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길을 걸으며

by 길엽

새벽을 지나 아침 햇살이 서서히 빗겨 내리는 지금 세상 조용하다.


이곳에 들어와서 좋은 것이 여럿 있지만 그중 가장 내세울 만한 것은 고즈넉한 시골 들길을 혼자 걸으며 생각에 잠기는 일이다. 지난 날 정말 너무나 정신없이 살아왔다. 도시에서 하루 일상이 왜 그리 바빴는지 도무지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작정 열심히 애를 쓰며 그렇게 살았다. 무슨 인생의 거창한 목표를 이루겠노라는 마음이었는지 모르지만. 어쩌면 젊은 날 가족을 위해 주위 사람들과 즐겁게 지내기 위해 지역 사회에 기여하는 보람을 갖기 위해 그렇게 치열하고 가열차게 살았기에 지금 내 삶에 여유로움을 가져다 주었는지 모른다. 진짜 현재 내 솔직한 심정은 이렇다. 몸만 지금처럼 아프지 않고 건강하다면 내 생애 중에 지금이 가장 행복하고 보람을 느낀다. 조금만 움직여도 주위 사람을 도와 줄 수 있고, 그들의 삶에 조금이라도 즐거울 수 있도록 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내 알량한 재주라도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 준다는 사실이 나를 기쁘게 한다.


나를 기쁘게 하는 것들은 참으로 많다. 새벽 일찍 일어나 눈을 뜨면 청량한 시골 공기가 방안으로 들어와 나를 감싸고, 도시에서 가져온 책들이 비록 적은 권 수지만 저렇게 책상 위에 앉아 날 기다리고 있고, 나보다 더 일찍 일어나 주인집 할머니가 맛나는 아침밥을 지어 놓고 날 부르고, 때 마침 열린 창문으로 새벽이 지나 아침 햇살이 기게 비스듬히 내려오고, 활짝 열어제친 방문 저 멀리 길게 난 들길이 눈에 들어오고, 아침밥을 먹고 아무런 생각이 없이 지금처럼 고요 속에 걸어가고, 나지막한 구릉을 지나 가을 추수가 끝난 황량한 들판이지만 어린 시절 추억을 떠올리고, 조용히 흘러가는 시냇물 속으로 유영하는 물고기들의 헤엄치는 모습도 보고, 저 멀리 산 녘엔 조금 쌓인 눈이 조선 시대 진경 산수화같이 내 마음으로 걸어오고, 길가 외딴집에 새벽 안개를 물씬 머금고서 천천히 지나가는 나를 바라보는 등등 이 모든 것들이 지금 나의 삶을 참으로 행복하게 한다.


들길을 걸으며 지금은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으련다. 그냥 무작정 걷고 또 걷다가 힘이라도 들면 잠시 쉬어가고 멀찌감치 왔다 싶으면 무심코 발길을 돌리려 한다. 세상 아무도 내게 어떻게 하라고 강요하지 않는 지금 현재가 내 생애 최고라는 생각뿐이다. 오늘 낮엔 마을 사람들이 민물고기 매운탕으로 함께 먹으러 가자고 한다. 이번에 내가 헌 턱 내겠노라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최근 내가 색소폰을 배우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 터라, 맛난 음식에 막걸리를 곁들이며 내 색소폰 연주를 부탁하더라. 아직 진짜 왕초보라고 몇 번이나 손사래쳤지만 그들 아무도 내 진짜 초보 실력을 믿지 않았다. 강요도 이런 강요가 있나. 내가 자꾸 완곡하게 계속 거절하니 강요를 반복하는 재미에 빠진 모양이다. 내가 못 한다고 한 마디 할 때마다 그들은 떼거리로 연주할 것을 강요한다. 그것도 아주 신난다는 듯이. 이곳에선 이렇게 모여 목소리를 함께 내는 일도 극히 드문 일이니 더욱 재미를 느끼는가 보다. 시골 사람들도 인심이 야박하네. 하기야 이것과 인심이 무슨 관게가 있나. 마음 속으로 별별 생각을 다하며 핑계를 대지만 이젠 어쩔 수 없다. 나중에 뭘 연주할까는 나중 문제고 지금은 아침 산책에 몰입해야지.


내가 현직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노년세대에 접어들었는데 마을 전체에서 나이를 견주어 보려 해도 이분들과 잽이 되지 않는다. 참 좋은 때지 하는 말을 많이 들었다. 진짜 내 마음 속으로 좋은 때지 하고 생각은 했지만 막상 마을 사람들 평균 연령이 70대를 훌쩍 뛰어넘고, 80대 할아버지가 너끈하게 경운기를 운전하며 들에서 논밭까지 갈아 넘기는 일이 흔한 장면이다. 그렇다고 이 분들이 농사에 그렇게 열심히 한다고 건강하다는 뜻은 아니다. 워낙 오랜 세월 농삿일을 하다 보니 습관적으로 아침에 일어나 들판에서 일할 뿐이지 당신들 스스로 몸을 돌볼 수 없었기에 여기 사람들 말마따나 온 전신이 다 아픈 경우가 많다. 그래도 들일 조금 하고 논밭에 곡식이나 채소 등을 심었다가 도시에 나간 자식들 손주 먹이려고 정성껏 농사짓는 이야기를 많이 접한다. 하기야 그 자체만으로 행복한 일이지.


내가 현직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노년세대에 접어들었는데 마을 전체에서 나이를 견주어 보려 해도 이분들과 잽이 되지 않는다. 참 좋은 때지 하는 말을 많이 들었다. 진짜 내 마음 속으로 좋은 때지 하고 생각은 했지만 막상 마을 사람들 평균 연령이 70대를 훌쩍 뛰어넘고, 80대 할아버지가 너끈하게 경운기를 운전하며 들에서 논밭까지 갈아 넘기는 일이 흔한 장면이다. 그렇다고 이 분들이 농사에 그렇게 열심히 한다고 건강하다는 뜻은 아니다. 워낙 오랜 세월 농삿일을 하다 보니 습관적으로 아침에 일어나 들판에서 일할 뿐이지 당신들 스스로 몸을 돌볼 수 없었기에 여기 사람들 말마따나 온 전신이 다 아픈 경우가 많다. 그래도 들일 조금 하고 논밭에 곡식이나 채소 등을 심었다가 도시에 나간 자식들 손주 먹이려고 정성껏 농사짓는다는 이야기를 많이 접한다. 하기야 그 자체만으로 행복한 일이지. 이곳에서 누군가 그랬지


"도시에서 손주가 오면 좋고 가면 더 좋고"


이제 내가 이곳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고 마을 사람들 별로 많진 않지만 그들과 어울리다 보니 점차 마을의 일원이 되어 가는 듯한 생각이 든다. 가끔 저녁밥을 먹고 내 방 너머 담장을 넘겨다 보며 방안의 기색을 살피기도 한다. 어쩌다 나와 눈이 마주치면 겸연쩍어하면서 대문을 밀고 들어오고 마루에 나란히 앉아 담소를 나눈다. 겨울날에선 마루가 차갑기 때문에 그럴 일이 거의 없지만 봄에서 가을까지는 저녁 먹고 마땅히 할 일이 없어 골목길을 걷다 여기까지 오게 되는 것이다. 내 방에는 간식거리가 심심찮게 있다. 도시에서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 어쩌다 이곳에 날 만나러 왔다가 남겨 놓은 간식거리다. 나보다 이 마을 사람들이 간식거리에 더 관심이 많은 듯하다. 저녁 식사하셨냐는 인사가 나의 주요 대화이고 나머진 여기 사람들의 삶에서 느낀 애환들이 대화의 대부분 분량을 차지한다. 그래도 이분들이 좋아하니 나도 보람을 느끼고.


내가 오기 전에는 마을의 저녁은, 아니 밤은 참으로 허전했단다. 어디 갈 데도 없고, TV라도 본다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역시 뭐니뭐니해도 사람들과 어울려 함께 웃으며 담소를 나누는 시간이 가장 좋지. 그러다 마음이라도 동하면 막걸리라도 나눠 마시고. 읍내까지 들길, 둑길을 따라 같이 걸으며 가벼운 농담에서 삶에서 느낀 철학 수준의 대화까지 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나보고 고맙다고 하지만 오히려 내가 그분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가득하다. 이곳에 와서 잘 어울릴 수 있을까. 지역 특유의 텃세도 분명 있을 테고 내가 여기서 얼마나 견딜 수가 있을까 하면서 내심 걱정도 했지. 그럭저럭 잘 지내며 살아간다.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