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질 무렵 강가에서

by 길엽

석양이 강 너머 봉화산을 빗겨 해질 무렵의 긴 햇살을 내리고 있다. 노을을 타고 내리는 저녁놀은 빨갛게 물들여져 있어서 하루 종일 태우고도 남은 온기를 부드럽게 보내주는 듯하다. 눈앞에 펼쳐진 강변 양쪽과 그리고 저 멀리 나지막하게 앉은 산봉우리까지 노을이 곱게 곱게 그리고 있다. 강마을도 고즈넉한 기운 속에 가만히 앉아 있고, 지난날 강물 위로 힘차게 비상하던 잉어떼들도 세월에 밀린 탓인지 그 기운을 잃어버린 듯 천천히 헤엄치고 물살에 제 몸을 맡긴 채 내려가고 있다. 이 시간 강물 위는 원래 참으로 아름다웠다. 젊은 날엔 이곳에 와서 저녁놀이 그려 준 강변 풍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되었다. 힐링이 안 되면 이곳에 앉아 생각에 잠기면 자기도 모르게 시간이 흘러가곤 했다. 저녁 무렵 강변 둑길은 그냥 내 생각이 머무는 곳이었다. 아무래도 좋았다. 고교 시절엔 자전거를 타고 와서 이곳에 머물렀고, 대학 때부터는 형이 산 90cc혼다 오토바이를 타고 홀로 이곳에 와서 둑길에 앉아 하염없이 바라보던 강변 풍경들.


군입대 전 며칠 돈안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마음이 서릴 때면 아무도 몰래 강변 이곳에 오토바이를 타고 홀로 와서 둑길 위에 가만히 앉아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오가는 마을 사람들이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어보기도 했지. 내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으니 그 장면을 본 동네 아재가 걱정이 되어 얼른 집으로 달려가 엄마에게 일러주기도 했던 날이 있었지. 엄마가 마당에서 바삐 오가면서도 내게 자꾸 물었다. 무슨 특별한 이유도 없어서 마땅히 대답할 만한 것이 없었다. 군입대를 앞두고 싱숭생숭한 마음에서 그러했을 뿐. 지금 생각하면 그 모든 것이 젊은 날 추억의 장면이 되었네.


어린 시절엔 홀로 고기 잡는 어부가 저녁 그물을 천천히 내리던 풍경도 종종 있었는데, 이젠 작은 배도 외로운 배도 보이지 않고 강물은 하염없이 발간 놀을 안은 채 세월따라 흘러가고 있다. 저렇게 흘러간 강물은 다시 오지 않는다 하지만 변함없이 저렇게 흐르고 있는 것은 자연의 윤회라고나 할까. 흘러간 강물이 바다에 이르러 다시 하늘로 올라가 구름이 되고 그렇게 비가 되어 저 위 상류에 내리겠지. 아득한 그 옛날 어린 시절엔 갈대밭도 정말 무성했다. 어른 키의 두세 배 정도 되는 갈대숲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달려가면 갈대 잎들이 간간이 스쳐가고 갈대숲을 지나면 갑자기 눈앞에 펼쳐지는 드넓은 모래사장. 여름날엔 모래사장 곳곳에 풀밭이 널려 있었고, 소떼가 여유롭게 넉넉하게 부른 배를 바닥에 깔고 누은 채 서녘하늘을 넘어가는 석양을 부드럽게 바라보고 있었지. 우리가 가끔 넓직한 소 등에 올라타도 너무나 순한 암소는 크게 움직이지도 않고 우리를 태워주었지.


이젠 세월이 흘러 흘러 본격적인 노년 세대에 접어들어 바라보는 저녁놀은 젊은 날과는 너무나 다르게 내 곁으로 다가온다. 어딘가 쓸쓸하고 불안하고 서운하고 기운을 잃은 모습으로 다가오는 저녁 무렵 붉은 노을이다. 갈대숲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사람들의 발길이 좀더 쉽도록 인공 잔디가 넓게 넓게 자리잡았다. 사람들 모습은 좀처럼 보이진 않지만, 주말이나 여름 휴가철엔 이곳 전체가 거대한 주차장이 된다. 조용히 살려고 강변 마을 이곳으로 낙향한 내 입장에선 오히려 안 좋은 공간으로 변한 것 같다. 원초적인 자연 그대로 있었으면 좋으련만. 갈대숲 무성하고 거목이 된 수양버들이 길게 늘어서서 청량한 바람이 한번 머물러가는 강변, 둑길엔 이름 모를 풀꽃들이 가득 가득 피어 오가는 사람들을 올려다 보며 반겨주는 그런 자연 말이다. 여기로 들어서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아득하게 어린 시절로 순식간에 돌아가 금방 추억에 빠지게 하는 그런 풍경이 그대로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큰 강물로 몰려 드는 지천 끝 무렵에 풀들이 고개를 숙이고 물살에 흔들리며 물고기들의 집이 되는 새벽 안개가 피어나는 풍경이 있었으면 좋으련만.


넓은 평야 논밭에는 왜 그리 사람들이 많았는지. 그땐 들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점심 밥이나 새참을 먹을 때면 길가던 나그네도 한데 어울려 맛있게 먹기도 했다. 모내기할 때는 수십 명의 아지매들이 나란히 서서 모내기 노래도 구성지게 불렀고, 간간이 모를 다시 쥐기 위해 허리라도 잠깐 펼 때면 자신도 모르게 한숨도 나왔지. 그땐 왜 아지매들만 모내기하고 남정네들은 양쪽에서 못줄만 잡고 옮겼을까. 나도 아버지처럼 못줄을 잡고서 한 줄씩 다 심으로 재빠르게 모 줄을 팽팽하게 당겨 옮겼지. 그 짧은 순간에도 아지매들의 대화는 풍성했다. 누구네 집 딸 시집간다. 누구네 아들은 대구 가서 취직했다 카더라. 우짜노 저 위 00띠기 시아부지는 밤새 세상을 베맀다 안 카나. 마을 앞 모티에 아~들이 학교에서 오다가 트럭한테 팅긴 돌메이 한테 다쳤다 가데. 등등. 그리고 모내기 노래가 나온다.


"모야 모야 노랑모야 얼른 얼른 자라서 우리집 큰집 만들어 도고, 모야 모야 노랑모야 얼른 얼른 자라나서 아들하고 쌀밥먹고 호강하자. 모야 모야 노랑모야~"


가사는 제대로 기억나진 않지만 대체로 이런 것이었다. 마을 전체 집 모내기를 품앗이로 하다 보니 모내기 기간은 동네 사람들이 거의 한 곳에 모여 밥도 같이 먹고 모내기 일하고 저녁에 다시 풍성한 저녁 식사를 대접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여동생과 나는 낮에 엄마가 고생한 덕에 정학이 아지매 집 그 요리 솜씨 탁월한 아지매가 해준 저녁밥을 맛있게도 먹었네. 엄마는 우리 남매를 꽉 끌어안고 숟가락으로 일일이 떠먹여 주었다. 우리가 충분히 먹을 수 있는데도 귀한 반찬 놓칠까봐 그랬겠지.


내 유년 시절 우리 마을 사람들은 정말 선하고 마음이 고왔다. 동네 아이들이 3km여 거리를 그것도 큰 버드나무들이 가장자리에 두 줄로 나란히 섰던 비포장도로를 따라 학교 갔다 돌아오는 것을 보면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들판에서 뭐든 먹여 보냈다. 니 집 내 집이 따로 없었다. 높다란 산고개를 넘어오는 하교길은 어린 국민학생에겐 쉽지 않은 길이었다. 어쩌다 군 학력경시대회나 고전 경시대회가 있으면 몇 날 며칠이고 학교에서 늦게까지 책 읽고 외우고 선생님께서 확인 테스트 하는 날엔 컴컴한 저녁무렵에 공동묘지를 보면서 걸어오기도 했다. 둘째 아들이 걱정이 된 엄마와 아버지가 고개마루까지 마중나오기도 했고.


중학교를 졸업하고 대구 시내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을 때 토요일 시골집에 가다가 만난 아지매들이 참으로 정겹게 맞아 주었고, 아재들은 꼭 성공해서 돌아와 마을 사람들의 기를 좀 세워달라고도 하셨다. 인근 마을에 비해 내가 자란 고향 마을엔 공부를 한 사람이 너무 적었다. 인근 어느 마을은 삼 형제가 모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여 모두 판사를 지낼 만큼 '판사집'이라고 불렸지. 대궐 같은 기와집인 그 댁을 지나가노라면 뭔가 커다란 위엄이 느껴졌다. 세월이 흘러 최근엔 그 집도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내 고향 마을에선 대학 졸업자도 별로 없었다. 외사촌 형님이 국립대학을 졸업했고, 그 뒤를 내가 이었고, 한참 세월이 지난 뒤 외삼촌의 손녀 그러니까 내겐 외오촌이 되는 조카딸이 국립대학 의대에 합격하여 모두 우리 친척들에게서 대학생이 나왔다. 나보다 후배들 쪽에선 그래도 대학생이 조금씩 배출되긴 했지만. 내가 고등학교를 다닐 적에는 마을 사람들이 내게 정말 기대를 많이 했다.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것이 큰 죄스러움으로 남았다.


아침에 학교 갈 적에는 우리 마을 아이들이 40명은 족히 되었다. 대부분 비슷한 시간에 동네 앞 버스정류장에서 출발하는데, 꼭 지각하는 아이가 있었지. 마을마다 6학년 한 명에게 책임자를 정해놓고 인솔하게 했는데, 내가 그것을 주로 맡았지. 그것도 자리라고 완장 차고 으스대던 내 어린 시절의 어리석은 모습이여. 우리 마을도 꽤 먼 거리였는데 그래도 오가는 버스라도 있지. 산골 마을에서 오는 아이들은 학교 오가는 길이 멀기도 했고, 버스 노선도 없었다. 그리고 그 동네 아이들은 다른 동네 아이들과 달리 기골이 장대한 경우가 많아 학교 운동회를 하면 달리기부터 그냥 싹 쓸었다. 북방 기마민족처럼. 참 그렇게 말하고 보니 우리 마을 인근 동네도 특별했다. 광산 이씨 집성촌 마을이었는데, 아이들이 대부분 피부가 하얬다. 남자 아이들은 잘 생기고 여자애들은 이뻤다. 공부 상위권은 모두 그 동네 아이들이 다 차지했다. 그 마을에선 어릴 때부터 천자문 같은 한문을 따로 배웠다는 소문도 있었지. 그 모든 것들도 추억이 되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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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오후 내내 고전수업 책을 읽다가 밖으로 나왔다. 아래 '거안사위'는 정관정요에 나온다.



거안사위(居安思危) 평안할 때에 위태로워질 것을 생각하라


『정관정요(貞觀政要)』는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시행한 정치의 언행을 기록한 것 중에서 주로 당태종이 신하들과 나눈 얘기를 모아 놓은 책이다. ‘정관’은 ‘주역' 계사전(繫辭傳)에 나오는 ‘천하를 다스리는 도가 바로 정관이다.’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태종이 죽은 지 약 50년이 지난 후에 오긍(吳兢)이란 역사가가 후세에 규범이 될 만한 내용을 엮어서 10권 40편으로 편찬한 책이다.


오긍은 ‘정관정요’를 집필하면서 모든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는 春秋筆法(춘추필법)을 고수했다. 물론 춘추필법이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는데 방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포폄을 명확하게 밝헤는 것을 강조한다는 점을 알 필요가 있다. 사관의 역사적 관점과 비평이 있다는 것이다. 시비를 밝힌다는 것이 간단하게 보일지 몰라도 역사 현장에서 역사적 사실을 기술할 때 특정 사건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드러내 평가할 때 현실적으로 매우 위험할 수도 있다. 그래서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기술하고 그에 대한 포폄을 더한다는 데 위험이 따르는 것이다. 정관정요에서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기술했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당현종 개원 9년(721)에 ‘측천실록’을 편찬케 됐다. 재상 장열(張說)이 자신에 관한 기록을 바꿔줄 것을 강력 요청했다. 측천무후 때 보여준 행보를 가감 없이 그대로 기록한 탓이다. 오긍이 정중히 거절했다. 사사로운 인정에 흔들린다면 어찌 직필(直筆)이라는 명성을 얻을 수 있겠느냐고.


당태종의 최고 참모였고 직언을 거침없이 했던 위징이 죽자 당태종 이세민이 아래와 같이 탄식한다.

“구리로 거울을 만들면 가히 의관을 단정하게 할 수 있고, 역사를 거울로 삼으면 천하의 흥망성쇠와 왕조교체의 원인을 알 수 있고,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자신의 득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짐은 일찍이 이들 3가지 거울을 구비한 덕에 허물을 범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지금 위징이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마침내 거울 하나를 잃고 말았다!”

여기에 언급된 동경(銅鏡)과 사경(史鏡), 인경(人鏡) 흔히 ‘삼경(三鏡)’이라고 한다. 원래 경(鏡) 감(鉴)을 바꿔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동감, 사감, 인감을 ‘3감’이라고 한다. 군주가 3감을 통해 스스로 경계하며 제왕의 덕을 쌓는 것이 바로 삼감지계(三鑑之戒), 줄여서 鑑戒(감계)라고 한다. 당태종이 ‘사감’과 ‘인감’을 역설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새 왕조를 이끌 유능한 인재의 필요성 때문이었다. 그는 인재를 얻기 위해 노심초사했다.



평안할 때 위태로움을 생각하라는 '거안사위'은 유비무환과 같은 뜻의 한자성어인데 이와 유사한 한자성어로 곡돌사신(曲突徙薪)이 있다. 설원(說苑)》〈권모편(權謀篇)〉과 《한서(漢書)》〈곽광전(霍光傳)〉에 나오는 성어인데 "굴뚝을 꼬불꼬불하게 만들고 아궁이 근처의 나무를 다른 곳으로 옮긴다."는 뜻이다. 화재가 나기 전에 그 원인을 미리 제거라는 충고에서 나왔다.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