공 위천동에 도착하면 된다. 아무도 따라오지 않는데 괜히 혼자 마음이 급했다. 얼른 집에 가야 한다.
그리곤 110여 일 정도 휴교였던 것 같다. 어미니 곁에서 농삿일을 함께 하였다. 그때 여기 있던 식당에도 왔었다. 어릴 때부터 혼자 들일하시던 어머니 모습을 늘 보고 자라서 그런지 몰라도 어머니에 대해선 정말 애잔했었지. 어머니가 싫다 하면 그건 그날부터 그만두었다. 대학에 막 입학하고 나서 아버지께서 나를 불러 '술은 남자가 사회생활하려면 필요하니 괜찮지만, 담배는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이제 니도 대학생 성인이 되었으니 스스로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그 당시 내 마음 속엔 '아버지는 술 담배 그렇게 많이 하시면서 왜 나만 못 하게 하는 걸까' 하는 회의감도 있었다. 아버지 앞에선 그렇게 하겠노라고 약속했지만 확고하지는 못 했지. 그런데 아버지 말씀이 있었던 때로부터 며칠이 지났을 때 어머니께서 함께 일하던 나에게 담배는 좀 그렇지 않나 해서 답배를 완전히 끊게 된다. 물론 담배를 핀 시간이 몇 개월이 채 되지 않은 즈음이었으니.
식당 터 대부분은 채소밭이 되었고 평상이 놓인 부분은 땅이 단단해서 그런지 빈터로 남았다. 평상에 앉아 저 멀리 강마을을 바라보았다. 저녁 노을이 시계 1시 방향에 있는 봉화산을 빗겨 길고도 가늘게 강물 위에 내려 앉았다. 40여 년 전이나 지금도 변하지 않은 것은 저녁 노을이 온 세상 가득 물든 장면이다. 그땐 강물을 막는 그물이 있었고 온몸에 빨간 노을을 바른 잉어떼들이 힘차게 그물 위로 비상하였지. 낮에 친구들과 벌거숭이로 어울려 뛰놀던 모래사장 풀밭도 녹색과 빨간 색이 묘하게 어우러져 그때까지 전혀 구경못한 색으로 그려젔었지. 그건 지금도 변함이 없다. 손가락 굵기만 했던 수양버들이 꽤 많았었는데, 이젠 그 수양버들이 거목이 되어 버들가지들을 풍성하게 땅으로 내리고 지나가는 바람들을 품었다가 내보내고 있다.
"디럼! 동네 입구 쪽에 식당하고 여관하던 거 생각나지요? 그집에 살던 딸 아이 디럼하고 한 살 차이였지요. 아저씨는 그때 일본 이름으로 스기야마 상이라고 했는데, 생각나요? 산 저 우엔 뽕나무 밭 과수원도 있었다 아인교? 그집 딸 아~ 나중에 우째 된 거 아는교? 진짜 여자 팔자는 사내 우째 만나는 거에 달렸다 카디만 그 아~가 딱 그 짝 아인교? 디럼하고도 학교 다닐 때 서로 좋아했다고 카는 소문이 쫙 있었는데 몰랐는교? 하기야 디럼은 공부는 좀 잘 했지만 그 아~가 워낙 이뻐 가~ 서로 좋아핸기 아이고 디럼 혼자 일방적으로 좋아했을끼다 내가 볼 때는."
며칠 전에 저녁밥을 챙겨주시던 집주인이자 집안 형수님께서 내 방에 상을 들이밀며 오래 전 추억의 그 후배 이야기를 화제에 올렸다. 나는 형수님께 '잘 알지요. 암만 내가 가~를 모를까 봐서요. 그란데 그 아~가 나중에 어째 된 거는 전혀 몰라요.'라고 생각하면서 그 한 살 후배 여학생의 얼굴을 떠올렸다.
우리집은 마을에서도 거의 제일 가난한 농가였다. 우리집 소유의 땅은 6마지기 그러니까 1200평 정도 논과 강변 수박밭 4마지기 가웃 900평 뿐이었다. 그 정도 농토로는 5식구가 살기엔 아주 팍팍했다. 그래서 같은 마을에 살던 큰외삼촌이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여기저기 손을 벌려 소작논을 구해 주었지. 오붕개에 있던 논 7마지기 1400평은 강건너 주인의 땅이었다. 나보다 한 살 아래 양만철이란 아이의 집이었다. 가을 농사가 끝나고 수확의 절반을 소달구지에 싣고 아버지와 형을 따라 그집에 간 적이 있었다.
만철이는 위로 누나가 셋 있었고 만철이 엄마는 정말 인정스롭고 따뜻했다. 만철이 엄마는 후덕한 인상이었고, 누나들은 모두 순하고 착한 얼굴이었다. 마루 위에서 나란히 서 있던 누나들 셋의 눈은 왜 그리 컸는지. 우리를 마루에 앉혀놓고 일 년 동안 농사를 고생고생해서 지은 거를 이렇게 갖다줘서 정말 고맙다면서 아버지와 형에 연달아 막걸리 잔을 건넸다. 만철이 아버지도 우리 아버지께 정말 공손했다. 지주와 소작인 사이에 흔히 있었던 갈등은 전혀 없었지. 오히려 농사철이 되면 만철이 어머니와 아버지와 들에 와서 통닭과 소주를 사가지고 와서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를 위로하고 잠시 둘러앉아 대화도 나누고 가셨지. 참 착한 사람들이었다. 훗날 들었지만 수확의 절반씩 명확하게 나눠 가졌고, 우리 가족이 그집에 가면 풍성한 식사를 대접하며 노고에 감사해했다. 매년 연례행사처럼. 그리고 그땐 직접 보진 못했지만 쌀 가마 몇을 그 뒤에 우리집으로 해마다 보내주었단다.
그렇게 가난했던 우리집에 비해 스기야마 상의 그 집은 풍족했지. 식당과 여관에는 늘 손님이 북적대고 과수원과 뽕밭에는 동네 사람들 일꾼을 모아 일을 시켰다. 그집 딸은 이름도 당시 흔했던 '~자'가 아닌 아주 특이한 이름이었지. 입성도 아주 좋았고 얼굴도 예뻐 학교 운동회엔 또 다른 여자 후배랑 '춘향과 이도령'으로 분장하여 큰 인기를 끌었지. 피부가 뽀앴고, 키도 늘씬한데다 얼굴도 계란형 미인으로 마을에선 군계일학이었다. 어디 우리 마을뿐이었나. 나랑 서로 좋아한다는 것은 당시 사람들이 지어낸 소문일 뿐 내가 좋아했다면 철저히 일방적인 짝사랑이었을 게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좋아는 했지만 그 애와 나는 전혀 짝이 맞지 않아서 사귀거나 좋아하는 것 자체를 불가능으로 여겼다. 그렇게 얼굴 예쁘고 집안 재산이 많아 부자였던 그 여자애가 뭐가 답답해서 인물도 없고 가낭하기 그지없는 농꾼 아들과 만나주기나 할까.
그런데 그 여자 후배의 삶이 지난했다고 한다. 국민학교 중학교는 같은 학교를 다니면서 얼굴을 자주 보았다. 그렇다고 둘이 특별하게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다. 멀찌감치 보이면 가볍게 목례 정도만 했지. 그 아이는 인기가 많아 어딜 가든 사람들의 시선을 한 눈에 사로잡았다. 친구들과 많이 모여 있었다. 우리 마을에서 한 살 아래 여자 후배들 인물이 꽤 좋았다. 그 후배뿐만 아니라 서녀 명 정도가 예뻤지. 그중 한 명은 면소재지에서 어떤 남학생이 너무 좋아해서 매일 찾아왔었지. 그렇게 둘이 열렬하게 사랑하여 결국 결혼에 골인하였고, 그 부부는 지금도 아주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 덩치가 산만하여 레슬링도 하던 남자 애는 너무나 순수하게 사랑했고, 여자 후배는 예쁘고 착한 데다가 성품이 매우 고왔다. 그래서 그 부부가 하는 가게에 개업하던 날 내가 가서 그날 온 사람들 앞에 부부를 자랑했던 기억도 있다.
"어린 시절 우리 마을에 제일 예쁜 여자애와 면에서 제일 괜찮은 남자가 정말 서로 좋아 사랑하고 결혼한 부부입니다. 장사 대박나길 빕니다. 참 둘이 굳이 비교하라면 그래도 우리 마을에 함께 자라 최고 인물을 자랑하는 애기 엄마가 조금 나은 것 같습니다."
그렇게 그날 온 사람들이 폭소를 터뜨렸고, 즐거운 분위기가 되었지.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우리 동네 후배들은 그래도 예쁜 여학생들이 꽤 있었는데, 바로 내 동기들은 국민학교만 졸업한 친구가 네 명이나 되고, 여자 동기는 딱 두 명밖에 없었지. 그렇게 친하지도 않았고, 이야기를 나눌 기회도 별로 없었고 서로 관심도 없었던 것 같다. 나도 딱히 여학생들의 관심을 끌 만한 얼굴이 되지 못했지만.
다시 아까 말한 팔자 고약한 그 여자 후배 이야기로 돌아간다. 빼어나게 예쁘고 과수원집 딸로 유복했던 그 아이의 인생이 어떻게 그렇게 비참하게 변했는지 궁금했다. 이제 와서 뭐 그 후배랑 특별히 인연을 맺겠다는 생각은 결코 없다.
"디럼, 안 있는교? 디럼이 중학교 졸업할 때 우리 동네에선 그래도 인문계 고등학교엔 디럼 혼자만 되었다 아인교. 아지매가 정말 좋아혔지예. 그라고 그 아~는 중학교까진 좋게 살았는데, 중학교 졸업할 땐가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우쨌든 그집 아버지 스기야마 상이 세상을 버리면서 집안이 그만 그 꼬라지가 안 됐뿐능교? 그집 아지매가 좀 맹~한 구석이 있었지요. 그 아~ 아버지가 세상 버리고 그집 재산을 그 아~ 고모가 홀라당 해쳐 묵었따 아인교. 그래가 그집 아지매하고 그 아~가 졸지에 걸배이가 됬뿠다 아인교. 그라고 우째든 묵고 살라고 식당하고 여관은 좀 해보려고 단체 손님을 받았는데, 해필이면 노가다 사람들이 한 달인강 두 달인강 한 열댓 명이 그집에서 묵고 자고 했지요. 그런데 그 노가다 대장한테 한날 그 아~가 당했뿠고, 그래가 아~가 하나 생기는 바람에 간다온다 말도 않고 그집 아지매캉 그아~가 밤새 달라았뿐다 아인교. 어디로 간 거는 아무도 모르지요. 그라고 그집은 좀 쥐나 다 푸사지고 지금은 다른 사람들이 들어와 열무비빔밥 삭당이 크다 하이 들어와 안 있는교? 디럼도 이번 참에 오실 대 봤지요? 그집 아~ 참 인물도 좋았는데, 그 뒤론 우째 됬는지 이 동리 사람들도 아무도 모르고."
그러고 보니 그 여자 후배를 딱 한 번 만난 적이 있었다. 정확하진 않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교직에 들어와 몇 년이 흘렀으니 내 나이 30대 초반이었을 게다. 시골가는 시외버스에서 우연히 그 아이를 만났다. 그렇게 유복했던 아이의 고운 얼굴은 모두 사라지고 바싹 마른 몸에 얼굴은 왜 그리 수심이 가득하였는지. 딱 보는 순간 정말 불쌍할 정도로 안쓰럽게 보였다. 흔들리는 시외버스 차안에서 둘이 손잡이에 의자를 잡은 채 마주 보고 서서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에 거의 없다.
"오빠야 오랜만이네. 니 청도 어디서 선생님 한다 카는 말은 들었데이. 촌에 한 번 갔더니 마을 사람들이 그카더라. 오빠야 니 정말 잘 됐데이. 오빠야 니 알라 때부터 공부를 잘 하더이 결국 이렇게 좋은 선생님이 되었네. 난 꼬라지가 이리 됐다. 난 텔렉스 교환하는 거 하고 있다. 내한테 아~ 하나 있는 거는 알고 있제. 가~ 벌씨로 국민학교 다닌다. 오빠야 진짜 오랜만에 만나니 반갑긴 한데, 이야기도 길게 할 시간이 없을 끼고 건강해래이."
나랑 둘이서 그렇게 긴 대화를 나눈 적이 그때까지 없었다. 그후론 만나지도 못하고 풍문조차 접할 수 없었지. 나도 그 아이랑 만난 것이 반갑긴 하지만 그렇다고 어디 다방에 가서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누겠다는 생각도 별로 없었지. 그냥 우연히 스치듯 만난 인연일 뿐이었지. 텔렉스 교환이 뭔지 지금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