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토요일에 제가 쓴 책 <불택(不擇)> 출판기념회가 열리는데, 참으로 오랜만에 고향에서 형님이 오십니다. 우리집 아이들 3남매가 아직 결혼 소식이 없어서 우리집에서 큰 행사를 없었던 탓에 지금까지 제가 고향에 가서 집안 행사에 참여하였지요. 책을 출판한다니 형님께서 너무나 좋아하시며 행사에 반드시 참석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저와 다섯 살 터울 형님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단 한번도 형님과 언쟁이 없었습니다. 어린 시절 형님의 덩치가 상당히 컸던 영향도 있었겠지만, 지금까지 저에게 그 흔한 비속어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비단 저뿐만 아니라 동생들이나 마을 사람들에게도 험한 말을 거의 쓰지 않았지요. 욕설은 당연히 없었고요. 그리고 어릴 때부터 저를 정말 많이 아껴주었습니다. 저도 형님께 달려든다든지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었지요. 저에게 비속어도 사용하지 않고 형제들끼리 흔히 발생하는 주먹질도 전혀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도박 때문에 중학교 2학년을 휴학하고 시골에 내려와 지게를 졌던 형님의 안타까운 그 시절이 생각납니다. 시골 국민학교에서 최상위 성적으로 선생님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아 대구 시내 중학교로 진학하고 학급에서 2등을 할 정도로 성적이 빼어났습니다. 그대로 올라가면 영남 최고의 명문 경북고등학교에 당연히 진학하고 이어서 서울의 명문대학 코스를 밟을 수 있었지요. 하지만 아버지께서 도박을 하여 살림을 망치는 바람에 공부 잘하는 모범생 형님이 직격탄을 맞아 버렸습니다.
세상에 대해 불만도 많았을 법한데 형님은 절대로 내색을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제가 공부하는데 강력한 성원과 격려를 주셨습니다. 형님에 비해 저의 공부 실력은 많이 부족했는데도 제가 대구 시내 연합고사로 대구고등학교에 진학하였을 때 정말 좋아하셨지요. 그리고 대학 시험에 합격하던 날 들판 비닐 하우스에서 일하다가 제가 달려가서 전한 합격 소식에 그 두꺼운 손으로 축하해 주던 참으로 무던한 성품의 형님이었습니다. 선보러 가는데 양복 한 벌이 없어서 동네 형님 옷을 빌려 입고 가신 적도 있습니다. 들일을 무지하게 많이하여 힘들었을 텐데도 온 식구가 하루종일 일하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 씻고 저녁밥을 먹고 나면 마루에 걸터 앉아 기타를 연주했었지요. '과수원길' 노래를 연주하면 저와 여동생이 함께 부르고 어머니 아버지는 곁에서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 보셨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담장 너머로 부러운 듯이 바라보고 있었고. 참으로 아름다운 그림처럼 남았습니다.
형님은 공부만 잘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미술도 정말 잘 했습니다. 작은 방 문 위 벽에 형님이 그린 꽃 화분 정물화는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얼마나 정교하게 그렸는지 꽃이 살아 있는 듯하였습니다. 당시 농촌에서 유행이었던 4H 활동에도 적극적이었습니다. 달성군 4H 회장 선거에 당선되어 마을 사람들의 박수를 받기도 했습니다. 체격도 뛰어나고 인물도 좋아서 마을 사람들이 기대를 많이 했었습니다. 토마토 비닐 하우스 특작도 부지런히 했었지요. 아무래도 농사에는 익숙하지 않아 미흡하기도 했지만 정말 성실하고 정직했었습니다. 당시 주위 사람들이 심훈의 소설 <상록수> 주인공 박동혁과 비슷하다고 했을 정도였습니다.
형님이 중학교 다니던 때 대구에서 주말에 시골집에 다니러 오면 저와 여동생 준다고 사탕을 꼭 사가지고 왔습니다. 형님 용돈도 궁했을 텐데 철모르는 저와 여동생이 시골에서 기다리는 것이 눈에 밟혀 그랬겠지요. 지게에 소풀을 가득 쌓은 채 짊어지고 산등성이를 내려오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형님은 중학교 고등학교 나이에 학교도 가지 않고 일을 무지하게 많이 했습니다. 그래도 늘 입가엔 미소가 잔잔하게 번졌고, 동생을 대할 땐 절대 함부로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냥 동생들을 아끼고 사랑했습니다. 부모님 돌아가시고 제가 대학 마지막 등록금이 없을 때 그 귀한 송아지 한 마리를 끌고 나와 고령 우시장에서 팔아 등록하게 해준 것은 평생 은혜가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형님 당신도 분명 세상에 대해 불만이 있었을 텐데도 절대로 표시하지 않았으니 그 속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제가 고교 시절 대구에서 친척집 하숙하던 때, 형님께서 대구 칠성시장에 수박 경매하고 돌아갈 때 꼭 제 하숙집을 들렀습니다. 용돈도 놓고 가고요. 그렇게 따지고 보면 형님 당시 나이가 불과 스물 두 살, 세 살 정도였지요. 우리 마을에서 가장 가난했을 집에서 아들을, 동생을 대구에 하숙을 시키려면 우리 가족들이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당시 마을 사람들이 말하는 소위 '등꼴 빠지는 격'의 고생을 하였겠지요. 그중에서 형님은 또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그래도 저를 만나면 환하게 웃어주시던 형님이었습니다.
제가 군에서 제대 후 대학에 복학하였을 때 에피소드도 생각납니다. 대학 캠펴스를 형님과 나란히 걷고 있는데 대학 중앙도서관 약간 오르막길을 걸어가는 길 가운데 천 원 짜리 지폐가 10여장 떨어져 있었습니다. 누군가 급하게 가다가 떨어뜨렸지요. 저와 동시에 그것을 발견했는데, 형님이 그 돈을 주어 곧장 도서관 경비원에게 돈을 주운 사실을 신고했습니다. 그냥 우리가 썼으면 하는 것이 솔직한 저의 심정이었습니다. 형님께서 돈 잃어버린 학생의 심정을 떠올리면서 빨리 그 학생에게 돌려주었으면 좋겠다고 경비원께 신신당부하셨지요. 그 후로 그 돈을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모릅니다.
참 대학동기들이 초여름 농사철에 단체로 일을 하러 우리집에 자주 왔었습니다. 대학 동기들이 착하고 순진했습니다. 대부분 시골 출신이라 그랬을 것 같습니다. 한번은 모내기를 해주고 대구로 돌아갔는데, 친구들이 가고 난 뒤 모를 심은 논에 일부 모들이 둥둥 떠 있었습니다. 그날 달밤이었는데, 형님과 저 둘이서 둥둥 뜬 모들을 다시 심었던 기억도 납니다. 형님은 그 순간에도 짜증이나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수박 농사를 할 때는 대구에 와서 우리 동기들 저녁 식사에 술까지 사주고 내려가시도 했습니다. 친구들이 상에 젓가락 장단으로 노래를 청하면 형님은 몇 번이나 사양하다가, "울려고 내가 왔던가 웃을 려고 왔던가~~~~~" 노래를 흥겹게 부르셨지요. 그런 일들이 새록 새록 떠오릅니다.
아버지 살아 계실 적에 도박 등으로 가사에 전혀 책임지지 않고 어머니께서 하루 종일 들에서 온몸이 새카맣게 일하던 것 것 때문에 둘째 아들인 저로선 아버지가 용납이 되지 않았습니다. 정작 어머니는 아버지께 별 불만이나 반응이 없으신 편이지만 전 아버지께 정면으로 대들다 지게 작대기로 사정없이 맞았습니다. 당시엔 제가 정당하다고 생각했었지요. 세월이 가면서 아버지께도 참으로 죄송한 마음이 커져갑니다. 지금 제 아들이 저에게 그렇게 바락바락 달려들면 제가 과연 견딜 수 있을까도 생각해 봅니다. 당시 제가 천지도 모르고 달려들다 아버지께 두드려맞는 것을 보고 들일을 마치고 집에 온 형님이 아버지 허리를 꽉 붙잡고 말려 주셨지요. 그리고 이모나 외삼촌 집으로 빨리 가서 피하라고도 하셨지만 형님은 아버지께 절대로 대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때 동네 사람들이 '역시 장남은 다르다'란 말을 많이 하였습니다. 저도 그건 인정합니다. ㅎㅎ.
둘째 이모네 집에 가서 이모에게 하소연과 아버지의 잘못을 한참이나 고자질하다 그냥 잠들었습니다. 잠결에 마당에서 둘째 이모와 아버지가 주고받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모가 '하루 재워 내일 보낼 테니 너무 걱정마시라. 한창 크는 아~들이 다 그렇지, 우짜겠어요. 최서방이 너른 마음으로 이해해야지' 하면서 아버지를 달래고 아버지도 제가 걱정이 되어 왔다고 하면서 하루 재우고 보낸다니 미안키도 하고 고맙기도 하다면서 다시 집으로 가셨지요. 전 두 분의 말씀을 다 들었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무조건 저를 혼내는 사람이 아니구나. 아버지도 저를 아끼고 사랑하고 계셨구나 하고 깨달았습니다.
다음 날 이모가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언제 가져 왔는지 제 책보자기를 옆에 두었더군요. 이모집에서 아침밥을 맛있게 먹고 이모가 주는 용돈도 받고 기분 좋게 나오는데, 제가 잤던 방 한쪽에 지폐가 보입니다. 아버지가 몰래 두고 가셨던 모양입니다. 그 뒤에도 아버지와 대화가 원만하지는 않았지만 충돌하는 횟수나 강도가 확연하게 줄었습니다. 형님이 보기에 저의 처신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을 텐데 그래도 단 한번도 저를 질책하지 않았습니다. 그 오랜 세월을 지금까지도 말입니다.
형님과 있었던 에피소드가 정말 많습니다. 다 쓰려니까 호흡이 제대로 안 되네요. 어쨌든 지금까지 저에겐 참으로 하늘 같은 존재였습니다. 늘 저를 격려하고 성원하면서 따뜻한 마음을 주셨습니다. 제가 형님께 해드린 것은 별로 없는데, 형님은 부모처럼 우리들에게 해주었지요. 그것만으로도 형님께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이번 토요일 출판기념회에 오시면 가족 친척 지인 대표로 인사말을 부탁드릴 생각입니다. 뛰어난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기회도 빼앗겨도 불만 한번 제대로 털어놓지 않고 오랜 세월 일만 무지하게 해온 우리 형님, 천성이 순하고 착한 형님의 한 말씀이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