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양말 저도 신고 싶어요

by 길엽

일전에 도시 본가 다녀오는 길에 시내를 잠깐 들러 꽃양말을 샀다. 비교적 저렴한 가격이라 재고품 모두 달라고 했다. 약 스무 켤레 정도 된다. 그래도 3만원 안팎이다. 가게 주인께서 왜 이렇게 양말을 많이 사가시냐고 넌지시 물었다. 몇 년 동안 그 가게에서 산 양말을 헤아려 보면 상당할 것이다. 어디 드릴 데가 있다면서 대충 얼버무렸지. 먹을 것을 사가지고 가서 선물하면 그 때뿐이고 양말은 그래도 긴 시간 신을 수 있어서 실용적일 것이라고 여겼다. 그깟 양말 한 켤레 할지 모르나 의외로 양말 선물을 좋아한다. 한 번은 50켤레도 동시에 샀던 기억이 있다. 현직에 근무할 때 외부에서 일명 만물상이라고 노부부가 우리 직장을 찾아와서 휴게실에 온갖 물품을 진열해 놓았다. 다들 그렇게 말했다. 나한테 못 팔면 장사 접어야 한다고. 내가 그런 물걸은 잘 산다고 소문이 많이 났었다. 나이 많으신 분이 물건을 팔러 오면 더욱 많이 산다고 말들이 많았지. 옛날 돌아가신 부모님 특히 어머니께서 형과 나 그리고 여동생을 위해 5일장에 열무 배추나 무 등을 새벽부터 팔었던 기억이 늘 남아 있어서 그런지 모른다.


초등학교 시절 어머니랑 리어카에 채소를 가득 싣고 새벽길을 갈 때면 마을 친구들이 모두 손을 보태 시장터까지 옮겨 놓았고, 난 수업이 끝나면 책보자기를 X자로 단단히 매고 학교에서 시정터까지 내달렸지. 채소는 오전에 다 팔아야 제 값을 받는데, 어머니는 오후가 되도록 다 못 팔고 있었다. 그러면 내가 가방을 리어카 한 곳에 던져놓고 오가는 사람들 붙잡고 남은 채소를 열심히 팔았다. 그 어린 아이가 무슨 세상을 안다고, 채소값을 어찌 안다고 그렇게 덤벼들었을까. 모두 어머니에 대한 마음이 지극정성이어서가 아닐까 싶다. 어머니 친정 친척들이 많이 살고 있는 이웃 씩실마을 아재들이 시장에 왔다가 어머니와 나를 보고 짠한 마음에 남은 채소를 한꺼번에 사가지고 소달구지에 몽땅 실었지. 난 다 팔았다는 마음에 흐뭇한 마음으로 어머니를 바라보았고, 어머는 묘한 미소로 나를 가만히 내려다 보셨다. 그 아재들은 채소만 사가지는데 그치지 않고 내 바지나 책보자기에 꼭 용돈을 주셨다. 훗날 내가 자라서 꼭 보답하고 싶었는데, 세월은 기다려 주지 않았다. 참으로 너그럽고 평화로운 얼굴이셨던 인자한 아재들 모두 저 세상으로 가셨던 게지.


훗날 알았는데, 그 때 몽땅 사가지고 간 채소들 모두 소죽 끓이는데 한꺼번에 넣었다고 하더라. 어머니 심부름으로 씩실 마을에 들렀다가 들에 나가던 아재 한 사람을 만나 인사를 드리는데 잠깐 집에 같이 가자고 해서 그렇게 따라 들어갔지. 집안에 계시던 아지매가 급하게 국수를 삶아 내놓고 나와 아재는 마루에 마주 앉은 채 저 멀리 들판을 바라보았지.


"야야, 니 낭중에 커서 뭐 될라 카노. 니는 나~도 어린 기 엄마한테 어째 그렇게나 효자고. 근동에 소문이 다 났다. 니가 엄마한테 잘 한다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어른들에게 인사성도 밝고 성격도 착하고 니는 낭중에 참말로 잘 될끼다. 아차 느그 엄마한테 한번 들은 거 같다. 니 크만 고시해서 달성군수 되가 온다꼬 단다이 약속했다메. 닌 꼭 될 끼다. 우짜든동 열심히 해가~ 느그 엄마 고생하는 거 소원 풀어드리라이. 느그 엄마 하루 종일 들판에서 새카마이 일한다꼬 참말로 고생이 많제. 다행히 느그들 3남매 다 엄마한테 잘 한다 카이 내가 다 고맙제. 국수 마이 묵어라, 어~요 당시 여~ 국시 더 가 온나 야 덩치를 봐라 얼마나 마이 묵게 생겼노."


어머니의 친정 친적이나 나에겐 외가 친척이 되지. 엄마랑 육촌이라고 한 것이 기억난다. 그 후로도 오가다 만나면 내 손을 덥썩 잡거나 환하게 웃으시며 하면서 정말 반갑게 맞아 주셨지. 몇 번 뵙지는 못 했지만. 그리고 그 전에 사가지고 갔던 열무나 솎음 배추는 모두 소죽 끓이는데 다 넣었다고 털어놓으셨다. 오후가 되면 시들어서 사람이 먹긴 좀 그렇다고 했다. 아재의 속깊은 마음을 그제서야 내가 이해했다. 참으로 고마운 분이셨다.



옛날 생각만 해도 그냥 코끝이 시큰거려 온다. 고마운 분들이 정말 많았다. 어린 시절 고향마을에서 만난 사람들 모두가 그냥 고마웠다. 골목길 나란히 서 있던 집들 그 누구도 반갑지 않은 이가 없었고, 어느 집에 가도 점심 식사를 편하게 먹을 수 있었다. 학교를 다닐 때 만나면 얼마나 살갑게 대해주셨는지 모른다. 대학에 합격한 뒤 고향 마을에 들렀을 때 내가 출세나 한 것처럼 아지매들이 들에서 일하다가 함께 큰목소리를 나를 불러 주고 축하까지 해주셨지아. 어머니 십팔 번 <방랑시인 김삿갓> 도 들려달라 해서 잘 못하지만 들판에서 크게 목청껏 불러드린 적도 있지. 어머니가 그 노래를 정말 잘 하시는데, 내가 그 노래를 부를 때 흐뭇하니ㅣ 미소짓고 내 노래를 들어주셨지. 그리고 동네 아이들도 우리집에 많이 몰려와서 놀기도 했다. 그러면 어머니께선 감자나 고구말 곧잘 삶아서 대나무 광주리에 올려놓고 마음껏 편하게 먹도록 해주셨다. 우린 그렇게 정많은 시골 마을에서 친하게 자랐다.


마을 사람들 모두 함께 아이들을 키웠던 것 같다.


너네 할 것 없이 동네 아이들을 만나면 밥 먹었느냐부터 물었다. 그런 정많은 집, 마을에서 자란 영향으로 나도 어딜 가도 정많은 사람이란 말을 많이 들었다. 돌아가신 아버지께서도 어딜 멀리 다녀오시면 두 손에 꼭 뭔가 들고 오셨고, 우린 아버지 잘 다녀오셨습니까는 건성으로 빨리 하고 두 손에 들고 계신 것이 무엇인가가 정말 궁금했었다. 당시 제일 인기있었던 먹거리는 통닭이었다. 마을 이장을 하시면 한 달에 한두 번 면사무소에 다녀오셨지. 그 중 하루는 요즘 말하면 일종의 '수당'을 받으셨던 것 같다. 그날은 면사무소에서 나오자 마자 시장터에 있는 통닭가게부터 들르셨다 한다. 자전거 뒤에서 톨닭을 싼 종이를 얼마나 단단히 매어 놓으셨던지. 집으로 오시는 길에 고개 너머 가게에서 지인들과 막걸리를 거나하게 마셔서 몸을 가누기도 힘들게 밤 늦게 오신 적도 있었다. 그런 상황인데도 통닭은 반드시 챙겼다.



그런 분위기에서 자란 영향으로 양말 같은 저렴한 물품을 대거 사서 선물을 많이 하게 되었다. 일전에 내 거처에 놀러왔던 시니어세대 몇 분께 꽃양말을 선물로 드렸다. 그런데 그 중에 한 분이 무슨 일이 생겨 그날 오시지 못 한 모양이었다. 다음 기회에 만나면 드리면 되지 하고 단순하게 생각했었다. 그날 오신 분들도 대수롭잖게 생각했고.


그게 아니었던 것 같다. 마을 이장께 뭔가 할 말이 있어 잠깐 들러 돌아오는데 할머니 한 분이 쪼르르 다가오셨다.


"샘예. 난 꽃양말 와 안 주는교? 꽃양말 저도 신고 싶어예. 전번에 마을회관에 다 모있는데 전부 꽃양말 신고 자랑하대예. 어디서 난노 카이까네, 샘이 선물로 주셨다 카대예. 그때 난 서울 딸네 집에 잠깐 갔거던예. 나도 꽃양말 신고 싶어예. 꼭 주이소. 그래야 내일이라 회관에서 자랑하고 싶어예"


얼른 집에 달려가 남은 꽃양말을 한 켤레 드렸더니 세상 그렇게 환한 얼굴을 못 본 것 같다. 정말 기뻐하시는 얼굴로 종종걸음로 가셨다. 감사합니다란 말도 잊어버리고.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