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날엔

by 길엽

평소 건강에 자신이 있다고 여겼는데, 밤새 뒤척였다. 악몽도 연이어 꾸고. 오래 전에 돌아가신 지인께서 꿈에 나타나 함께 같이 가자고 하기에 속으로 생각했다. '이건 아니야. 아내와 아이들 3남매를 두고 어디 갈 수 없다. 혼자 가시라. 나한테 강요하지 말라.'고 하면서 지인의 손길을 세게 뿌리쳤다. 신기하게도 그 지인을 따라가면 절대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리고 잠시 꿈을 갠 채 침대에서 일어나 가족 단체 카톡 방에 문자를 남겼다. 모두 매사에 조심하라고. 깊은 밤이니 아내도 아이들도 모두 지금쯤 잠에 들어 있을 테고, 아침에 일어나면 다들 문자를 읽고 답을 남기겠지. 어쨌든 별일이 없었으면 한다. 사방이 조용하다. 불을 켜니 새벽 3시라서 그냥 이대로 일어나기로 했다. 온몸이 몸살 기운이 느껴진다. 병원에 가본 지도 상당히 오래되었기에 이렇게 컨디션이 좋지 않은 것이 낯설다.


방문을 여니 새벽 기운이 들 만도 한데 겨울이라 어둡다. 그냥 조용하다. 고즈넉한 시골 분위기에서 깊은 밤에 느끼는 기분이 묘하다. 일단 불을 켰다. 방안이 환하다. 스마트 폰을 보니 밤새 와 있은 카톡들 문자가 가득하다. 대충 읽고 sns 곳곳을 방문한다. 세상 조용하니 혼자서 방안에 앉아 무얼 해도 영 어색하다. 더욱이 몸 컨디션까지 이렇게 축 처졌으니. 낮이면 무작정 집을 나서서 들길에 강둑길이라도 걸으면 컨디션을 회복할 듯한데. 오늘는 차를 운행하여 읍내 시장까지 가볼까. 옛날의 활기를 잃긴 했지만 그래도 시골 5일장 특유의 흥성거리는 분위기는 그래도 5일장이지. 지금 이 순간엔 멀리 갈 수 없으니 마을 골목길이라도 한번 나가 볼까. 아니지. 개라도 짖기라도 하며면 동네 사람들 잠에서 깰라. 어제 저녁에 읽다 만 책이 몇 권 책상 위에 노트북과 나란히 앉아 있다. 이 시간에는 그래도 책 읽기가 딱 맞지. 그중 못다 읽은 소설 책을 읽을까 하고서 마음 먹었는데, 앉았다가 다시 이불 속으로 두 발 그리고 온몸이 쑥 들어간다. 편하다. 순간이지만 컨디션이 좀 나아지는 것 같다. 이런 변덕!


참 오늘은 아침 먹고 군 문화원에서 열리는 특별 강연에 가기로 했는데, 아침 먹고 갈 수나 있으려나 모르겠다. 오래 전에 퇴직한 교수님의 특강인데 시골 노인들 대상으로 '노년의 삶의 행복'에 관한 특강이라 하니 내가 우선 궁금하다. 많은 사람이 와야 할 텐데 이런 시골에서 그런 특강을 들으러 올 사람이 많지 않을 것 같다. 내가 잘 모르는 교수님의 특강이지만 이런 곳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내용이 아니라서 지난 달에 인터넷으로 신청해 두었지. 관내 인문학 독서 모임도 참가하고 싶은데 너무 무리하게 할 거리를 만드는 것이 아닌지 몰라. 그냥 이곳에 들어와 아무 것도 안 하고 조용 조용하게 살려고 했던 마음이 거짓말이 되는 걸까. 지난 날 내가 원체 다른 사람들 하고 어울리고 떠들썩하니 담소를 나누는 것을 좋아했지. 세상 사람들과 인연을 모조리 끊고 낙향하여 은거한다는 목표 자체가 애초에 무리했을까.


참! 어제 밤에 주인 할머니께서 고구마를 삶아 두었다는 말이 생각났다. 삶은 고구마에 동치미가 잘 어울린다면서 냉장고에 넣어 두었으니 꼭 챙겨 먹으라고 하셨지.


"디럼, 여기 생활 해보이 심심하지요? 디럼은 늘 책을 가까이 하는 기 습관이 되가 그래도 괜찮을지 모르지만. 아무래도 사람들캉 어울릴 일이 적어서 심심한 것 같네요. 그라고 여기 고구마 삶아 났으이 김치하고 항쿤에 잡수이세이. 얼라 때 그렇게나 뭐든 잘 묵었다 카디만 그래서 이렇게나 덩치도 크고, 그래도 인자 나이도 있으이 뭐든 잘 드시야 됩니데이."


정이 뚝뚝 떨어지는 주인 할머니의 말씀이 내 마음을 흔들었지. 먼 집안 친척 형수님이라 날 부를 땐 습관적으로 '디럼'이라 한다. 도련님 발음이 쉽지 않으니 이곳 사람들이 '디럼, 디럼'이라 했지. 고교 시절 아침 일찍 통학 버스를 탔는데, 앞 마을에서 먼저 타신 사촌 형수님께서 버스 안에서 큰소리로 "디럼" 하고 부르는 바람에 내가 그만 고개를 팍 숙였던 기억이 새롭다. 버스 안 사람들이 모두 나와 사촌 형수를 바라보고 있어서 낯뜨거워서 확 달아올랐다. 얼마나 쑥스럽던지. 내가 부끄러워 고개를 팍 숙이니 형수도 당황하고, 나중에 엄마에게 전화해서 형수님이 당황했다는 말씀을 전했다고 한다. 엄마가 나에게 그런 순간이 다시 오면 절대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하고.


냉장고를 소리 안 나게 살짝 열었다. 삶은 고구마와 김치가 나란히 있다. 고구마를 전자렌지에 돌려 데운다. 동치미는 보는 순간 입맛이 돈다. 내가 거처하는 작은 방은 본체 중에서도 끝 쪽에 있어서 냉장고에 접근하려면 긴 마룻바닥을 지나가야 하고, 거실과 붙은 방쪽에 있어서 웬만한 소리는 안방에 들리지 않는다고 하니 다행이다. 시골집치고도 상당히 넓은 집이라 방도 여럿이다. 주인 할머니의 자녀들이가 가끔 시골에 오면 오히려 나에게 고마워하는 이유가 있다. 연로한 어머니가 시골 넓은 집을 지키고 있으니 적적한 것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혼자 넓은 공간에 거처하면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대처하기가 난감하단다. 그래서 내가 주는 월세도 안 받으려 했단다. 그렇지만 내가 불편해서 그냥 월세를 드리기로 했다. 아주 저렴하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말하는 수요와 공급 논리와는 전혀 관계 없는 그런 금액이다. 사람들 간의 정이 정해준 금액이라고나 할까.


내가 내는 월세 몇 배를 되돌려 주시는 주인 할머니 덕분에 이곳 생활에 불편함을 거의 느끼지 않는다. 특히 음식 솜씨가 뛰어난 할머니 덕분에 사시 사철 맛난 음식을 가까이 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 시골에서 어머니가 살아 생전에 해주셨던 우거지국을 비롯한 다양한 음식들을 그대로 재현해 주시고, 어린 시동생 대하듯 나를 워낙 아껴주기 때문에 고맙기 그지없다. 나이 80 직전에 이르렀지만 시골에서 생활한 덕분인지 의외로 건강하시다. 도시에 나간 자녀들도 돌아가며 시골집을 방문하여 연로한 어머니를 위로해 주는 모습도 참 보기 좋다.


데운 고구마를 동치미에 곁들여 먹으니 저하되었던 컨디션이 쑥 올라오는 기분이다. 역시 맛난 음식이 이럴 때 효과를 발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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