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속에서 만난 어린 시절 5일장

by 길엽

점심을 먹고 들길을 한참 걸었다. 약 2만 보 정도 되려나. 오늘은 손에 아무 것도 안 들고 가기로 했다. 늘 가까이 하던 스마트 폰도 집에 두고 정말 가벼운 옷차림으로 집을 나서서 곧장 들길 초입에 접어들었다. 맨발 걷기하던 길도 아니다. 강변 제방 둑길이다. 강마을이 손에 닿을 듯이 다가온다. 강 건너 강마을에서 왼쪽 산등성이 넘어가는 길을 보면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아버지 살아 계실 적에 형과 셋이서 경운기를 몰고가서 오실재 산 마루에 올라 무진장 펼쳐져 있는 칡넝쿨에 풍성한 잎들을 많이도 베어 실었지. 소가 유난히 좋아하기에 열심히 풀을 베기도 했다. 그렇게 경운기 가득 싣고 집에 오면 우리집 암소, 그렇게도 순한 소가 며칠은 너끈하게 먹을 수 있었지. 세상 다 얻은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집으로 돌아오던 때가 눈에 선하다. 형은 경운기 운전하고 나는 경운기 짐 높은 곳에 고무줄 바를 잡고 푹신하게 앉았지. 그 위에서 저 멀리 세상을 바라보던 날들도 참 좋았네. 아버진 별 말씀이 없으셨다. 그냥 자전거를 타고 느긋하게 우릴 따라오셨지.


그 시절 생각만 해도 추억이 참 많았다. 돌아보면 내 삶 전체가 추억이 풍성했다. 어릴 때부터 동네 아이들보다 공부를 조금 더 잘했던 덕을 많이 본 것 같다. 천재라는 둥, 신동이라는 둥 별별 소리를 다 들었지만, 나 스스로 생각하기엔 턱도 없는 칭찬이었다. 당장 같은 중학교 동기들 중에서도 1등을 해본 적이 없으니까 말이다. 다만 우리 동네 아이들이 공부를 소홀히 해서 내가 상대적으로 좀더 돋보여서 그랬을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우리 가족의 희망이었고, 집안과 마을 사람들의 기대를 받는 존재였음은 부인할 수 없다. 지금 생각해 보면 부질없는 일이었지. 내가 무슨 대단한 존재라고. 그냥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래도 어머니께선 이 아들에 대한 기대를 돌아가실 때까지 가지고 계셨지. 솔직히 말하면 내 능력이나 재주에 비해 수십 배 수백 배 인정을 받았지. 그리고 그 덕에 지금껏 내 삶에 힘든 일이 별로 없었던 거지. 실제 내 삶에 힘든 일이 왜 없었을까마는 어린 시절부터 주위 사람들의 성원과 사랑을 풍부하게 받아서 웬만한 어려움은 어려움으로 받아들이지 않아서 그랬을 것이다. 지금도 내가 재산이 많지 않다. 그렇다고 쓸 수 있는 현금이 넉넉한 것도 아니다. 그래도 내 삶이 그렇게 어렵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주어진 현실에서 특별한 욕심 부리지 않고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하지, 세상사 별 거 있나.'로 스스로 위로하면 삶이 고달플 이유가 없지 않는가.


강마을도 옛날과 달리 현대화가 급속하게 진행되어 전원주택이 대거 들어서고 고급 승용차가 자주 눈에 띈다. 원래 살던 사람들의 집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노령화 영향이리라. 지금 이 나이에 시골 마을에 은거하는 로망을 달성한 나로선 이 상황이 참으로 고맙긴 하지만 시골 풍경이 급격하게 변해가는 현 상황은 안타깝다. 시골 집은 점차 빈집이 많아지고, 살던 사람은 하나 둘 저 세상으로 가 버리니 이곳 시골 마을도 황량할 때가 많다. 아직은 사람들이 조금 남아 있으니 견딜 만하지만 좀더 시간이 흘러가서 내가 이 세상을 하직할 즈음엔 이 마을에도 사는 사람이 급격하게 줄어들 것 같다. 그건 그때 사람들 걱정거리지 내가 뭐 신경쓸 거 있나. ㅉㅉ


강변 둑길을 한참 걷다 집으로 돌아오는 농로 들길로 방향을 틀었다. 갑자기 졸음이 밀려와 걸음을 재촉했지. 집에 도착하자마자 방안으로 들어가 폭신한 이부자리에 그냥 드러누웠다. 어디 아픈 데가 생겼나 하면서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보기도 했다. 온몸을 이리 저리 돌려 보기도 한다. 의학 지식이 전무하지만 스스로 판단하기에 특별한 이상은 느껴지지 않는다. 이런 오만한 생각을. 그러다가 살풋 잠이 들었다. 초등학교 5학년 무렵 어머니를 따라 고향땅 5일장 시장터에 간 장면이 꿈속에 나타났다. 어머니는 젊었고, 나를 바라보는 표정이 너무나 따뜻하다. 내 손을 잡고 내가 좋아하는 붕어빵을 사준다고 끌고 간다. 그러면서도 또 뭐 먹고 싶냐고 자꾸 물으신다. 실제 내 어린 시절 어머니가 나에게 하던 것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그땐 어머니께서 절대 서두르지 않으셨지. 꿈속에선 왜 그리 바쁘게 내 손을 잡고 서두시는지 의아했지만 그냥 따라갔다.


한 블럭을 지나가니 정말 엄청나게 많은 농산물들이 가득 가득 쌓여 있었다. 어머니는 커다란 보자기에 배추, 무우, 당근, 생강, 과자 등을 닥치는 대로 사서 보자기에 올려 놓았다. 내 얼굴도 볼 시간이 없이 서두른다. 그리고 빨리 싸가지고 가서 아이들 먹이라고 한다. 아니 내가 초등학교 5학년 정도인데 무슨 아이들에게 가져다 먹이란 말인가 하고 어머니께 물어보려 하는데 어머니는 홀연히 사라졌다. 그래서 '어머니, 어머니!' 부르다가 그만 꿈에서 깼다. 무슨 꿈일까. 도대체 꿈에서 보인 어머니의 행동은 무슨 뜻일까. 잠에서 깨어 이불 위에 앉아 한참 동안이라 생각에 빠졌다. 어머니가 나에게 무엇을 가르려 주시려 현몽하셨을까. 그렇게도 그리운 어머니를 꿈속에서 참으로 오랜만에 만났는데 하고픈 말이 많았음에도 제대도 말씀드리지 못한 아쉬움이 진하게 밀려왔다. 지금까지도 어머니의 현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냥 꿈이었을 테지. 아니면 지금 우리집 아이들 3남매를 잘 건사하라는 뜻일 테지. 잘 먹이고 잘 챙기라는 것 아니었을까.


폭신한 이불에서 나와 방문을 활짝 열고 멀리 길게 난 들길을 바라본다. 가을걷이가 끝난 들길은 황량하기 그지없지만 그래도 이렇게 앉아 가만히 바라보는 것도 참 괜찮은 일이다. 점심 먹고 오후에 잠깐 걸으면서 잠이 오는 바람에 집에 빨리 돌아왔지. 매일 매일 하는 일이 단순 반복인 듯하지만 그래도 깊이 생각해 보면 매일 미세한 차이가 보이기도 하지. 노년 세대의 삶은 이렇게 하루가 지나간다.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