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아내가 시골 이곳에 온단다. 조그만 시골역까지 마중 나가는 마음이 설렌다. 오늘은 차를 운행하지 않고 둘이서 걷기로 했다. 퇴직 후 여기로 들어올 적에는 세상 사람들 그 누구도 연락하지 않겠노라 단단히 결심했다. 이제부터 내 삶은 그냥 혼자다. 아내도 아이들도 모두 제 생활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굳이 내 한 몸을 기대거나 의지할 생각이 없다. 도시에서 만난 숱한 인연도 이젠 훌훌 벗어버리고 시골로 들어가 은거하면서 독서와 집필 그리고 자연 풍광을 마음껏 누리는 삶을 기대했었지. 행여 삼시세끼가 여의치 않을 듯하여 먼 친척 형수인 할머니께 밥값을 지불하여 해결하기로 했고. 그래도 아내가 온다는 말에 아침부터 기다려졌다.
산골을 지나 길게 늘어진 강변 둑길을 따라 홀로 가는 마중길엔 설렘이 가득 가득 했다. 그래도 세상에서 딱 한 사람 인연을 남겨 놓으라면 바로 이 사람 내 아내가 아닌가. 내 나이 스물 여덟 아내 스물 넷에 우리 결혼하여 벌써 30년이 넘었으니 정말 오랜 세월 진짜 귀한 인연이 되었지. 군복무 후 복학하자마자 여동생의 친구의 친구였던 아내가 친구랑 우리 시골집에 놀러와 여동생과 저희들 셋이서 우리집 새집 안방에서 놀고 있을 때, 난 전두환 동생 전경환 소값 파동 당시 집에 들여온 송아지 8마리 키운다고 우사에서 소 배와 옆구리에 붙은 소똥을 뗀다고 정신없이 일하고 있었다. 여동생의 강력한 추천으로 아내를 시내 중앙동 빌라다방에서 1985년 9월 6일 만난 것이 귀중한 인연이 되었지. 당시 장인은 당신의 딸이 너무 어리다고 좀더 기다려 달라고 했지. 그렇게 기다린 것이 겨우 2년 그렇게 스물 넷에 나와 결혼한 아내였다. 나와 아이들을 위해 평생 헌신과 희생을 한 아내의 은공을 절대 잊어선 곤란하지. 난 문과 출신이고 아내는 이과 출신인데다 성격도 전혀 맞지 않아 다툴 일이 많을 법한데 의외로 부부싸움을 그리 많이 하진 않았던 것 같다. 아내는 자신이 늘 양보해서 그렇다고 공치사하고 난 나대로 무던한 내 성격 덕분에 부부싸움이 적었던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제 돌아보니 그런 것이 다 무슨 소용인가. 내가 아내를 너무나 좋아했기에 무난하게 살아오지 않았을까.
우리집 아이들 3남매 모두 어릴 때부터 유난히 순하고 착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우리 3남매는 아내와 나에게 정말 효성이 지극하다. 부모에게 대든다든지 말대꾸라곤 한 적이 없었다. 아이들도 그렇게 말한다. 나와 아내가 다른 부모들과 달리 자신들에게 너무나 따뜻하게 대해주었다고. 그런 말을 들으면 나와 아내가 고개를 갸우뚱한다. 진짜 우리가 아이들에게 잘 해주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아이들에게 따뜻하게 대한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아이들이 좋은 게 좋다고 그냥 우리 둘 기분 좋으라고 말해 준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한 적도 있다. 어쨌든 아이들이 우리 두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효도를 해주어 그냥 고맙기만 하다. 며칠 전에는 아내가 전화를 해서 막내 아들 13평 아파트 전세 구하는데 돈을 좀 보태주면 좋겠다고 하기에 흔쾌히 동의했다. 어차피 도시 본가에 있는 집은 아내 명의로 되었다. 아내가 자신 명의로 해달라고 하기에 그렇게 해주었지. 처가 자매들 모두 그렇게 딸 명의로 했다는 말을 듣고 진짜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시간이 지나 동서들과 이야기하면서 알았네. 대부분 동서 명의였고, 막내 동서만 부부 명의였다네. ㅋㅋ. 주위에선 황혼 이혼도 흔한테 그렇게 부인에게 명의를 넘겨 주면 나중에 늙어 거지가 된다고 조언도 했지만, 난 그래도 괜찮다고 호기롭게 말했었지. 지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아내 명의의 집에서 담보 대출하여 3남매 모두에게 동일한 금액으로 차례 차례 보내 준 모양이다. 몇 년에 걸쳐 그렇게 조금씩 보태 주니 각자 삶의 공간을 어떻게든 만들어 가는 것 같다. 이제부터 각자가 알아서 자신의 빚을 갚아가야 하겠지. 그래도 부모 입장에서 아이들이 이 험난한 세상 MZ세대가 살기 너무나 가혹한 현실을 살아가는데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고 싶었다. 나와 아내가 노후에 누리고 싶은 것이 무에 대단한 것이 있을까. 내 연금은 아내가 자신의 재산인 양 쓰고 있다. 아이들 대출 빚고 갚고 집안 살림에도 쓴다. 지금껏 너무나 알뜰하고 착실하게 가계를 끌어온 아내라 알아서 잘 해내고 있다. 자신을 위해선 비싼 것을 사본 적이 별로 앖는 아내가 아이들을 위한 거라면 진짜 돈 아끼지 않고 베풀었다. 지갑 속에 오랜 기간 쓰지 않고 보관한 현금은 결국 3남매 누군가에게 전해 주었지. 최근에는 대부분 경기도 남양주에서 혼사 생활하는 막내아들에게 많이 쏠렸지만. 언젠가 3남매에게 이렇게 말했다.
"형제가 우애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무작정 우애만 있어선 안 된다. 아버지를 봐라. 형님과 평생 싸움이라곤 하지 않았고, 형님 하시는 일에 무조건 동의했다. 그렇게 하면 형님이 당연히 나의 몫을 챙겨줄 줄 알았다. 전혀 그렇지 않았다. 부모님이 남겨 준 재산 전혀 물려 받지 못 했다. 형제끼리 재산을 놓고 싸우는 것은 당연하다. 단 너희들은 우리가 가고 없을 때 무조건 1/N로 한다는 것을 명심해라. 무슨 무슨 조건을 달아 누가 더 가져가고 덜 가저 가는 거 절대 없다. 지금처럼 엄마에게 효도를 잘 하는 너희들이지만 행여 내가 먼저 세상을 떠서 없어도 지금처럼 변치 않고 엄마에게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재산 문제는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물론 그래도 싸울 일이 있겠지만 필요할 때는 형제간 싸움을 절대 두려워 하지 말고 자신의 생각을 강력하게 주장해라. 난 그렇게 생각한다. 형제끼리 서로 견제도 필요하다. 각자 가솔들을 이끌어야 히기 때문이다."
아직까진 우리집 아이들 3남매 각자 직장 생활하면서 아내에게 지극정성이다. 너무나 고마운 아이들이다. 가끔 나에게 전화를 해서 안부 인사를 하지만 아직은 그들의 삶에 충실하기를 바랄 뿐이다. 며칠 전 새벽에 일어나 책을 읽고 있는데 막내 아들이 전화를 해서 이런 저런 대화를 하는 도중에 직장 생활의 애환을 들려 준다. 이제 겨우 3년째인데 힘든 것은 한 십 년 겪은 것처럼 말한다. 아무래도 막내라서 그런 것 같다. 그래도 격려했다. 지금 생활이 힘들 줄은 안다. 하지만 세상사 남의 주머니에서 돈을 받아내는데 공짜가 어디
있고 쉬운 일이 어디 있을까. 국가 돈도 엄밀히 말하면 내 주머니 돈이 아니지 않는가. 너무 심한 것은 참을 필요가 없지만 그렇다고 사소한 어려움까지 감내하지 않으려면 곤란하지 않을까 하고. 막내의 처한 현실을 내가 제대로 모르면서 꼰대처럼 충고한 것은 아닐까 살짝 후회도 했다. 그래도 막내아들이 생활을 잘 하고 있다니 고맙기만 하다. 행여 어려운 일이 생기면 절대 망설이지 말고 바로 연락해 달라고는 해 두었지.
둘길을 따라 걸어가면서 겨울답지 않은 청량한 강바람을 온몸으로 들이마신다. 변함없이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면서 길게 늘어진 둑길에 아무도 없는 고즈넉한 여기를 나 혼자 걸어간다. 춥지도 않고 시원하게 느껴지는 강바람이 그 옛날 아득한 어린 시절엔 유난히 추웠지. 강물은 겨우내 꽝꽝 얼어 있었고, 그 빙판 위로 강마을 산 기슭으로 나무하러 떼로 갔었지. 그곳은 길이 없어서 평소엔 산 아래 깊숙한 곳에 들어갈 방법이 없었지만, 겨울 얼음이 단단하게 얼면 오히려 접근하기 좋았지. 그렇게 스무 명 정도 동네 아이들이 지게에 가득 가득 마른 풀잎을 가득 베어 직사각형 나뭇짐을 세 줄로 새끼로 묶어 그 속에 지게를 푹 꽂고 일어서서 걸어가는 행렬은 빙판 위 아랍 상단 행렬 같았다. 얼음이 아무리 단단하게 얼었다고 해고 한 낮이 되면 녹아지면서 위태롭게 보였다. 물론 얼음이 깨지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래도 사람 마음에 불안함은 가득했다. 다들 걸음을 재촉하여 강 이쪽으로 얼른 넘어와서 모래사장에 지게들을 줄지어 세웠다. 그리곤 모래 사장에 둘러 앉아 숨을 몰아 쉬면서 강 건너 우똑 솟은 바위들을 바라보았지. 내일은 좀더 옆으로 들어가 나무를 하는 것이 좋겠다는 동네 형의 제안에 우리 모두 동의하고 잠시 그곳에서 놀곤 했었지.
편을 만들어 닭싸움도 하고 흥이 오르면 기마전도 했다. 그리고 가져 간 물을 나워 마시며 다시 집까지 걸음을 재촉한다. 이번엔 둑을 넘어서서 황량하게 펼쳐진 들판을 바라고 그 사잇길 농로를 따라 긴 행렬을 이루었다. 들길도 아마 2km는 넘었을 거다. 그렇게 집에 도착하면 커다란 나뭇짐을 보고 가족들이 깜짝 놀라며 반겨주면 무슨 전쟁 영웅이라도 된 듯한 느낌이었다. 다른 아이들은 평소 나무를 많이 해서 으레 그런가 보다 했지만 난 나무를 한 적이 거의 없어서 너무나 서툴렀는데도 그날따라 유난히 큰 짐이라 가족이 놀랄 만했지. 나무해서 제대로 칭찬받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빙판 위로 그렇데 니문짐을 진 사람들이 떼로 이동하는 것이 정말 위험한 일이었다. 가끔 그 때 그 일을 떠올리면 순간 아득해진다. 맨손에 수건만 두르고 복싱한 것은 또 얼머나 위험한 일이던가. 편을 만들어 닯싸움하면서 부상자가 안 나온 게 천만다행이지아. 가마전도 그랬다. 처음엔 조심 조심 하다가 분위기가 달아오르면서 상대 기수를 쓰러뜨리는데 몰두하여 자신의 발 아래 누가 있는지 살피지도 않고 허공에 몸을 날린 일이 많았다. 바닥이 모래사장이락 그것 믿고 그랬을까.
추억이 가득한 공간을 지나 옆 마을 들판이 눈에 들어온다. 우리 마을과 인근 마을이지만 생활 공간이 너무나도 달랐다. 이곳을 경게로 초중학교가 확연하게 갈라졌다. 그리고 우리집 수박밭에 수박을 사러왔던 인근 여고 학생과 원두막 아래에서 눈이 맞았던 일도 생생하게 떠오르고. 내가 여름방학을 맞아 시골집 수박밭 원두막에서 수박을 진열해놓고 팔 즈음에 수박을 사러 온 인근의 여고생 모습에 단번에 넘어갔었지.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른다. 태어나 처음 만난 이성이고 순수한 그 모습에 시쳇말로 '뿅' 갔던 날이었다. 그 여학생과는 인연이 될 뻔했지만 여름방학이 끝나고 도시로 돌아 간 뒤 보낸 내 편지를 그 여고생의 오빠가 잔인하게 가위로 잘라 버렸다네. 세상에! 쯧쯧. 그것도 한두 번도 아니고.
들길엔 봄 여름 가을까지 풍성하게 자태를 드러냈던 풀잎들이 겨우바람에 기운을 잃고선 맥없이 나를 쳐다본다. 내년 봄이면 다시 활기를 띠고 날 반겨줄 테지. 그렇게 삶의 윤회가 이어지는 것이지. 사는 게 별 거 있나 하면서 혼자 중얼거리며 걸어간다. 저멀리 작은 역사가 조금씩 보인다. 한 30분 있으면 아내가 저 시골역에 내리고 둘이선 반가운 마음에 손이라도 잡고 오랜만에 본 김에 꼭 안아야겠지. 환하게 종종걸음으로 다가오는 아내의 만면 미소를 그린다. 그리고 둘이서 조그만 역사를 빠져나와 들길과 둑길을 걸으며 그간 못다한 담소를 하겠지. 나란히 섰다가도 내가 앞장서기도 하겠지. 평생 나를 위해 고생한 아내를 보면 괜히 미안해지고 그런 마음뿐이다. 아내 말마따나 자신이 나를 구제해줬다고 하는데 그건 동의할 수밖에 없지. 드라마 제목을 흉내내어 자신을 '추앙'해달라는 아내에게 그렇게 하겠노라 했었다. 지금껏 아내를 사랑하고 존중하고 추앙한 것은 맞는지 잘 모르지만 오늘 걸어가는 마중길엔 겨울 바람도 따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