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날 아무런 이유도 없이 늙음이 그냥 두려웠습니다. 절대 늙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내 나이가 젊은 시절에는 정말 아득한 미래 까마득한 시간 저 너머 존재하는 노년이었습니다. 왠지 나에게는 그 늙음이 다가오지 않을 듯싶었습니다. 늙음이 오지 않는다기보다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게지요. 그리고 나이가 들면 뭐 하고 지낼까 고민도 할 새도 없이 세월은 그야말로 지름길로 달려와 어느새 내 곁에서 고개를 쏙 내밀고 저를 바라보고 있네요. 민태원의 <청춘예찬>을 고1 국어교과서에서 처음 접했을 때 그냥 무덤덤했습니다. 그런데 영어 선생님께서 갑자기 그 수필의 구절구절을 언급하면서 햐~! 얼마나 좋은 말이던가. 얼마나 화려한 단어인가. 너희들은 그런 것을 실감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면서 홀로 도취되어 죽 암기해서 읽어 내려갔었지요. 솔직히 우린 영어 선생님이 쓸데없는 말로 시간을 허비한다고 보았던 것이지요. 가만히 생각하면 그때 그 영어 선생님께선 40대 초반에 불과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청춘에 대한 예찬, 부러움을 한껏 표현하셨으니.
지금에 와서 돌아보니 10대 청춘은 진짜 황금 시기였네요. 그냥 좋았던 시절이네요. 그리고 이젠 늙음이 제 곁에 머물러서 노년 세대의 삶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제 몸에서 떨어뜨리고 싶어도 절대 불가능한 삶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요즘 가만히 생각해 보니 지금 이 나이가 어떤 면에선 괜찮은 것 같습니다. 직장에서 하루 종일 꽉 짜인 스케줄을 소화하느라 정신없이 보내는 그런 시절도 지나갔고, 부양가족을 위해 내 온몸을 불태워야 하는 시기도 아니고, 가끔은 나를 위한 이기적인 생각도 가질 수 있고 말이지요. 여러 가지로 노년의 삶도 괜찮은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아침저녁 아내 출퇴근 시간 외에는 모두 제 자유시간이 되었고, 그 틈을 노려하고 싶었던 일을 마음껏 할 수 있어서 좋은 것 같습니다. 어딘가에 얽매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 매력적입니다. 경제적으로 크게 여유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남에게 손을 벌릴 정도가 아니니 그것만으로 족합니다. 아직은 건강 상태가 괜찮아서 병원비도 거의 들어가지 않지요. 건강 자랑은 참으로 어리석은 것이라고 하는데 말입니다. 이제부터 언제 아파도 담담하게 수용해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미래의 걱정을 미리 당겨서 하고 싶은 마음은 결코 없습니다.
퇴직 후 가장 많이 하게 되는 것은 역시 '독서'입니다. 세상에 읽을 책이 얼마나 많나요. 시내 서점에 가서 책을 가득 사가지고 올 때는 며칠 내 독파할 듯했는데, 막상 읽기 시작하면 몇 페이지에서 멈추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래도 이 나이니까 가능한 것 아닐까 싶습니다. 누군가의 간섭을 받는 것이 아니니까요. 무슨 일정이 있어서 구속될 것도 아니고요. 아내는 퇴직 후에 책을 사거나 읽는 것은 자제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였지만 아직은 책 읽기가 노년에 괜찮은 활동입니다. 그리고 취미 활동으로 '색소폰'을 배우고 있는데, 처음 일정 기간엔 소리가 제대로 안 나서 참 짜증이 많이 났습니다. 다른 사람은 저렇게 잘 하는데 난 왜 이리 소리가 나지 않을까 싶었지요. 그러다가 시간이 점차 흐르면서 조금씩 소리가 나고 트로트 노래 연주고 띄엄띄엄 하게 되네요. 아무래도 트로트 노래부터 하는 것이 익숙한 노래라서 편하지요. 다른 사람들에 비해 제 연주 실력이나 진도는 많이 떨어집니다. 그래도 이 나이니까 괜찮다고 스스로 위로합니다.
耳順 대열에 올라서서 더욱 빨리 흘러가는 시간의 속도를 실감합니다. 앞으로는 빠른 속도로 달려 가겠지요. 오늘은 아침에 아내와 아이들 출근길 태워주고 집에 돌아와 커피를 한 잔 마시며 잠깐의 여유를 누립니다.
아파트 거실 창문 너머로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겨울비인지 봄비인지 가늠이 안 가네요. 하기야 겨울비면 어떻고 봄비면 또 어떤가요. 커피를 마시다 창문 너머 멀리 바라보는 것 자체로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이것 또한 삶의 행복이 아닐까 싶습니다. 평생 큰 고생하지 않고 살아왔기에 제 삶은 평탄했던 것 같습니다. 아직까진 어디가 아픈 것도 아니고 말이지요. 그래서 생각해 보니 지금 제 나이가 가장 좋은 것 같습니다. 무슨 뚜렷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실제 제 삶을 바라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드네요.
가끔은 지인들과 둘러 앉아 맛난 음식에 술잔이라도 나눌 수 있음에 고마움을 느낍니다. 그런 나이가 되었습니다. 상대방이 사줘도 고맙지만, 이젠 제가 지인들을 모시고 대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비싼 음식이 아닐지라도 그냥 편안 사람들을 초대하여 함께 둘러 앉아 담소를 나눌 수 있는 것도 지금 이 나이에 누릴 수 있는 삶의 기쁨인 것 같습니다. 어쩌다 부족한 실력이지만 강의 요청을 받아 강의료라도 생기는 날에는 일부라도 내놓으며 친구나 지인들을 불러 대접할 때 진짜 삶의 보람을 느낍니다. 아직은 실력이 많이 부족해서 강의 요청이 그리 많이 들어오진 않지만 그래도 일 년에 몇 번이라도 강의 기회가 있음에 세상사람들이 고맙기만 합니다.
다양한 취미 활동은 한계가 있지만,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에 출근하는 대안학교 근무도 퇴직한 저에게 참으로 고마운 일입니다. 젊은 선생님들과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며 그분들과 즐거운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도 지금 이 나이니까 가능한 것이겠지요. 그 선생님들은 아이들 지도하느라 하루 종이 진이 빠지도록 고생하시는데 저 혼자 여유롭게 지내면 그건 곤란한 일이지만 그래도 그분들이 저를 따뜻하게 대해줄 때 그 또한 '행복'이라 여기고 가급적 그분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즐겁고 편안하게 해드리려 애를 씁니다. 지금 이 나이가 되어서 가능한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