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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살던 고향은

by 길엽


(81) 고향의 봄. 동요 고향의봄. - YouTube


나이가 들면서 '고향(故鄕)' 추억을 많이 생각하게 됩니다. 가난했지만 소박하고 행복하던 시절, 집밖을 나서면 골목길이 곧장 나오고, 넓은 공터, 앞산 민둥산에 가면 언제나 또래 아이들이 가득 가득 모여 있던 그런 시공간이지요. 마을을 벗어나 길게 난 들길을 따라 걸어가면 그 넓은 평야 논밭들에는 아재 아지매들이 또 얼마나 많았던지 지금 생각하면 그야말로 한 폭의 전통 민속화 장면으로 떠오릅니다. 토요일 일요일이 되면 학교 다니는 아이들이 부모 일손을 돕는다고 들판에 또 가득했지요. 일요일엔 아이들이 운전하는 경운기가 끊임없이 오갔고, 흙길의 들길은 풀이 자랄 새가 없었습니다. 새참이라도 먹을 때면 바로 옆 논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 맛있는 음식을 나눠 먹으며 잠시라도 담소를 나누던 때가 그립습니다.


같은 동네 사는 사람들은 피를 나누지 않았을 뿐이지 웬만한 친척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친하게 지냈습니다. 마을 전체가 거대한 혈연집단처럼 여길 정도로 서로를 아끼고 사랑했습니다. 어느 집에 무슨 좋은 일이 생기면 다 함께 모여 축하도 하고,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마을 전체가 단합하여 그 고통을 나눠 부담했지요. 그중 기억나는 에피소드 하나.


여름 방학이 되면 농한기가 되고, 아이들은 집에서 소를 끌고 나와 산으로 오릅니다. 그렇게 모인 무리가 약 40명 정도 된 것 같습니다. 마을의 소들은 다 모인 것 같습니다. 소들은 그들대로 계곡이나 비탈 등을 자유롭게 몰려 다니며 풀을 뜯었고,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모여 닭싸움, 공기놀이를 비롯한 다양한 놀이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녁 무렵이면 소들이 모두 천천히 올라와 산등성이에 배를 깔고 천천히 되새김질을 합니다. 황혼 무렵 산등성이에 소들과 아이들이 한데 어울려 참으로 평화로운 장면을 연출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어쩌다 소가 보이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소들이 풀을 뜯다가 숲속으로 너무 깊이 들어가 소뿔이 나뭇가지에 걸려 나오지 못한 경우가 많았지요. 대부분 저녁까지 소를 찾습니다. 그런데 밤이 되는데도 소가 보이지 않으면 마을 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산에 올라 잃어버린 소를 찾아냅니다. 제 기억엔 그렇게 길 잃은 소를 모두 찾았던 것 같습니다. 지금이나 그때나 소는 집안에 엄청난 재산이었지요. 소떼 속에 당연히 있을 것이라 믿은 아이는 제집 소가 보이지 않아 당황하게 되고 그 집 식구들은 공포에 휩싸입니다. 마을 이장인 우리 아버지께서 소 잃었다고 마이크로 방송하시고, 어머니는 그 집에 가서 아이가 무서워할까 안아 주면서 위로해 주셨다지요. 그러면 너 나 할 것 없이 산으로 오릅니다. 오랜 세월 경험이 있어서 소가 대충 어디에 있는지 찾아냅니다. 그런데도 저녁이 지나 밤이 깊어 갈수록 소를 찾지 못하는 경우 그 가족의 두려움은 더욱 커져갔습니다.


우리 마을을 내려다보는 큰 산 등성이에서부터 마을 주민들 특히 아재들, 형님들이 길게 줄서서 횃불을 들고 소를 찾아 내려옵니다. 그렇게 밤늦게 누군가 소를 발견하여 큰소리로 알리면 마을 사람들 전부 기뻐 소리를 질렀습니다. 누구라 할 것이 없었습니다. 당시 산 능선을 타고 이어진 횃불 행렬은 지금 생각해도 눈물나도록 고마운 행렬입니다. 이웃집 소를 반드시 찾아주어야 한다는 마음이 가득 가득한 횃불 행렬이었습니다. 소를 찾아 내려오는 주인 아재의 감사해하는 표정과 그집 아지매의 양순한 얼굴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집 아이는 그래도 소를 찾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제 고향 마을은 공동체 의식이 정말 강했습니다. 소를 찾은 주인 아재가 마을 주민들에게 감사하는 의미로 막걸리와 돼지고기 수육 , 정구지 찌짐 같은 음식을 내놓고 대접하는 날이면 집안 형수님들 아지매들이 미리 그집에 가서 음식을 함께 거들면서 준비했지요. 그러면 다시 그날의 이야기를 풍성하게 늘어놓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감동적인 에피소드입니다. 제가 군입대하던 날 집집에 인사를 하러 가니 아지매들이 2천원, 3천원 등의 용돈을 주신 것도 선명하게 생각납니다. 그런 고향 마을이었습니다.


이젠 고향에 가도 낯익은 얼굴을 좀처럼 접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아직도 제 얼굴을 기억하는 형님들 형수님들이 계시긴 하지만 제 어린 시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낯선 얼굴들이 마을을 차지해 버렸습니다. 어쩌다 집안 친척이라고 인사를 하는 사람을 만나면 영 낯설기만 합니다. 인사도 어색합니다. 반가움을 표시하고 싶어도 역시 불편하고 분위기가 데명데면하게 됩니다. 그래도 그 옛날 추억의 고향 마을 그분들이 살아 계실 적의 시공간이 제 가슴에 최고의 기억이 되었지요. 너무나 그립습니다. 그렇게 그리워하면서 저도 나이를 점점 먹어갑니다.


겨울에는 지게를 지고 산등성이를 한두 개 넘어가면서 한나절 내내 나무를 하거나. 여름이면 시냇물의 물줄기를 틀어막고 경운기 두 대를 마주 세워 놓고 양수기로 물을 다 퍼서 물고기를 그냥 쓸어담아 민물 매운탕에 막걸리를 나눠 마시던 그 장면도 떠오릅니다. 설 추석 명절 날에는 가설 천막 무대를 설치하여 인근 동리 주민들과 함께 노래자랑 대회를 하던 기억도 생각나네요. 마을 대항 성격이 되다 보니 우리 동네 대표로 누군가 나오면 홈구장의 우리 관객들이 엄청나게 큰 함성으로 호응도 했습니다. 나중에 너무나 공정한 심사 결과로 우리 마을 대표가 탈락해도 그 순간만 아쉬워했을 뿐 사회자의 멘트에 따라 다시 큰 박수로 응원하던 날도 그립습니다. 학교 운동회도 마을 대항으로 벌어져서 우리 동네 사람들은 한 곳에 모여 응원하면서 하루를 보냈습니다.


설날이 지나고 정월 대보름이 되면 마을 사람들이 다시 공터에 모였습니다. 잘 생긴 아재는 도포를 입고 나와 대감 차림으로 박수를 받았고, 익살이 넘치는 00 아재는 우리들을 즐겁게 해주었지요. 그리고 해마다 땅을 사든가 좋은 일이 생기면 유사가 되어 그날 경비를 부담했던 모양입니다. 제가 스무 살 되던 해에는 우리 집이 유사가 되었습니다. 제 대학 합격과 낙동강 강변 전답 구입 명목으로 우리집에서 그날 경비를 부담한 것이지요. 하루 종일 마을 곳곳을 돌아다닙니다. 5~6m정도 통나무를 형님들 여럿이서 동시에 옮기며 노래를 함께 부릅니다. 앞에서 꽹과리를 치는 아재가 소리를 멕이면 그에 맞춰 우리가 다같이 제창합니다. 먼저 앞에서


"정월 초하루 닫은 손 정월 초하루에 열어 주자!" 그러면 따라가는 우리들이 장단에 맞춰 통나무를 옮기면서

"정월 초하루 닫은 손 정월 초하루에 열어주다!"라고 크게 제창합니다. 이월 초이틀, 삼월 초사흘 등으로 아주 단순하면서 리드미컬한 라임이라 전체 분위기 흥겹습니다. 그리고 동네 한 바퀴를 돌 즈음에 꽹과리를 든 아재가 유행가 한 곡조를 뽑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루 종일 참으로 흥겨운 분위기가 가득합니다. 저녁이 되면 어느 정도 마무리하고 우리 집 마당으로 들어섭니다. 호마이판이란 상이 2열로 나란히 나란히 펼쳐지고 그 위엔 평소 먹기 어려운 음식들이 산해진미로 가득 쌓여 있습니다. 막걸리는 말통으로 얼마나 많이 놓였는지 모릅니다. 어머니가 춤을 주면서 일행을 맞아 주고, 대북을 잘 치시던 아버지가 하루 종일 북을 짊어 지고 장단을 맞추었지요. 하얀 광목 걸이가 저녁 무렵이면 땟국물이 스쳐갈 정도입니다.


그렇게 우리집에서 그 많은 마을 사람들이 맛난 음식을 함께 먹으며 웃음 보따리를 풀어놓습니다. 참 그리운 고향 추억입니다. 이젠 그런 공동체 활동을 하고 싶어도 젊은이가 거의 없고 있다고 한들 그 옛날처럼 모여서 흥겹게 놀 수가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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