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리는 날엔 커피 한 잔

by 길엽

오랜만에 부드러운 가을비가 내린다. 시골집 조그만 방안에서 창문 너머 길게 펼쳐진 들길을 바라본다. 시냇물에 똑똑 떨어지는 빗물을 바라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오늘은 집안에서 창밖으로 시골 풍경을 감상하기로 했다. 한 달 만에 찾아온 아내는 부엌에서 내가 좋아하는 파전을 굽는다고 부산하다. 냉장고에 넣어 둔 막걸리를 같이 마시자고 한다. 아내는 술을 거의 하지 않지만 가끔 나의 기분을 맞춰 주려고 한 잔 정도가 거든다. 내가 책을 읽다가 입이 심심할 듯하면 뭔가 간식거리를 내주는 센스를 보인다.


이제 아이들도 모두 도회지에서 각자 가정을 이루고 다들 평안하게 지내는 듯하다. 가끔은 시골 마을을 방문하기는 하지만 요새는 뜸하다. 처음엔 아이들이 많이 찾아오길 기대했지만, 이젠 여기 생활에 익숙한 탓인지 아이들 방문보다 이렇게 비내리는 시골 풍경을 감상하며 고즈녁한 분위기를 누리는 행복도 괜찮다. 이젠 이렇게 찾아와 줘도 반갑지 않냐고 아내가 살짝 핀잔을 준다. 그럴 리가 있나! 조용한 시골 살이를 위해 혼자 들어와 살긴 하지만 그래도 가끔은 아내와 아이들을 만나는 것이 좋지.


나 혼자 이곳 고향 시골 마을에 혼자 내려와 은거하면서 방 하나 세를 내어 거처를 정했다. 아내는 시골 살이에 익숙하지 않고 몸 상태도 여의치 않아 도시의 본가에 있기로 했다. 어쩌다 내가 걱정이 되면 이곳에 주말에 잠깐 와서 내 생활에 필요한 의식주를 조금 거들고 일요일 오후가 되면 다시 도시로 돌아간다. 처음엔 이곳을 찾아화 너무나 초라한 생활 상태를 보고 많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시골집이라 방 한 칸 월세는 정말 싸다. 대신 밥 값은 별도라서 주인집 할머니가 내 식사엔 정말 정성을 다하신다. 집안 먼 친척이고 내 어린 시절 참 귀여워 해주셨던 분이다.


아내가 이곳의 불편함을 걱정하긴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나의 이런 생활을 보는 것에 익숙해져 가는 듯하다. 내가 좋아서, 내가 원해서 시골 생활을 하는 것을 존중한다고 했다. 설령 아내가 내 생활을 존중하지 않아도 난 어차피 퇴직하면 이런 곳에 와서 내 삶을 마무리하려고 했다. 나중에 몹쓸 병이 걸려도 아무에게 알리지 않고 그냥 혼자 조용히 세상을 떠나려고 마음 먹었다. 괜히 아내나 아이들에게 알려 번거롭게 하는 것보다 그냥 조용히 조용히 세상살이 마무리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내 나이 스물 네 살 아내 스무 살 때 군 복무를 마치고 제대한 직후에 시내 찻집에서 처음 만난 이래 지금까지 30여 년 인연을 맺어 함께 살았다. 아내는 나와 아이들에게 정말 헌신적이었다. 언제가 그 고마움에 보답하겠다는 마음으로 나도 열심히 노력했지만 그래도 돌아보면 아쉬운 적이 많다. 미안한 마음이 가득하다. 그래도 너무나 고마운 나의 아내다. 이제 내가 편한 도시에서 벗어나 조금은 불편한 시골에 들어와서 이렇게 낙향과 은거를 일삼는 것을 아내가 이해하기 어려웠으리라. 하지만 삼시세끼 준비해 주는 주인집 할머니 덕분에 식사 문제를 해결하고 보니 이곳 생활도 매력적인 것 같다.


내가 먼저 들어오고 아내가 걱정이 되어 이곳을 찾아와서 몇 번이나 불편하지 않냐고 걱정도 많이 해주었고, 큰아들은 이제 고집 그만 부리시고 도시 본가로 돌아오라고 몇 번이나 권유하기도 했다. 딸 아이도 막내 아들도 시골에 혼자 살이 하는 내가 걱정이 많이 되었던가 보다. 그래도 난 이곳에 살겠다고 마음 단단히 먹었다.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인문학 강의 요청이 들어오고 원고 청탁까지 있어서 그렇게 받는 수입으론 이곳 사람들 대접하는데 적당하게 썼다. 어차피 퇴직 후엔 연금 외 수입은 남을 위해 쓰려고 했었다. 지난 번엔 군청 귀향 귀촌 담당하는 공무원이 지역 주민들 대상으로 '명심보감'이나 '논어' 강의를 개설해 줄 수 있느냐고 제안을 해왔다. 언감청 고소원이라고 감히 청할 수는 없지만 진실로 바라는 바였다. 내년 상반기부터 개설하기로 했다. 아마 군청 예산으로 강사비를 지불하는가 보다.


도시에 비해 형편없이 값싼 강사료지만 시골 분들께 그렇게라도 기여하고 싶은 마음에 재능 기부로 여겨 하기로 마음 먹었다. 수강하는 시골 어르신들의 부담도 적고, 강의를 매개체 삼아 당신들의 살아온 인생을 서로 주고받는 그런 기회를 만들어 주고 싶었다. 이제 이 나이에 무슨 고매한 학문의 세계로 들어설 것이 아니라. 하루 하루 무료하기 쉬운 노년세대의 삶에 조금이라도 활력이 되고 싶었기에 기꺼이 응했던 것이다. 이곳에 들어올 적에는 세상 사는 사람들과의 인연을 완전히 끊고 조용히 살려고 했다.


책을 읽다가 가만히 창문 밖을 바라본다. 젊은 시절부터 비내리는 풍경을 보는 것이 참 좋았다. 유리창을 타고 곱게 내리는 빗물이 그렇게도 보기 좋았다. 더욱이 현직에서 물러나 고요한 이곳에서 바라보는 창문 너머 비내리는 들판 모습과 저 멀리 집들의 풍경도 아름답기만 하다. 이럴 땐 커피도 괜찮지. 아내는 막걸리와 파전을 먼저 먹고 나중에 커피 마시라고 살짝 타박도 하지만, 그래도 이 기분이 사그리지기 전에 커피 한 잔을 탁자 위에 놓았다.



김이 모락 모락 올라가는 커피 향기도 내 마음을 묘하게 만드는 것 같다. 오늘 밤 늦게 아내가 도시로 돌아가면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 길게 난 들길을 걸어 볼 테다. 시골 새벽 들길은 걸어 본 사람만이 안다. 얼마나 그 걸음이 편한지 말이다. 아무도 없는, 그야말로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정적이 내 온몸을 감싸는 아침 공기도 그냥 좋다. 가을걷이가 대충 끝난 들길엔 사람 흔적이 꽤 드물지만 그것도 나름대로 풍취가 있다.


길게 난 들길을 따라 이웃 마을까지 걸어가 볼 테다. 약 8천 보가 된다. 걸어가면서 이웃 마을 정자 주위 고목나무 대열도 바라본다. 몇 년 전만 해도 정자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한다. 그런데 며칠 전에 이웃마을 정자를 들여다 보니 사람 흔적은 거의 없고 색이 바래고 먼지가 조금씩 보이는 정자 기둥들이 눈에 들어왔다.


정자도 사람들이 발길을 하지 않으니 진짜 외롭게 보인다. 나도 혼자라 외로울 수도 있겠지만 의외로 난 외로움을 별로 느끼지 못 한다. 그저 이렇게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것도 행복으로 다가온다. 어쩌다 오가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눌 때도 정겹다. 도시에선 안면이 없는 사람들에 인사를 건네는 것이 꽤 어색하지만, 이곳은 대부분 외로운 생활 때문인지 조금 낯설어도 인사를 건네면 아주 반갑게 맞아준다.


가을 초입 무렵에 길게 난 들길 따라 혼자 걸어가면서 생각에 잠긴 적이 있는데, 그때 마침 냇가에서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던 이웃 마을 사람들과 만난 적이 있다. 노령화의 영향인지 그 동네 사람들도 대부분 60대로 보였다. 하긴 이곳에선 60대가 어디 노인 축에나 들어가기나 하나. 완전히 새파란 청년이지만. 어쨌든 그분들과 냇가에 둘러앉아 담소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내가 시골에 들어온 것을 이웃 마을 사람들도 알고 있었다 한다. 자신의 마을이 더 좋은 곳인데 왜 안 오셨냐고 슬쩍 물어보기도 한다. 얼굴들이 참 순박하기 그지없다. 내가 고향 마을에 계속 있었다면 이 분들 얼굴도 낯익었을 테지.


그렇게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이분들도 내가 살고 있는 마을 사람들과 대부분 아는 사이였다. 이렇게 저렇게 얽히고 설킨 그런 이웃 마을 사람들이었다. 40년 가까이 도시에 살던 나만 시골의 정겨운 사람들 관게가 붕 떠 버려서 이런 낯선 상황이 되었을 뿐이다. 그래도 금방 친해졌다. 가끔은 당신들 마을에도 밤 마실 와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달라고 한다. 난 어렸을 때도 동네 아지매, 아재들이 옛날 이야기를 해달라고 부탁을 많이 받았다. 참 신기하지, 아니 내가 어떻게 그분들께 옛날 이야기를 해주어야 하지. 내가 들어야 할 텐데.


그런데 우리집엔 신기하게도 조선시대 고전 소설 책이 몇 권 있었다. <조웅전> <사씨남정기> 등을 비롯한 소설들이 누런 똥종이로 인쇄된 것을 내가 많이 읽었던 탓에 그 이야기를 들려 주었더니 틈만 나면 나를 방 가운데 세워 놓고 그 책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졸랐던 것이다. 그러면 내가 이 책 저 책 내용을 마구 섞어 이야기를 전해 준 기억도 있다. 결국 거짓말을 해준 격이 되었지. 하기사 고전 소설 자체가 허구로 된 서사이니 엄밀히 말하면 거짓이지. ㅎㅎ.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