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마을에서 좀 떨어진 산녘 단풍길이 아름답다고 해서 집을 나섰다. 아직은 혼자 어딜 다니는 것이, 조용하게 걸어가는 시간이 여유롭게 느껴지기에 가급적 이렇게 가벼운 차림으로 홀로 가기로 했다. 최근 시내 서점에서 산 문고판 소설책을 한 권 들었다. 스마트 폰은 주머니에 넣고 단풍길을 즐기기로 했다. 오가는 사람이 거의 없다. 하기야 마을에도 젊은이들이 대거 도시로 빠져나가고 집집마다 노인 한 두 명씩 정도 사는 이곳이니 단풍길이 아무리 아름답다 한들 사람 발길이 드물 수밖에 없다. 어렸을 때는 경운기가 어렵게 지날 만큼 좁았던 길인데 이젠 지자체에서 사람들이 걷기 쉽도록 정성껏 포장도 해놓았다. 단풍길에 혼자 들어서니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도 청량하다. 어렸을 때 동네 또래들과 걸었던 곳이라 낯익다. 나무들이 그때보다 엄청나게 자라 풍성한 숲을 이룬 것이 달라졌을 뿐. 누군가 같이 가면 좋겠다는 생각도 문득 들었다. 부질없는 기대겠지.
한참 걷다 보니 연배가 꽤 있는 분께서 저만치 걸어가고 있다. 지팡이를 짚고 천천기 가고 있는 뒷모습을 바라보니 나의 훗날을 미리 보는 듯하다. 아마도 나처럼 시골로 낙향하여 은거하면서 이 단풍길을 홀로 걷고 있는 분이겠지. 이 곳 출신이면 초등학교나 중학교 아니면 초중학교 모두 선배일지 모른다. 조금 걷다 가까이 가면 인사라도 나누리라. 아무래도 내 걸음이 저분보다 빠르니 단풍길 끝날 즈음엔 나란히 걸을 것 같다. 입성을 보니 농사를 짓는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나처럼 책을 읽거나 글을 쓰다 잠시 제쳐놓고 나왔을지 모른다. 아무로 모르는 진짜 세상 인연이 끊어진 곳에 낙향하려 했지만, 어떻게 하다 보니 어린 시절 자라고 생활했던 그곳 근처로 왔다. 셋방을 얻은 집도 집안 먼 친척 형수님이시니 어디 멀리 갈 수나 있나. 80세가 다 되어 가는 집주인도 내가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는 혼자 적적하셨던 모양이다. 그리고 내가 적으나마 월세 1년 치를 한꺼번에 지불하고 매월 식사비까지 드리니 용돈은 충분하게 되었다며 좋아하셨다.
며칠 전에 주인 할머니를 뵈러 온 자제들도 얼굴도 모르는 나에게 아주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어머니를 잘 부탁드린다고 하면서. 아니 내가 부탁을 해야 하는데 왜 이렇게 부탁을 하는 거지 하면서 고개를 갸우뚱하니 그집 아들이 이렇게 말했지.
"어머니께서 여기 혼자 사시니까 늘 걱정되거던예. 집안 아재가 도시에서 생활을 마치고 이곳 촌에 오신다 카이 마을 사람들이 진짜 좋아했습니다. 그 카다가 우리 어머니 집 방 하나를 월세로 쓰신다고 해서 우리 자식들 입장에서 다행이라 생각했지예. 집안 친척 아저씨가 그것도 많이 배우신 분께서 여기 촌까지 오셔서 마을 사람들과 함께 살아주이 이 마을 사람들도 우리 자식들도 좋아할 수밖에 없었지예. 거~다가 아저씨께서 월세를 전혀 깎지도 않고 1년 치 몽땅 어머니께 주셨다 카이 진짜 좋아하시대예. 반찬값도 마이 주시고 간간이 도시에 볼일 보러 갔다고 오시면서 선물도 해주시고, 저희들보다 우리 어머니를 훨씬 많이 돌봐 주시는 것 같습니다. 아재예! 웬만하면 여~서 계속 사시이소. 돈은 마이 주실 필요는 없고예. 우리 어머니도 가끔 돌봐주시고 말입니더."
아니 내가 도움을 훨씬 많이 받고 있는데 집주인 아들이 그렇게 나에게 고맙게 생각한다니 어색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그집 식구들이 노모를 부탁한다는 말에 그렇게 하겠노라고 답은 했다. 그래도 내가 도움을 훨씬 많이 받을 텐데. 단풍길 산책을 나선다니 조그만 도시락이라도 준비해 드릴까 하면서 할머니께서 말씀하셨지만 자끄 그렇게 하시면 부담이 된다면서 완곡하게 사양했다. 할머니께서 못내 서운해 하셨지만 앞으로를 생각해서라도 부담을 지울 수는 없었다.
내가 이곳에 와서 생활하면서 보니 외지에서 들어온 사람들과 원주민들 사이에 알게 모르게 크고 작은 갈등이 있는 것 같다. 나야 어린 시절 자랐던 고향 마을로 들어와 마을 사람들이 부탁하면 뭐라도 해드릴 마음이 가득하지만 외지에서 들어온 사람들은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얼마 전에 마을 발전기금 문제도 서로 옳다고 논쟁이 있었던가 보다. 마을 이장이 나에게 와서 외지인들을 설득해 달라는 눈치였지만, 난 이곳에서 그런 갈등의 소용돌이엔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몇 살 후배인 마을 이장도 이런 갈등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듯하다. 조만간 한번 만나 막걸리라도 나누며 그의 애환을 들어주려 한다. 아주 어렸을 때 본 적이 있지만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다. 그래도 내가 이곳에 왔다는 말에 바로 찾아온 이장을 보고 정말 좋았다. 그날로 강변에 있는 식당에서 저녁 노을을 보며 막걸리를 나눠 마셨지. 강 건너 삼대 마을과 반쟁이 마을 장년들도 합류해서 인사를 나누고 했었지. 그쪽 장년들은 전혀 모르는 얼굴이었다. 그래도 어린 시절 추억을 떠올리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우리 마을 사람들과 인연이 꽤 있어서 담소가 풍성하게 이어갔었지.
지금처럼 나 혼자 단풍길을 걸으면서 상념에 잠기다 보니 지난 날의 여러 추억이 동시에 떠오른다. 시간 차이가 있는 사건들이나 추억도 함께 얽혀 떠오른다. 이 나이가 되면 다 그런가 보다. 아주 큰 기둥에 기대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단풍길에 난 나무숲 사이로 들어오는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이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난다. 화려한 녹색 시간을 보낸 단풍이 우리에게 너무나도 아름다운 색채를 안겨 주지만 잎새 그 자체는 점차 말라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누군가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면서도 정작 자신은 말라 죽어간다는 세상 이치가 우리네 사람살이와 흡사한 것 아닌가. 그렇다고 남을 위해 무작정 희생하란 뜻이 아니다. 단풍잎을 보니 그렇다는 뜻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