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밥을 맛있게 먹고 집을 나섰다. 들판 끝에 있는 시냇가 찻집으로 걸어가서 사람 좋은 인상을 가진 주인과 인사를 나누며 평상 탁자에 앉았다. 낮엔 외부 관광객이 꽤 있어서 시끌벅적한 분위기인데 밤이 되면 전형적인 시골 마을 분위기로 바뀐다. 하루 종일 관광객을 맞이하느라 힘들 텐데도 주인장은 친절하게 반겨 준다. 1년 전 이곳으로 들어올 때 찻집이 막 들어서기 시작하여 좋은 공간이 될 것으로 기대를 많이 하였다. 여름 날엔 이곳에서 밤늦게까지 머물다가 평상에서 잠깐 졸기도 했다. 밤 공기에 행여 감기라도 걸릴까 주인께서 담요 하나를 가져와 덮어주기도 하였다. 나이도 나보다 아래로 보이는데 사람 대하는 자세는 나보다 훨씬 세련되고 부드럽다.
밤에는 이렇게 찾아오는 사람이 거의 없고, 어쩌다 강 건너 최근 들어선 숙박 시설에 하룻밤 보내는 외부 관광객이 다리를 건너 보름달 빛에 취해 이곳까지 들길을 길게 걸어오기도 한다. 그러면 잠깐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제가 즐겨 읽는 사마천의 사기열전에 대한 담소도 나온다. 내가 의도적으로 사기열전 관련 내용을 내놓는 경우는 거의 없고, 대체로 내가 외부 손님과 담소를 나눌 적에 주인장이 내 자랑을 한답시고 사기열전을 언급하면 손님께서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된다. 나는 역사 전공자도 아니니 깊이 연구해서 논문 같은 것을 써 본 적이 없어서 담소를 나누는 자리에서 사기열전을 비롯한 동양사 관련 역사 이야기가 나오면 손사래를 치기도 한다. 여기 시골에 들어오게 된 사연도 물어오는 경우가 있다. 나이가 들면 혼잡한 도회지를 벗어가 고즈넉한 시골로 낙향하여 은거하는 것이 제 인생 최종적인 꿈이라고 몇 번이나 말 했던 것 같다. 새벽 일찍 일어나 강변 둑길에 올라서면 지천에서 흘러내려오는 시냇물이 강물을 만나는 곳에는 물안개가 부드럽게 세상을 감싸고 있었다. 그럴 때는 그야말로 환상에 젖는 듯하다.
한번은 이곳 찻집에 들렀다가 잠깐 길게 난 들길을 혼자 걸었던 날 세상사 다 싫다 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그분도 강 건너 숙박시설에 하룻밤 예약하고 저녁식사 후에 혼자 걷다가 다리를 건너 들길로 접어드는 초입에서 저를 만나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다. 아무도 없는 들길이지만 환하게 밝은 덕분인지 사람들이 꽤 눈에 띕니다. 그분은 처음 만났는데 자신의 인생 고민을 털어놓아 조금 놀랐다. 제 재주 중 가장 잘 잘하는 것은 '경청, 들어주기'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저를 만나면 자신의 사연을 잘 털어놓는다. 최근 부부싸움을 한 사연도 길게 들어준 적이 있다. 사람들 참 희한하다. 자신의 인생 고민이 정말 심각한 듯 말을 꺼냈다가 제가 잘 들어주니까 말하는 도중에 기분이 풀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참 신기하다.
달빛 아래 여기 들길은 여느 시골 농로와 달리 널찍하니 대낮처럼 밝게 보인다. 인적이 드물어도 중간 중간 켜진 가로등 덕분에 이곳이 들길인지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길인지 헷갈릴 정도이다. 여름 날이면 인근 마을에서도 여기 들길로 산책을 많이 나온다.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지지 길 바닥도 더욱 반들반들해지는 것 같다. 외부에서 오신 분들 일부가 차량에 손상이 갈까 그런지 몰라도 포장도로면 좋겠다고 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대부분 관광객들은 달빛 아래 비포장 들길을 맨발로 걷는 것이 건강에 얼마나 좋으며 절대로 포장하지 말라고 강력하게 부탁하기도 한다. 약 2km 정도 되는 들길이 폭 3m 정도니 꽤 넓다.
제 동료 중에 현직 끝 무렵에 맨발 걷기의 중요성을 강조한 분이 계셨다.
맨발걷기 효능 9가지입니다
염증을 줄여주고 코르티솔의 감소 에너지의 증가 피로를 덜어줌 치유 속도 향상 통증을 경감 기분을 좋게 함 혈압을 낮춥니다 체내 균형을 회복
물론 맨발걷기의 부작용이나 위험성도 함께 언급하셨지만, 맨발걷기를 하면 우선 발바닥에 느끼는 감촉이 정말 기분을 좋게 한다. 이곳처럼 흙으로 된 들길에 맨발걷기는 심리적 안정감을 청량감을 깊이 느끼게 한다. 저야 이곳으로 들어와 노동 부담이 있는 것도 아니고 경제적 어려움도 별로 겪지 않기에 시골 풍경을 오롯이 누리는 행복을 짙게 맛보게 된다. 이 모든 행복은 돌아가신 부모님의 은덕과 긴 세월 저와 함께 해준 아내의 헌신과 늘 저를 걱정해 주는 우리 아이들 3남매, 그리고 주변 지인들 덕분이다. 감사한 사람이 진짜 많다.
이렇게 달빟이 환하게 떠올라 세상이 밝게 빛나는 찻집에 홀로 앉아 책을 펼친다. 그깟 진도야 안 나가도 좋다. 몇 페이지만 읽고 가만히 저 멀리 시냇물따라 시선을 끌고 간다. 주인장은 그새 방안으로 들어가 주무시는가 본다. 마을엔 부인과 아이들이 사는 본가가 있고, 여긴 주인장 혼자 잠자는 공간이라고 한다. 물론 매일 자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차를 더 마시고 싶으면 제가 직접 물을 끓여 다시 마시면 된다. 이곳 찻집에서 주인장과 인연을 잘 맺어 이렇게 행복한 시간을 마음껏 누리는가 보다.
오늘 가지고 온 책은 김영수 저 <사마천 인간의 길을 묻다>이다. 사마천에 관한 연구로는 아마 국내 최고가 아닐까 한다. 학문적 깊이도 굉장하고 저서도 아주 많다. 무엇보다 중국 한성시 사마천의 고향 마을을 아주 많이 방문하여 현지 답사가 반영된 저서를 발표하였다. 생생한 현지 사진이 곁들여진 저서가 인상적이었고, 가독성이 매우 뛰어나다. 그래서 책 진도도 잘 나간다. 몇 번이나 읽은 책이라 군데군데 종이가 너덜너덜하기도 하다. 이렇게 시냇가 찻집 냇물이 곱게 흘러가는 보름달 홀로 앉아 책을 읽는 것도 노년 세대가 누릴 수 있는 행복이 아닐까 싶다. 걱정도 없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