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들길을 걸으며

by 길엽

노년 세대의 시골 생활은 하루가 참 단순하다. 특별한 일정도 없고 새벽에 눈을 떠서 대충 씻고 집을 나서면 하루 일과 시작이다. 더욱이 도시에 가족들을 남겨 놓고 낙향하여 은거하는 경우엔 더욱 단촐한 살림에 간결한 생활 패턴을 갖게 된다. 그나마 오랜 기간 교직에 근무하고 이곳에 들어온 나에겐 여기가 너무나 평화롭고 고마운 곳이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지 않은 편이기에 자신의 몸에 탈이 나지 않도록 유의하면서 여기 생활에 적응할 수 있도록 노력하면 '행복'을 충분히 누릴 만하다. 지금까지는 그렇게 생활해 왔다. 주변 모든 사람이 고맙기만 하다.


지난 주엔 볼일이 있어서 도시 본가를 잠깐 다녀왔는데, 그 날이 아파트 노인정 회식 날이었던가 보다.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세우니 익숙한 얼굴이 다가와 노인정에 같이 가자고 권한다. 노인정 분들이 나를 많이 생각하고 했으니 지금 가면 좋아할 것이란다. 나도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어서 함께 노인정에 들어섰다. 이미 길게 놓여진 상 위에 음식들이 푸짐하게 진열되었다. 아파트 관리 사무소 직원들과 경비원, 청소부 등이 한 상에 자리잡았고 그 옆으로 동네 어르신들이 죽 보인다. 내가 들어서자 갑자기 "와! ~"하면서 크게 반겨준다. 시골에 들어가기 전까지 가끔 노인정에 들러 간식거리를 전했었는데, 그것까지 이렇게 반겨주다니 내가 영 어색하다.


"아이고, 샘 오셨는교? 샘이 안 오시이 여~에 들다 보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아인교? 그래 촌에 가~ 생활해보이이 심심치요. 여~뽀다는 영 재미도 없을 낀데, 그냥 여~ 와서 우리하고 재미나게 사입시더. 어떤능교?"


내가 뭐라 대답할 틈도 없이 한 분이 속사포처럼 쏟아낸다. 다른 분들은 동의의 박수를 함께 보내고. 90세를 넘긴 할머니는 귀가 조금 어두운 것 빼고 아주 건강하신데 두 팔을 번쩍 쳐들고 나를 반겨주셨다. 곁에 가서 두 손을 꼭 잡아 드리니 너무나 좋아하시면서 내 손을 아예 놓지 않으려 하신다. 관리소장도 내게 인사를 건네며 노인정 분들과 이리 친했느냐고 슬쩍 물어본다. 그런 것 같다고 답했더니 소장도 신기해 한다. 하기야 이 노인정에 누가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지. 내가 여기 생활할 때, 어쩌다 어딜 다녀오다 입맛 다시게 간식거리를 사다 들고 들어가면 내가 며칠 만에 몇 주만에 왔노라고 날짜도 손으로 꼽고 있을 정도였지.


요즘 젊은이들의 삶은 안 그래도 바쁘고 벅차다. 젊은 세대로 하여금 노인정 분들을 한번이라도 챙겨보게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다. 현실이 얼마나 팍팍한가. 하루 종일 직장생활로, 아르바이트로 그야말로 처절한 생존 노력으로 하루 하루 버티기도 쉽지 않은 그들이 무슨 여유로 노년세대를 돌아볼 여유가 있단 말인가. 노년 세대의 삶이나 행복은 스스로 찾아야 하는 법이다. 젊은 세대나 자식들에게 뭔가 기대할 필요도 없다. 비슷한 동년배들끼리 자체적으로 행복을 위한 삶을 추구해야 한다.


떠들썩한 분위기에 함께 자리한 분들이 좋아라 하시니 나도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가지고 간 연양갱을 한 분 한 분 빼지 않고 다 나눠 드렸다. 그리고 그 중에 음식을 가장 많이 하신 분 앞치마엔 잘 먹었노라고 지갑에 남아 있던 현금 8만원을 그대로 드렸다. 절대 안 받겠다고 버티다가 결국 기분 좋게 받아주시고 옆에 계신 분들은 박수로 환영하셨지. 지갑 속에 마침 그 액수밖에 없어서 좀 그랬지만 그래도 그거라도 전해야지. 식사가 끝나고 음식하신 분들이 뭔가 사드시라고 하는 마음에.


청소하시는 할머니 두 분은 60대 후반이신데 눈치를 보니 떡을 좋아하시는 것 같다. 그쪽 테이블 떡이 다 없어졌다. 그래서 내가 벌떡 일어나 냉장고 바로 앞에 있는 곳으로 가서 떡을 풍성하게 꼭 싸서 와 청소부 할머니 두 분 주머니에 슬쩍 넣어드렸다.


"날씨도 추운데 정말 고생 많으십니다. 여기서 드시기 눈치 보이실 것이니 밖에 나가셔서 나중에 드시고 남은 거는 댁에 가셔서 세상에서 제일 이쁜 손주들 꼭 주이소. 넉넉하게 넣었습니다. 저기 있는 거 다 가져 올 수도 있지만 음식하는 사람들도 또 드셔야 하니 이해하이소."


그렇게 청소하시는 할머니 두 분과 경배원께도 떡을 챙겨 드렸다. 한 개라도 더 먹고 싶을 텐데 남 눈치를 보는 듯해 괜히 기분이 짠했지. 환하게 웃으시는 얼굴을 보니 내 마음도 즐거워진다. 그렇게 얼떨결에 점심 식사를 함께 먹고 나오려 하니 노래 한 곡을 하고 가야 한단다. 작년에는 한 곡을 불렀는데, 오늘은 완곡하게 사양하고 나왔다. 대신에 지금 색소폰을 열심히 배우고 있으니 다음엔 색소폰 연주를 꼭 보여드리겠다고 약속했다. 내가 좋아하는 남정희 "새벽길"을 말했더니 의외로 이 노래를 아는 분이 별로 없다. 트로트는 뭐든 좋다면서 다음을 기대한다는 말씀들을 주셨다. 그리고 앞으로 자주 와 달라고 이구동성으로 크게 외친다. 그렇게 하겠노라고 답하고 볼일을 본 뒤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지.


[새벽길]남정희(순애의색폰놀이) (youtube.com)



들길엔 오가는 사람이 별로 없다. 저쯤 한 명, 그리고 또 저~쯤 앞에 한 사람이 말없이 걸어가고 있다. 나처럼 생각에 빠져 정신없이 걷고 있을까. 어딜 정처없이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나이에 무리한 운동은 금물이다. 이렇게나마 천천히 걸을 수만 있어도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색소폰 학원에 모인 여러 선배들 대화를 들으면서 노년에 건강이 얼마나 중요한지 여실히 느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 상당수가 무릎 수술을 했단다. 등산도 무리하지 말라고 강조하신 분도 계셨다. 헬쓰 클럽에 가더라도 노년에 가슴 근육을 키워 남들에게 자랑하려다가 골로 간다는 말에 다들 폭소를 터뜨렸지.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헬쓰 운동이 되어야 한다며 그 말을 하셨지. 난 젊은 날 헬쓰를 잠깐 다닌 적이 있지만 요즘은 이렇게 운동 삼아 천천히 걸으면서 내 삶을 곰곰이 생각하는 시간이 좋다. 하루 1만 보는 규칙적으로 걸으려 한다. 1시간 30분 정도면 충분하다. 사람들을 만나 담소를 나눌 땐 잠깐 그 자리에 서거나 근처 정자 마루에 앉기도 했지. 전혀 낯선 얼굴이라도 몇 번 오가며 인사를 나누다 보면 이곳에서 금방 친해진다. 다들 외로운 사람들인 것 같다.


나처럼 시골에 들어와 전원생활을 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수억 대를 투입하여 멋진 전원주택을 지어 생활하는 경우가 많다. 난 소심해서 그랬겠지만 방 한 칸 월세로 거처를 정했다. 월세도 1년 치를 미리 치렀고, 주인 할머니께서 월세보다 몇 배 정성을 들여 방 청소를 해놓는다. 나도 처음엔 그렇게 하시지 말라고 말렸지만 어차피 마루를 청소기로 청소하는 김에 방까지 간단하게 하신다니 이젠 그냥 놔 둔다. 처음엔 삼시세끼를 꼬박 고박 챙겨 주셨지만 점심 식사는 좀처럼 하지 않게 되었다. 읍내까지 걸어가서 이런 저런 음식을 먹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읍내라곤 하지만 옛날의 활기차던 분위기는 사라졌다. 그래도 내가 가는 식당은 오랫동안 영업을 하면서 견뎌내고 있다. 돼지국밥을 유난히 좋아하기에 며칠 간 점심을 계속 먹었는데도 질리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 붕어빵 족발 치킨 등을 사서 가져와 주인 할머니 드시라고 거실 탁자에 몰래 올려 놓았었지.


여기에 들어와서 맑고 깨끗한 자연 속에서 생활한 덕분인지 더욱 건강해진 듯하다. 이 모든 것도 내 삶의 행복인 것을 요즘 절실히 느낀다. 특별한 욕심도 인생 목표도 없이 하루 하루 그저 그렇게 소소한 행복을 추구하는 삶을 말이다. 누굴 원망하거나 미워할 필요도 없다. 그냥 아침에 눈 뜨면 세상이 보이고, 어쩌다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내 발로 걸어가서 조금이라도 사와 주위 사람들과 어울려 담소하면 먹는 시간들처럼.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