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위기 있는 호숫가 커피숍 벤치에 앉아 안개가 피어오르는 물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세상은 참으로 조용하다. 주말이면 많은 사람들이 차를 타고 와서 혼잡하기만 하던 이곳도 주중 낮엔 방문객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평소 커피를 거의 마시지 않는데다가 행여 커피가 땡기면 믹스 커피 정도에 만족하는 터라 오늘도 주스 한 잔 커다랗게 놓고 앉아 물과 산을 고루 고루 바라본다. 물빛도 부드럽고 곱다. 조용함을 가득 안은 채 물안개가 서려 있는 물빛이라 하늘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그림이 된다. 겨울색 완연한 산봉우리와 계곡들도 참으로 고즈넉하다. 오늘따라 혼자라서 좋았다. 때로는 누군가 대화를 나누며 담소를 하는 것이 좋긴 했지만 오늘은 그냥 혼자 있는 것이 좋다. 찻집 주인은 꽤 젊은 부부다. 내가 이곳에 가끔 오기 때문에 아직은 그리 친하진 않지만 그래도 내가 올 때마다 참으로 반갑게 맞아준다. 가지고 온 책을 펼쳐 읽기 시작한다. 지난 달 일본 시모노세키-히로시마 산골마을 世羅町을 방문하고 돌아오면서 시모노세키 국제선 터미널 근처 쇼핑가 4층 KUMAZAWA 서점에서 구입했다. 함께 간 다른 이들이 쇼핑하는 시간에 나는 서점에서 책을 구입하고 그곳 벤치에 앉아 책을 읽었지. 이번에 사온 책은 히가시노 작품이다. 최신 비즈니스나 경영 관련 아니면 전원생활에 관한 책을 주로 샀는데. 이번엔 그냥 부담없이 말랑말랑한 소설책을 샀다. 東野圭吾 作 <ブラック•ショーマンと名もなき町の殺人> 가벼운 문고판이라 분량도 그리 맍지 않고 스피드 있는 서사구조로 진도가 빨리 나간다. 히가시노가 대단한 이야기꾼임을 알게 된다.
책을 몇 쪽 넘겨가며 정신없이 읽고 있는데 낯선 여성 한 사람이 뒤로 옆으로 지나가서 찻집 앞 테라스 제일 아래 쪽 난간에 기대 섰다. 난 모르는 사람이라 그냥 슬쩍 본 다음에 책을 다시 읽는다. 주인공 眞世의 아버지가 죽은 사건 관계자들, 범죄현장에선 용의자가 되겠다. 여러 용의자가 등장하는 장면이라 누가 나중에 범인으로 밝혀질지 참 궁금하다. 시골 마을 읍내 영어 교사로 퇴직하여 혼자 지내다 살해당한 아버지를 둘러 싼 여러 인물들의 행적이 세세하게 펼쳐지고 있다. 이렇게 분위기 좋은 호숫가에 시집이라도 가져와서 읽었으면 더욱 좋았으련만, 한번 손에 잡은 책은 끝까지 읽기 전에 다른 것을 거의 하지 못하는 특이한 내 성격 때문에 이곳 분위기와 상관없이 어제 읽다 만 책을 여기까지 가지고 온 것이다.
책에 깊이 빠져 들다 문득 눈을 위로 들어 보니 찻집 주인이 언제 왔는지 사람 좋은 인상으로 미소를 지으며 내 앞에 앉아 있다. 내가 주문만 해놓고 마실 생각이 없고 마침 찻집에 손님이 거의 없어서 내 앞에 앉았단다. 그렇다고 책을 읽고 있는 사람한테 말을 걸기가 뭣했단다. 나도 웃으며 주스 잔을 조심스럽게 잡아 내 앞으로좀더 당겨놓았다.
"쌤 책 재미 있나요? 전번에도 그냥 책을 가지고 오셔서 한참 읽고 계시다 가셨는데, 평생 읽은 책 지금 다시 보면 지겹지 않나요? 난 평소 책을 읽을 시간도 없고 읽을 실력도 안 되어 잘 안 보는데, 쌤께선 저와는 너무 다르네요. 그래도 이젠 좀 시엄시엄 쉬어가면서 편안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지 않나요? 쌤께서 의련히 알아 하시겠지만. 참 그라고 저 앞에 계신 여성 분 자꾸 쌤 쳐다보시는데 혹시 아시는 분인가예. 제가 알아봐 드릴까예. 지난 번에도 오셔 가지고 아무 말없이 호숫가만 가만히 쳐다 보고 그냥 가셨거든요. 그렇다구 무슨 사연이 있는지 물어 볼 수도 없고. 아이고 제가 오지랖도 넓지예. 쌤께서 알아서 하실 일인데. 하하."
"아입니더. 저분 제가 잘 모르는 분입니다. 고향 마을에서 국민학교와 중학교만 졸업하고 고등학교부턴 대구 시내로 나가 생활해서 지역 사람들 특히 이웃마을 사람들은 제 동기가 아니면 잘 모릅니다. 어쩌다 선후배 중에 안면이 있어서 알 수는 있어도 친하진 않지요. 국민학교 총동창회에 언젠가 한 번 갔는데, 옆 테이블에서 후배들이 몇 명 몰려와 인사를 하는데 전 잘 모르겠더군요. 그들은 저를 잘 안다고 반갑게 해주었지만서도. 저 여성 분 연배가 꽤 있어 보이는데 제가 잘 모르는 사람이니 억지로 알아볼라 카지 마이소. 괜히 이 찻집 소문 잘못 나면 사장님께 폐가 될 낀데."
그 여성을 제대로 보지도 않았지만 아무래도 아는 얼굴이 아니다. 얼굴을 정면으로 보면 알 수 있으려나. 뒷모습을 살짝 훔쳐 봤는데, 긴 남색 코트에 머플러가 뒤로 조금 보이고 숏 커트형 머리 곳곳에 하얀 눈이 조금씩 내렸다. 나이는 꽤 있어 보인다. 그리고 키는 한 160cm 남짓. 정면으로 보면 좀더 정확하게 알겠지만 그 정도에서 멈춘다. 어차피 내가 아는 사람이 아니니 말이다. 그래도 찻집 주인의 말을 듣고 여성이 있는 쪽으로 몇 번 시선을 보내게 된다. 궁금하다. 어떤 사연으로 왔을까. 그것도 최근 두 번씩이나. 더 이상 책을 읽을 수 없다. 고즈넉한 호숫가 찻집 겨울 분위기를 한껏 누리고 싶었는데, 그것도 생각처럼 잘 안 된다.
책을 덮고 주스 빨대를 통해 마시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여성이 있는 쪽으로 흘끔 흘끔 바라보았다. 흡사 젊은 날 어느 찻집에서 만난 여학생 얼굴이 궁금하여 슬쩍 슬쩍 훔쳐보는 기분이다. 이 나이에 무슨 짓이람. 쯧쯧. 찻집 주인도 카운터에 앉아 나를 비스듬히 내려다본다. 살짝 미소 띤 모습이 엿보인다. 내 심정을 조금이라도 이해한 것일까. 그 여성도 그쪽 테이블에 홀로 앉았다. 나에게는 등만 보인다. 테이블 사이는 5~6m 정도이니 고개를 돌려 정면을 보기만 해도 혹시 아는 사람인지 아닌지 판단이 가능할 것 같다. 오늘따라 우리 두 사람만 손님으로 와 있다. 인적이 드물다곤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닐 텐데. 찻집 안쪽 불이 환하다. 아무래도 물안개 때문에 불을 밝힌 듯하다.
한참이나 앉아 있어도 그녀 쪽에서 무슨 움직임이 없어 내가 먼저 일어섰다. 테이블 아래 쪽으로 내가 앉은 의자를 쑥 밀어넣고 일어서는데 어렵소 저쪽 그녀도 천천히 일어서면서 날 바라본다. 나와 비슷한 연배로 보인다. 얼굴 전체가 동그란 계란형이고, 눈가가 가늘다. 살짝 미소를 짓는 듯하다. 흰 머리가 꽤 보인다. 순간 그녀 얼굴을 한꺼번에 스캔했다. 나이가 들어도 꽤 이쁘다. 그런데 어딘가 낯익은 얼굴인데 정확하게 생각나진 않는다. 그냥 어디선가 한번쯤은 본 듯한 얼굴이다. 찻집 주인에게 값을 치르고 찻집을 떠나 길게 난 둑길을 홀로 걸었다. 누굴까.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인데, 정확하게는 생각이 나지 않네. 우리 고향마을 내 비슷한 연배 여성이라면 내가 몰라볼 리는 없고, 이웃 마을 출신일까. 지금 이렇게 홀로 둑길을 걷다 보면 어느 새 그녀가 날 따라오지는 않을까. 둑길을 내려서서 더 길게 난 들길, 흙길로 가면 그녀가 따라 붙지나 않을까 오만 생각이 다 들었다. 내가 지금 젊은 시절도 아닌데 무슨 그런 황당한 기대를 하고 있는 걸까. 쯧쯧.
둑길을 천천히 걸었고, 다시 내려서 들길로 접어 들었는데 뒤에선 인기척조차 들리지 않는다. 멀리서나마 다급하게 날 불러주지나 않을까. 들길 가운데 즈음에 와서 드디어 힘을 내어 돌아보았다. 그 넓은 들판에 오직 나만 홀로 서 있다. 둑길에도 사람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다시 찻집으로 올라가나. 그건 아니지. 그녀가 날 따라올 것이란 생각 그건 만구 내 착각이었다. 호숫가 찻집에서 둑길, 들길을 걸어 골목길에 들어섰다. 저쯤 내 거처가 있는 집이 보인다. 아주 오랜 옛날 슬라브 2층 주택이다. 당시엔 저렇게 지은 2층 슬라브가 유행이었고 그때 사람들에게 고급 주택으로 인식되었었지. 새마을 운동 시절 초가집들을 과감히 걷어내고 슬레이트 집으로 지붕 개량을 많이 하였고, 경제적으로 좀더 여유 있는 집에선 저렇게 2층 슬라브로 번듯하게 올렸다. 시골 마을 당시 우리집은 아주 옛날 기와집 그대로여서 친구네 새집 슬라브 주택에 놀러가서 2층 다락방에 올라가 한참이나 놀았다. 그냥 그집이 부러웠다. 이젠 낙후된 형태가 되었지만.
내가 이곳에 거처를 정할 때도 굳이 2층 슬라브를 택한 것도 어찌 보면 추억에 끌려 그리 한 것이었을 것이다. 내가 살던 시골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에서 그런 류의 기와집도 없으니 그래도 추억 속에 있었단 수많은 슬라브 주택이나마 거처로 정하고 싶었던 것이다. 오늘 호숫가 찻집에서 잠깐 들렀다가 괜히 낯선 여인을 보고 잠깐 동안에 많은 생각을 하였지만 거처하는 곳이 가까워지면서 그 생각들이 거의 사라졌다. 골목길을 한 번 꺾으면 마을을 회돌아 나가는 도랑이 끝나고 또 한번 꺾으면 마을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두 번째 골목길을 꺽으려 드는데, 저쯤에서 아까 그 여인이 걸어오고 있다. 자그마한 시골 마을에서 골목길은 좁기도 하고 길이도 짧다. 보는 순간 금방 가까워진다. 그 여인이 점차 가까워지면서 내 마음 속에 다시 호기심이 생겼다. 우리 어디서 만났을까. 분명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인데 어째 직접 확인해 봐 등등 생각이 순식간에 스쳐 갔다.
둘이 점차 가까워지고 스쳐 지나갈 즈음에 그녀가 나에게 갑자기 물었다.
"혹시 내 모르겠어요?"
순간적으로 내가 당황했다.
"예 잘 모르겠네요. 누구신지."
"내 중학교 3학년 때, 그쪽은 2학년 무슨 요일인지는 잘 기억 안 나는데 오후에 집에 갈라꼬 했지요. 그때 학교 교문 나가는 흙길에서 머스마들 셋이서 날 괴롭힐 때, 그쪽이 날 도와줬는데. .......,"
아하 생각났다. 그제서야 뚜렷이 떠올랐다.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군 고전 경시대회 학교 대표로 선정되어 학교에서 오후 늦게까지 남아 그리스로마신화 시리즈를 반복해서 읽고 내용을 암기하던 때였지. 우리 학교 전체에서 단 두 명이 학교 대표로 나가게 되었다. 진짜 학교 대표는 그야말로 천재였다. 당시 고입 연합고사에서 그 녀석만 체력장 포함하여 200점 만 점에 198점 정도 나오고 그 다음 2위 그룹이 170점대 중반이었다. 여학생과 나를 포함하여 대여섯 명이 2위 그룹을 형성하고 있어서 진짜 대표는 그야말로 넘사벽이었다. 훗날 그 녀석은 비평준화 마산고등학교로 입학하여 서울대학교에 들어갔던 진짜 천재였다. 난 학교 대표일 뿐이지 실력은 그리 뛰어나지 않았던 것을 인정하지. 단 당시 학교 당 2명씩 선발하여 군 경시대회에 보내게 되어 나도 같이 갔을 뿐인데도 괜히 으스대던 때였지. 지금 생각하면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을 정도다. 어쨌든 그렇게 둘이서 고전경시대회 대비하여 아이들이 모두 돌아간 교실에서 선생님께서 주신 책을 읽고 또 읽었다. 난 내용을 열심히 메모하고 암기했지만 천재인 그 녀석은 도무지 쓰지도 않고 암기도 않더군. 그냥 책들고 혼자 중얼 중얼거리며 왔다 갔다 한 것만 기억나네. 그래도 군경시대회 전체 최우수상을 받고 난 그냥 참가에만 의미를 두는 창피한 결과를 받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렇게 고전 책을 열심히 읽다가 문득 창문 너머 교문쪽으로 바라보는데 학교 본관에서 교문 쪽으로 길게 난 길에서 하얀 교복을 입은 여학생 한 명을 놓고 남학생 세 명이 가방을 빼앗는지 묶은 머리를 잡아 댕기는 것인지 모르지만 뭔가 괴롭히는 것이 보였다. 그 장면을 보는 순간 당장 교실 문을 박차고 달려가 그들 앞에 서서 그녀를 지켜주었지. 그녀를 괴롭히지 말라고 하면서 길가에 꽂혀 있던 새마을 운동 팻말을 뽑아서 마구 흔들었고, 그 사이에 그녀는 교문을 달려나가 마침 대구에서 오는 시외버스에 올라타서 봉변을 당하지 않았다. 난 그 자리에 남아 3학년 형들 셋과 마주 싸웠지만 점차 맞게 되었고, 이대로 있다간 안 되겠다 싶어서 틈을 타서 막 달려 도망갔지. 다음 날 그 반에 끌려가서 무지하게 맞았다. 맞는 도중에 핸드볼 선수이던 집안 친척인 동기이자 친구가 달려와 날 구출해 주고.
아하 그때 그 선배였구나. 그때 잠깐 본 얼굴이었지만 참 이뻤던 기억이 났다. 그때 그 짧은 순간에도 그녀 얼굴을 살펴보았지. 동그스름하게 이뻤다. 그 사건도 시간이 가면서 점차 잊혀졌고, 동문회에 가면 남자 선배들 셋과도 화해하고 잘 지내게 되었지. 그녀는 기억에서 사라졌고. 세상에 그때 그 여학생이, 참 예뻤던 그 여학생이 지금 흰머리 곳곳에 얹힌 60대 초반 할머니가 되어 이곳에 나타나다니. 그래서 찻집에서 잠깐 봤을 때도 안면이 있었던 거로구나.
그렇게 그녀와 있었던 오래 전 사건들을 떠올리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보니 그녀는 골목길을 벗어나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여긴 왜 왔을까. 내가 여기 있는 거는 어찌 알고. 아니 내가 있는 것을 알고 일부러 온 것이 아니라 옛 추억을 더듬어 시골 마을에 들어왔다가 호숫가 찻집에 구경왔다가 우연히 날 만난 것이겠지. 설마 날 보러 일부러 여기까지 왔을라고. 내가 생각해도 난 참 자뻑이 너무 심해.
집으로 들어오니 마당에 주인 할머니가 나물을 씻고 있다가 날 반겨준다.
"디럼 어디 갔다 왔는교? 요새는 전에만치 잘 안 걷네예. 인자 여~ 생활에 길들인갑심더. 처음엔 맨날 아침 일찍 일어나 그렇게 열심히 걸어쌓더니. 식사 준비할까예? 들판에 갔다오면 금방 배가 고플낀데. 우짜까예?"
"예, 간단하게 준비해 주세요. 어제 먹다 남은 우거지국 그거 좀 먹고 싶습니더."
"아이고, 디럼 우거지국 금방 다 합니더. 쫌만 기다리쎄이. 그래도 그렇지 우째 어제 묵다 남은 거 다시 냅니꺼. 디럼이 우거지국을 그리 좋아하는 줄 몰랐네. 씻고 방에 들어가 있으면 내 금방 해가지고 오께요. 그라고 디럼 혹시 어떤 여자 한 찾아왔던교? 아까 여~ 와서 디럼 찾는 여자 하나 있었는데, 디럼 이름을 우째 알고 왔는지 모르지만 도시에서 인연이 있던 사람이 아일까 몰라. 왔던교? 아까 디럼 나가고 나서 왔길래 들에 가면 볼 수 있을 끼다 카고 보냈는데, 만났는교?'
"아, 예 봤심더. 그런데 저 우 찻집에 테이블 떠라가~ 앉았을 때는 몰랐는데 안면은 있더라꼬요. 근데 거~서는 생각이 잘 아나고 얼굴은 본 거 같다는 생각만 했지요. 그러다가 골목 들어오는 길에 잠깐 보고 딱 한 마디 나났는데, 내 중학교 2학년 때 사연이 있던 1년 선배였심더. 별 다른 대화는 몬 했고요. 왜요. 붜라 카던가예?"
"언지예, 그냥 디럼에 관한 거 몇 개 묻데예. 그래서 디럼한테 허락도 안 받고 내 아는 거 다 갈카 줬심더. 괘안치예. 난 혹시 도시에서 디럼캉 우째 우째 아는 사인강 했지예. 아니면 디럼이 좋아했끼나. 그리 큰 사연은 아닌갑심더. 그 여자 저짝 씩실 마을 사람인 거로 알고 있는데, 이야기 하는 기 약간 오락가락하데예. 했던 말 또 하고 금방 한 말 금방 싹 잊아뿌고. 씩실 마을에 소문난 그 여자 아인가 몰라. 그 여자가 그 여잔강 모르겠네."
집주인 할머니가 전해 준 씩실 마을 소문은 이랬다. 그 동네 출신 여자 하나가 도시로 나가 남자캉 잘 살고 있는데 나이 60이 넘을 즈음에 치매 초기가 왔단다. 복이 없을라 해서 그런지 몰라도 그 남편도 밖에 일하러 나갔다가 무슨 사고를 당해서 집에서 하루 종일 누워 있는 상황이 되었다고 한다. 가족들도 나 몰라라 하고, 심지어 자녀들도 발걸음을 하지 않더란다. 세세한 사연은 모르지만 어쨌든 그 여자의 지난한 삶에 대해 씩실 마을 사람들이 알고 있었지. 도시에서 살았지만 경제적으로 그리 여유도 없어서 아이들 교육도 제대로 뒷받침해주지 못해 아이들 불만이 꽤 많았다네. 3남 2녀 아이들일 뿔뿔히 흩어지고. 그것도 촌에 남은 부모님한테 받은 논밭을 모두 처분하여 5남매에게 모두 넘겨 준 그후로 아이들 발걸음이 싹 끊어졌다 한다. 사고를 당한 남자 그리고 치매 초기인 여자만 덩그라니 남은 집이었다. 지자체나 사회봉사 단체 등에서 도움의 손길이 오긴 했지만 두 사람의 삶이 고달프기 그지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여자는 견딜 수 없었는디 가끔 가출하여 찾아 보면 고향 마을 인근에 걸어다니고 있었다고 한다. 사회복지사가 어떻게 알고 경찰에 연락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지만 또 가출하고. 아이들에게 연락을 해도 잘 안 받고. 그런 소문이었다.
"디럼, 있잖아요. 내가 지금 80 밑자리 깔아서 나이를 묵을 만큼 뭈다 아인교. 나도 옛날 생각 마이 닙니다. 아 아바이 살아 있을 때 그래도 내 줄 끼라고 돌끼 오일장에 다녀올 적에 동동그리무 하고 거울 그라고 빗까지 사다 주면 그래 좋데예. 그런데 저리 세상을 버리고 갔뿌고 나이 살 낙이 딱 없어지는 기라요. 아~들이야 지즘 살림 하고 잘 살면서 날 챙겨주지만서도 그래도 아 아바이캉 어디 놀러 가고 항쿤에 자태 앉아 이야기할 때가 좋았지요. 들에 일할 때도 딱 둘이 붙어가 할 때 좋았지요. 그런기 그립네요. 그리움이라 카는 기 죽은 사람 기억도 하고 내 사는 힘도 되는 거 같아예. 디럼 그리 생각 안 하는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