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을 기다리며

by 길엽

요즘은 유난히 따스한 봄날이 기다려진다. 내년 꽃피는 춘삼월 꼭 해보고 싶은 일이 많다. 우선은 가까운 지인들과 벚꽃이 만개한 날 저녁 석양이 빗겨내리는 즈음에 꽃 아래에서 청명주를 한 잔 나누고 싶다. 최근에 마을 카페에서 대표가 권한 청명주 맛이 참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다가오는 봄날에 그 술맛을 지인들과 나눠 마시며 행복한 날을 함께 누리고 싶다. 행여 나 좋다고 찾아오는 사람이 많을지도 모르니 청명주를 한 박스라도 사 두어야겠다. 처음 이곳에 들어올 적에 세상 인연을 다 끊고 살겠노라고 단단히 마음 먹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그 결심이 거짓말이 되어 가는 듯하네. 오후에 미리 만나 저 들길을 같이 걸으며 지난 날 추억을 떠올리기도 하고, 누군가 들려주는 재미난 이야기에 폭소도 듣고 싶다. 아무도 없는 들길을 걷다가 둑길에 올라서면 양측에 벚꽃이 무성하리라. 생각만 해도 그냥 행복해진다. 어떻게 살았는지 이야기를 돌아가며 베풀어도 좋으리라. 세상살이 이야기는 아무리 들어도 지겹지 않겠지. 누가 자랑을 해도 넉넉하게 들어줄 수 있다. 나보다 연배가 높은 세대들을 모시고 그분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크게 리엑션하는 것이 내 장점이자 특기인 것을.


최근에 어느 지인께서 들려준 '부두의 여인'이란 노래가 참 듣기 좋았다. 난 트로트 음악이 좋더라. 더욱이 풍성한 음량으로 넉넉하게 들려주는 그 지인의 성품처럼 여유롭게 들렸지. 밀양으로 귀농하야 세컨 하우스를 만들어 놓고 노년 세대를 즐기며 살아가는 그 지인은 타고난 역량이 뛰어나 퇴직하지마자 다시 관련 회사에 재취업하여 부사장을 하고 있다네. 아이고 정말 부러운 사람. 인상도 좋고 노래도 잘 하고 풍류도 있는데다 사람들에게 인기도 많아 그야말로 팔방미인이더군. 내가 그 지인을 따라가긴 절대 불가능하다. 그래도 그런 지인이 주위에 있다는 것은 내 자랑이 될 수 있겠지. 이것도 자뻑인가. ㅎㅎ.



오늘은 봄날 벚꽃 풍경을 기다리며 방안에서 오랜만에 중국사 관련 책을 세 권을 펼쳤다. 제일 오른 쪽은 조선 정조가 사마천의 사기에서 엄선한 내용을 노만수란 분이 현대국어로 번역하여 가독성 뛰어난 책이다. 예전에 간간이 접한 책들인데 오늘은 어느 것을 먼저 읽을까 고민하다가 세 권 다 읽지 못하고 그냥 펼쳐 놓았다. 그리고 잠시 방문을 열어 밖을 보니 겨울보다 봄 기운이 조금 느껴지는 듯하다. 그래서 갑자기 벚꽃 만개한 봄날을 생각하고 또 기다린다. 지금까지는 별 어려움이 없이 살아왔지만 앞으로는 노쇠한 날이 훨씬 많아질 것이다. 지금 건강하다고 앞으로 늘 그럴 것이라고 자신할 수 없다. 노년세데에 건강은 예민하면서도 복잡다기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미래 걱정을 미리 당기는 어리석음은 곤란하다. 바깥 들판의 봄기운이 따스하다. 점심을 먹고 조금 걸어볼까. 매일 걷는 시간을 정해놓고 루틴처럼 걸어야 하는데, 그건 아직 제대로 지키지 못한 것 같다. 하루 언제든지 만 보만 걸으면 된다는 생각에 그런가 보다. 어떨 땐 잊어버리고 스스로 위로한다. '하루 한 번 걷지 않는다고 무슨 일이야 생기겠나. 내일 걷지 뭐.'라고.



봄날이 오면 이런 길도 꼭 걷고 싶다. 작년에 다녀온 일본 오이타 분고오노 시 미에마치 방문 때 걸었던 큐슈 올레 오쿠분고 코스에서 만난 봄 풍경과 흡사하다. 그곳의 하라지리 폭포는 조금 달랐지만 전국에서 관광객이 몰려 들었지. 튤립들이 정말 많았고, 그 옆에 서 있던 벚꽃 나무들 모습도 환상적이었다. 함께 갔던 사람들도 벚꽃나무 아래에서 사진을 찍으며 연신 감탄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올 봄에도 또 가볼까 싶다. 이번에는 몇 사람이 가면 좋겠는데, 지인들에게 알리면 또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어느 새 대형 버스 한 대 규모의 단체가 되어 버린다. 어떻게 하나. 작년에 만났던 일본 오이타 시골 마을 그 분들은 내년에도 꼭 오라고 하던데. 그쪽에선 워낙 외진 곳이라 외부에서 더욱이 한국에서 단체 여행을 오는 사례가 거의 없다 한다. 인근의 벳푸 온천 마을이나 유후인 같은 유명 관광지엔 사람들이 몰리지만.


나이가 들면 어디 가고 싶을 때 즉각 실행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요거 마치고 가야지, 돈이 좀더 모이면 해봐야지, 아니 가족들 상황도 생각해야지. 이번엔 다른 사람들 모아 날 잡아 가봐야지 등등. 그렇게 고민하다간 시간만 훌쩍 가버린다. 그리고 또 후회하지. 아이고 그때 무조건 시도하고 갈 것을. 노년 세대에겐 시간의 흐름이 더욱 빠르다. 그렇다고 초조해할 필요는 없다. 그저 가고 싶을 땐 그냥 시도하는 것이다. 때로는 자녀들에게 손벌리는 뻔뻔함도 필요하다. 내가 우선 건강하고 행복해야 자녀들에게 짐이 되지 않는다는 마음가짐도 필요하다. 매년 일본 방문 단체를 인솔하면서 많이 느끼지만 그래도 여행을 가는 사람들의 표정은 정말 밝고 환하다. 특히 노년 세대들이 비슷한 연령대의 사람들과 무리지어 가는 관광길은 더욱 그렇다. 내가 인솔하는 단체 경우 일본에서 큐슈를 갈 때 무조건 선박을 이용한다. 그것도 쾌속선이 아니라 밤새 달리는 선박인데, 부산 시모노세키 부관훼리는 성희호와 하마유 그리고 후쿠오카를 갈 때는 카멜리아 호다. 특히 부산항 국제선 터미널에서 승선 수속을 끝내면 대충 저녁 7시 30분 쯤 되는데 그때부터 밤 10시 정도 출발할 때까지 선상에서 누리는 저녁 시간이 하이라이트다. 해방감이 충만하고 풍성한 음식을 놓고 선실 안에 둘러 앉아 맛난 음식을 먹으며 마음껏 웃고 떠드는 시간이 정말 행복하다. 한 번 경험해 보면 잊지 못할 추억이 되지.


언젠가 우리 단체가 들어간 선실 바로 곁에 대략 봐도 60대 후반의 할머니들이 단체로 관광을 가신단다. 자유여행이 아니어서 여행사에서 가이드가 나오고 관광버스를 대절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 할머니들이 밤 10시가 넘어서도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꽃을 피웠다. 우리쪽 한 사람이 좀 조용해달라고 하면 목소리를 잠시 낮췄다가 다시 재미난 이야기가 나와 자신도 모르게 손뼉을 치고 기뻐한다. 그래서 내가 우리 단체에 부탁했다.


"저 할머니들 평생 관광 한 번 못가보고 여태 고생만 하신 우리 어머니라 생각하고 좀만 기다려 줍시다. 정 못 견디겠으면 로비에 가서 캔 맥주라도 한 잔씩 하다 보면 할머니들도 지쳐 주무실 것이니까요. 어때요?"


그랬더니 몇 사람이 로비로 갔다. 그때 내가 할머니들 방을 노크하여 한 말씀 드렸다.


"어머님들 조금만 더 이야기를 나누다가 주무세요. 그렇게 할 수 있지요. 우리 방 사람들에게 부탁하는 거 들었지요? 지금부터 30분 정도만 말씀 나누다가 주무실 수 있지요? 되실까요?"


그랬더니 할머니들께서 동의하는 표정을 짓는다. 그런데 그 순간부터 목소리가 금방 낮아지고 10분도 채 안 되어 주무시는지 조용해졌다. 참 신기하지.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