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을 먹고 집을 나서서 들판을 걷다가 오늘은 마을 가운데 있는 마을 회관 안에 있는 노인정으로 가보았다. 코로나 전만 해도 스무 명 이상 노년세대가 북적대곤 했다는데 지금은 불과 대여섯 분이 고스톱이나 치면서 하루를 보내고 있다고 한다. 평소엔 마을회관을 그냥 스쳐가곤 했다. 물론 마을 사람들을 만나면 가볍게 인사는 했다. 1년 전에 이곳으로 올 때 마을에서 요구하지 않았는데, 음식을 조금 준비해서 찾아 인사를 드렸다. 작년에 마을 회관을 처음 들어서던 날 전혀 낯선 나를 크게 환영해 주셨다. 내가 갖고 간 음식은 저쯤 제쳐놓고 이런 저런 질문도 하시고, 함께 담소를 하기도 했지. 내게 별다른 재주가 없는데, 딱 하나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재주라면 어르신들 공경 잘 하고, 그분들의 말씀을 진득하게 들어주며 금방 친해지는 것이다. 어딜 가더라도 나이 많이 드신 분을 만나면 내 몸이 벌써 반응하기 시작한다. 상대방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부터 말이다.
도시에서 생활할 적에 시내 나가서 배우고 싶은 것이 꽤 많았다. 내 삶에 직접적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 같은 TOEFL을 배우거나 작곡 그리고 색소폰 등 악기에도 관심이 많았다. 지금은 색소폰 하나만 겨우 배우고 있지만 그땐 정말 배우고 싶은 것이 많았지. 아내가 가끔 놀리곤 했다. 그렇게 나이 들어 뭘 그리 무리하게 배우려 하느냐고. 읽고 있는 책만 해도 상당히 많은데 너무 무리는 하지 말고 퇴직 후 노년을 좀더 편안하고 여유롭게 즐기며 사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아내는 지금까지 내 삶에 대해 특별히 간섭하거나 지적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설령 한다고 해도 모두 나를 진정으로 걱정해서 하는 말인 줄 잘 알고 있다.
그렇게 배우고 싶은 것이 많아 어떨 때는 두 가지를 한꺼번에 배우러 다닌다고 힘들기도 했지. 그렇게 시내 학원에 가서 뭔가 배우러 갈 때는 시내버스를 많이 탔는데, 웬만하면 자리에 앉지 않았다. 20분도 채 걸리지 않은 시내라서 그랬지만 자리라도 생기면 제일 먼저 차내에 나이 드신 분에게 자리를 권유하기 위함이었다. 실제로 그렇게 자리를 많이 권해 드렸다. 솔직히 말하면 그분들 중에는 나와 불과 대여섯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 분도 계셨다. 그런데도 자리를 권해 드리면 정말 좋아라 하셨지. 한번은 젊은이 둘과 나란히 서 있는데 마침 나와 그들 사이 어정쩡한 자리가 생겼다. 아주 엄밀히 말하면 그 젊은이들이 쪼끔 가까웠다. 하지만 내가 양해를 구하고 저만치 떨어져 있는 할머니를 불러 오시게 해서 않게 해드렸다. 젊은이들도 흔쾌히 자리를 양보하고, 할머니는 연신 감사합니다는 말을 하셨다. 그런 일이 꽤 있었다. 요즘 젊은이들 문제가 많다고 기성세대가 쉽게 말하기도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진정으로 그들을 인정하고 뭔가 요청하면 웬만하면 들어준다. 미리부터 선입견을 갖고 젊은 세대를 함부로 판단하면 곤란하다.
94살 할머니가 꽃 양말 선물을 받고 너무나 기뻐하셨다.
회관 안에 다섯 분이 계셨다. 70대 한 분 80대 셋, 그리고 눈에 확 들어오는 분이 계셨는데 내가 먼저 묻지 않았는데도 본인이 굳이 올해 나이 94이라고 밝히신다. 내가 살아오면서 90 넘긴 사람을 바로 옆에서 만난 경우가 이번에 처음이다. 그런데 이분 나이보다 훨씬 정정하게 보인다. 젊은 날 한 미모 했을 법한 귀한 태가 크게 느껴진다. 큰 자제가 사업을 하고 계신다면서 아들 자랑을 짧게 하셨다. 그리고 그 아들이 아침에 집을 나서면서 노인정에서 다른 이들을 대접하라고 용돈을 준다고 하신다. 당신의 어머니가 연세가 많고 집에서 누군가 케어하려면 한 사람 정도 매이게 되는 상황에서 그래도 노인정까지 걸어가 사람들과 어울려 고스톱을 칠 정도임에 정말 감사하다면서. 그런데 나이 드신 분들 대여섯이 먹어 봐야 얼마나 먹냐면서 아들이 주는 돈도 제대로 쓸 수 없다면서 너스레를 떨기도 하신다. 매사 긍정적이고 너그러워 건강한 편인데 귀가 좀 어둡다고 털어 놓으셨다. 그래도 참 귀하게 늙으신 것 같아 보기 좋다. 80대 초반의 남자 이름이 할머니는 덩치도 상당하고 성격도 쾌활하시다. 노인정에 자주 와서 당신들에게 재미나는 이야기도 많이 해달라고 조르신다. 그 모습이 귀엽기까지 하다. ㅎㅎ.
다섯 분들 앞에 간단한 간식거리를 내놓았다. 연양갱, 카스테라, 음료수, 초콜릿, 비스켓 등을 내놓으니 몇 개만 남겨 놓고 모두 냉장고에 도로 넣었다. 오늘 노인정에 오시지 않은 분이 내일이라도 오면 전해 주려 한단다. 그리고 음료수와 연양갱을 하나씩 들고서 환한 표정을 지으며 담소를 이어나간다. 노인정에 누군가 들여다 보는 사람이 거의 없어 내심 심심했단다. 그러다가 한 분이 말씀하신다.
"전 번에 샘께서 주신 꽃양말 지금 내가 신고 있다 아닌교?"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발을 앞으로 쑥 내민다. 아하 지난 달 도시에 모임이 있어 다녀오는 길에 노점상 리어카 위에 진열된 꽃양말 열 켤레 전부 싹 샀다. 물론 나머지 양말 그러니까 꽃 양말이 아닌 양말도 열 켤레 샀다. 어디 모임에 갈 때도 나이가 드신 분이 계시면 살짝 옆에 가서 양말 선물을 하면 정말 좋아하신다. 최소한 70대 이상만 양말 선물을 한다. 남자 선배께는 양말을 드리면서 여성용이니 집에 가서 형수님께 전하라고 하면 꼭 그런 분이 계신다. 한 켤레 더 달라고. 당연히 더 드린다. 그깟 양말 한 켤레 얼마나 한다고 누군가의 마음을 행복하게 해줄 수만 있다면 몇 켤레라도 전할 수 있음에.
마을 회관에서 한 분이 당신이 지금 꽃 양말을 신고 있는 것을 자랑하니까 나머지 분들이 오늘 하필이면 안 신고 왔다면서 안타까워하신다. 그것도 정말 귀엽게 보인다. 다음에 도시에 가면 다시 많이 사가지고 와야겠다. 내 어린 시절 돌아가신 어머니와 있었던 에피소드를 말하니 크게 공감해 주신다. 잠시 고스톱은 스톱하고, 빙 둘러 앉아 담소를 나누면서 각자 돌아가며 자신의 근황을 말하게 했더니 다들 신나게 말씀하신다. 옆에 노인정 회원 명부가 보이기에 살짝 들여다 봤다. 1930년 생을 시작으로 회원들 명부가 죽 보이는데 몇 분 이름 위엔 두 줄이 진하게 처져있다. 아마 돌아가시거나 이사를 간 분일 것이다. 아니면 요양원으로 가셨겠지. 1930년 생이니 우리 나이로 94세네 그중에 한 분이 바로 내 앞에 앉아 계신 분이다. 아주 정정하다. 대뜸 하시는 말씀하신다.
"아이고 내 올해 나이가 구십 넷인데 인제 죽어야 하는데 그것도 내 마음대로 안 되네. 다른 사람은 잘도 가더만 난 아직 건강해. 귀가 잘 안 들리가 좀 그렇제. 내 귀가 안 들리면 내가 아이고 딴 사람이 불편타 아이가. 그라고 전번에 사준 꽃 양말 사준 거 고맙데이. 아~들한테 자랑했다 아이가."
뭐 대단한 거라고 자랑을 하시다니 갑자기 내가 쑥스러워진니다. 그래도 값싼 양말 하나에도 소녀처럼 저리 좋아하시니 정말 보기 좋니다. 다음에 가면 더 많이 사가지고 올까 한다. 아까 보았던 노인회 명부 중 제일 위에 보이는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94세 할머니가 전화를 제 바로 옆에서 받는다. 그리고는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이건 모르는 전화 번혼데, 받으마 안 된다 아이가."
그래서 제가 옆에서 한 번 받아보라고 재촉했다. 그러자 그분께서 "여보세요"라고 하시기에 나도 "여보세요" 했더니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으시더니 다시 환한 얼굴로 돌아간다. 전화를 그렇게 끊고 제 팔을 잡으면서 감사해 한다.
" 나이 구십 넷 전화 줘서 진짜 고마워요내 나이 구십 넷 전화 줘서 진짜 고마워요."
전화 통화하는데는 별 지장이 없는 것 같다. 구십 넷에 정말 대단하다. 얼굴도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화사하고 머리도 미용실에 가서 예쁘게 다듬으셨다고 한다. 옷매무새도 생각보다 세련되었고. 늘 웃으면서 하루를 보내니까 그냥 건강하더라고 당신의 건강 비결을 들려 준다. 잘 드시고 잘 웃고 그리고 늘 걸어다니시는 것이 94세 할머니의 진짜 비결이겠지. 참! 10원 짜리 고스톱을 반드시 이겨 돈을 따겠다는 열정이 정말 대단하시다. 손놀림이 예사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