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열전(史記列傳) 공부

노년 세대의 독서는 정말 재미 있는 책이 필요하다

by 길엽

AI가 그려준 그림입니다.


2011년인가 우연히 손에 잡은 <이사 李斯 천하의 경영자 상, 하> 가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당시 챠오성이라는 중국의 젊은 소설가가 진시황 시절 승상으로 천하를 경영한 이사의 일대기를 소설로 전개한 것인데, 상하 두 권 두툼했지만 정말 순식간에 읽어 내려간 기억이 뚜렷하다. 챠오성의 이 책이 판매 부수가 1억 권이 넘을 정도로 그 열기가 대단했다. 초나라 상채군의 말단 공무원 출신인 이사가 어떻게 중국 최초의 통일 국가 진나라 시황제의 부름을 받아 승상이란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올랐는가부터 함양 저잣거리에서 친족 전체가 멸족의 처형을 받았는가가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정신적으로 심란할 때 이 책을 읽으면 순식간에 진정되기도 했다. 가독성 최고의 책이었다. 현직 초기엔 조정래의 <태백산맥> 시리즈가 내 정신을 지배했다면 현직 끝 무렵 1/3은 바로 사기 열젼 관련 도서가 대뇌를 지배했던 것이다. 이 책들은 지금도 전혀 질리지 않을 정도로 재미있게 읽어내려 간다.



그것을 계기로 이사가 누구인가, 이사는 어느 시대 어떤 상황의 인물인가를 추적하다가 국내 사기 연구의 대가이인 김원중 교수의 사기열전 상하를 한 달에 걸쳐 읽어내려간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는 저녁마다 사기열전을 읽는다고 시간 가는 몰랐다. 당시 대한민국 정부의 인문학 정책에 대표적이 추천도서가 바로 김원중의 이 저서였다. 우선 책 표지가 매력적인 것도 판매 부수 제고에 큰 역할을 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그리고 만난 저자가 국내에서 사기에 관한 한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김영수 교수였고, 그때 이후 김 영수 교수와 전화를 주고 받으며 사기열전에 대해 숱한 질문을 던졌고, 그분은 정말 친절하게 가르쳐 주셨다. 김영수 교수의 사기 관련 도서는 대부분 구입할 정도였다. 인문학의 보고라는 말이 정말 실감났다. 역사 전공자가 아닌 내가 역사에 깊이 빠져, 그곳도 중국사 관련 도서에 이렇게 몰입할 줄은 전혀 몰랐다.


나 자신은 편독이 매우 심하다. 편식도 나쁘지만 편독은 더 더욱 문제가 된다지 않는가. 하지만 세상의 책은 무지 많고 읽어야 할 텍스트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인데, 여러 분야 책을 고루 고루 읽는다는 것은 비현실적이라 생각한다. 오히려 내가 좋아하는 분야의 책 중심으로 독서하는 것이 정신 건강에 유익하다고 본다. 내가 재미있으면 되지 않는가. 특히 60대 노년 세대들에게 무리한 독서는 오히려 건강에 역효과임을 알아야 한다. 욕심내서 책을 많이 읽겠다는 어리석은 생각은 아예 접아야 하리라. 이젠 내 삶을 여유롭게 누리기 위한 독서를 해야 하며, 에세이 같은 말랑말랑한 책을 권하고 싶다.


하지만 내 입장에선 10여 년 사기열전 관련 도서를 꾸준히 읽어오고 있는 상태라 다른 책들엔 별로 흥미가 없다. 앞으로도 史記 관련 책을 사서 읽어 가며 남은 생을 누리며 즐기고 싶다. 그리고 사람들이 나의 알량하고 일천한 재주를 요청한다면 기꺼이 달려가서 알고 있는 지식을 전해 주려 한다. 지금도 간간이 강의를 요청받긴 하지만 아직도 내 역량이나 능력이 많이 부족한 것을 실감하지만.



1년 전 이곳 시골 강마을로 낙항하러 올 때 제일 먼저 챙긴 것이 사기 관련 도서들이었다. 다른 책은 읽을 시간도 여유도 없으리라 여기고 그랬다. 최소한의 도서를 싸가지고 가자. 승용차 한 대에 충분히 실을 수 있는 권 수의 책이면 충분하리라고 여겼다. 물론 시간이 흐르면서 추가로 도서를 구입하긴 했지만 대부분 사마천 사기 관련 도서였다. 사기열전을 장기간 반복적으로 읽으면서 가슴에 남은, 가장 대표적인 것은 아래 문장이다.


"太山不讓土壤 故能成其大(태산불양토양 고능성기대)/河海不擇細流 故能就其深(하해불택세류 고능취기심)"


풀이하면 "큰 산은 흙덩이를 사양하지 않아 거대함을 이루었고 하해는 가는 물줄기를 가리지 않아 깊음을 이루었다"라는 뜻이다. 태산은 한 줌의 흙도 사양하지 않았고, 하해는 가는 시냇물을 가리지 않는다로 많이 언급되는 명문장이다. 대한항공이 중국에 처음 취항할 때 광고 카피로 활용하여 큰 화제가 된 문장이기도 하다. 여러 가지 의미로 다양한 시각에서 해석할 수 있는 문장으로서 인간 관계에 있어서 모든 사람이 중요하다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는 의도가 깔려 있다. 세상에 소중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던가. 내 인생에 그 누구든 어떻게 인연을 맺고 어떤 도움을 줄지 지금 당장은 모른다. 꼭 남의 도움을 바라면서 행동한다는 것보다 누구나 소중하게 대하면 언젠가 내 인생에 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사기열전에는 풍부한 스토리텔링적 요소가 곳곳에 들어가 있고, 수천 년 전의 인간 군상들의 행적에서도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큰 교훈을 주기에 읽어도 읽어도 곱씹을 수 있는 진정 고전(古典)이라 할 수 있다. 왕후장상 중심의 일반적인 역사책 성격이 아닌 인간이 역사의 주역이라는 사마천의 인식이 반영된 문장들이 감동과 교훈을 준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언제 읽어도 재미있고 편한 책 한 권이 있다면 그건 노년 세대의 삶의 중요한 요소가 아닐까 싶다. 조금 심란한 일이 있을 때 가장 먼저 가볍게 잡을 수 있는 책이라면 더욱 좋겠다. 그 책의 쟝르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우리에게 편안한 마음을 준다면 말이다. 그리고 하루 하루 삶이 더욱 알차게 느껴진다. 어쩌면 이 책 덕분에 나의 퇴직 후 삶이 더옥 좋았던 것이 아닐까 싶다. 앞으로도 이 책을 껴안고 살려고 한다.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